★ 무너지는 민족경제
김좌진은 1901년 열두살 되던 해에 자신보다 두 살 위인 오숙근(吳淑近)과 혼인하였다. 그러나 이때에 불행히도 형인 김경진이 병사(病死)하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이에 어머니 이씨는 장남(長男)을 잃은 슬픔을 뒤로 하고 집안의 대소사를 모두 차남(次男)인 김좌진에게 맡겼다.
이 당시에 김좌진은 열세살의 어린 나이였고 비록 ‘개화청년’으로 불리우는 김석범에게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내정간섭과 독립협회의 활동 등 여러 이야기를 전해 들었지만 아직 근대적인 문명이나 사회제도의 개혁에 대해서는 깊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나라 이름을 바꾸고 자주독립국가를 선언했지만 한반도의 모든 이권은 일본과 러시아를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들이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열강들은 수출을 통해 이득을 얻기보다 이권을 빼앗아가는 일에 더 역점을 두었다. 이권을 차지한 열강들은 이권을 철저히 확보한 뒤 온갖 특권을 누렸다.
한반도에서 이권을 확보한 제국주의 열강 가운데 일본과 러시아의 경우만 살펴보자. 일본은 일찌기 서울과 부산 사이의 철도 부설권과 경기도 연해 어업권, 평양 무연탄 채굴권 및 충청·황해·평안도 연해 어업권 및 통신 관리권·하청 운하권·화폐 주조권을 장악했고 러시아는 경원과 종성의 금광 채굴권, 경성 석탄 채굴권, 두만강·압록강 및 울릉도 산림 채벌권, 해산 관리권, 동해안 포경권 등을 장악했다.
대한제국은 스스로 기술을 익혀 산업을 확충하고자 했으나 자본이 딸려 외국으로부터 많은 차관(借款)을 들여왔다. 그 차관은 주로 일본 자본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여러 가지 조건으로 인해 제대로 성과를 거둘 수도 없었고 이자 갚기에도 버거웠다. 차관은 결국 일본 자본에 예속되어 식민지 예속경제로 전락하는 길을 자초했을 뿐이었다.
1895년 이후 외래 상품의 수입과 조선 농산품의 수출도 가속화되었다. 일본이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 무렵 섬유공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혁명(産業革命)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들은 이 상품을 팔아먹을 시장으로 조선을 점찍었다. 일본은 광목 따위 옷감을 수출하는 대신 쌀을 비롯한 식량과 원료를 수입해 갔다. 이를 미면교환(米綿交換)체제라고 한다.
이전의 무역형태는 영국의 경공업제품과 조선의 농산물을 바꾸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일본과 중국은 영국제 옥양목을 중개무역하고 쌀과 콩을 수입해 갔다. 1895년 이후에는 영국제 옥양목보다 일본제 광목 따위를 직접 수출했다. 옥양목은 결이 좋고 하얀 광택이 있어 부드럽고 보기는 좋으나 질기지 못한 것이 흠이었다. 사람들은 차츰 옥양목을 사치품으로 여겨 조선 섬유제품 총소비량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이 무렵의 일본제 광목 등 면제품은 그 규격이나 품질 면에서 조선제와 비슷했다. 질기고 값이 싸면서 품질도 좋다는 것은 시장을 잠식하는 기본 요건이다. 일본 광목 총생산의 반 정도가 조선에 팔렸다. 아무튼 옥양목과 광목이 비슷하게 수입되다가 1905년 이후에는 광목이 완전히 시장을 독점했고 이로써 개항 이후 생긴 조선의 특권회사나 조선의 전통적 수공업이 몰락의 길을 걸었다.
여기에 화장품·보석·양주·과자 따위 사치품과 기호품이 곁들어졌다. 중심 수입국은 일본이었다. 그 전에는 일본과 중국이 비슷한 비중을 차지했으나 1895년 조선 총수입액의 70퍼센트 정도가 일본, 30퍼센트 정도가 중국 제품이었다. 1906년에 이르러 중국 제품은 13퍼센트 수준으로 떨어지고 거의 일본 제품이 차지하였다.
그 외 나라들의 제품은 1905년 18.6퍼센트, 1906년 13.8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이 배제된 가운데 독점적이라 할 정도로 일본이 자국 상품 또는 미국·영국·중국 등지에서 사들인 중개무역품을 많은 이익을 남기며 수출했던 것이다.
한편 금은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조선의 수출품은 거의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중심 품목은 쌀과 콩과 깨 등 식량, 쇠가죽 등 원료였다. 이 무렵 일본에서는 인구의 증가와 산업인력의 확대 등으로 양곡의 절대량이 모자랐다.그리하여 프랑스령 인도 지역과 영국령 인도 지역, 조선 등지에서 쌀을 사와 오사카나 고베 등 한신(限神)공업지대에 싼 값으로 공급하고 있었다. 1900년 무렵에는 쌀의 수입이 수출을 초과할 정도였다.
조선 쌀은 인기가 높았다. 찰지고 부드러우면서 일본 쌀과 품질도 비슷해 도시민들이 좋아했다. 조선 농민이 생산한 쌀은 포구의 객주에게 넘어가 중개인의 손을 거쳐 개항지로 집결되었다. 일본 상인들은 개항장에 버티고 앉아서 쌀값을 후려쳤다. 또 눈치를 살펴 안전하다고 판단되면 직접 현지에 나타나 쌀을 사들였다. 그들은 일본에서 금본위제(金本位制)가 실시된 뒤 사실상 사용하지 않는 은화를 들고 다녔다.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모든 조세와 공과금을 돈으로 지불하도록 되어 있었고 또 일본 돈을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안정적으로 쌀을 확보하고 값을 눅게 하기 위해 입도선매(立稻先賣) 방식도 사용했다. 곧 벼가 자라기도 전에 적당한 값으로 사들인 다음 추수한 뒤에 거두어 가는 방식이었다. 또 도부(到付) 장수들을 통해 화장품 등을 농촌에 공급해 쌀이나 콩을 받게 하고 이를 모아 실어 갔다. 벼슬아치와 구실아치들도 쌀장사를 한몫 거들었다. 이들은 세금을 전용해 쌀을 사서 팔기도 하고 세금을 현물인 쌀과 콩으로 받아 팔기도 했다. 이에 따라 쌀값이 폭등해 영세농민과 도시빈민들은 굶어 죽을 판이어서 도시 노동자로 전락하거나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유랑의 길을 나서기도 했다.
또 일본인들은 토지를 대량으로 사들여 농장을 만들었다. 그 중심 지역은 논산·강경 등 논뫼평야, 삼랑진·대구 일대, 군산·옥구·이리·목포·영산포 일대였다. 농장은 점점 확대되어 1900년대에는 경기도, 황해도로 번졌다. 한 농장의 소유토지는 많게는 수십 정보(町步)에 이르렀다. 일본인 농장주들은 조선인 소작인을 두고 쌀을 생산해 일본으로 실어 갔다. 이런 판세였으므로 그들은 봄철에 곡가(穀價)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었다.
쇠가죽을 얻기 위해서는 도살장에서 나오는 것뿐 아니라 일부러 소를 도살토록 하기도 했다. 조선의 법은 이를 금지했으나 밀도살이 공공연하게 행해졌다. 물량이 딸리자 쇠고기보다 높게 쳐서 값을 치르기도 했다. 그리하여 농사일에 쓸 소가 모자라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쇠가죽은 군인용 가방이나 장화 등을 만드는 데 쓰였다. 조선에 들어오는 일본 군인에게 가장 필요한 물건은 장화였다. 아직 길에 자갈이 깔리지 않았던 때라 비만 오면 황톳길로 변해 통행에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장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농산물 수출에서는 일본이 1895년부터 1906년까지 80퍼센트를 차지하였다. 이렇게 하여 한반도는 점점 자본주의 국가의 원료 공급지, 상품 수출기지로 확실하게 전락해 갔으며 이에 따라 민족경제는 파탄 상황으로 내몰렸다. 또 직조 등 농촌의 가내수공업도 몰락해 갔다.
이런 환경 가운데서도 조선인 자본가들은 외국의 이권 침탈에 대항해 민족기업을 설립했다. 1899년 정변조(鄭變朝)·이헌규(李憲珪)·김창한(金彰漢) 등 자본가들이 기계로 베를 짜는 한성방적고본회사(漢城紡績股本會社)를 설립하고 옷감을 물들이는 염색공장, 명주를 짜는 견직공장, 솜을 타는 조면공장 등을 세웠다. 서울과 지방의 직물업자들은 개량기계를 만들기도 하고 기계를 설비한 공장을 세우기도 했다. 그 외에 도자기공장, 종이공장 등이 세워졌다.
또 다른 종류의 회사들도 연이어 설립되었다. 1900년에는 서울에서 해서철광회사(海西鐵鑛會社)가 설립되었는데 황해도 재령광산에서 철을 생산해 외국에 수출하거나 자본을 모아 석탄을 생산하고자 했다. 같은 해에 대한철도회사(大韓鐵道會社)가 설립되어 경의선(京義線) 공사를 시도했고 같은 시기에 국내철도용달회사·운수회사 등이 설립되었다.
이들 민족자본가들은 때로 정부의 지원을 받아 안간힘을 쓰며 외국 자본에 대항했으나 늘 외국 세력의 견제나 방해를 받았다. 또 자본 부족과 기술 미숙으로 의욕만 앞섰을 뿐 제대로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더욱이 부정한 벼슬아치들이 외국 세력과 결탁해 이권을 팔아넘기거나 방임정책으로 일관해 이들은 번번이 좌절해야만 했다. 반식민지(半植民地) 상태는 민족자본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 아니었다.
★ 주권을 유린당하는 대한제국
1904년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본격적으로 조선을 독차지하기 위해 군사적 행동을 시작했던 해였다. 이 때에 열다섯살의 청소년으로서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도맡아 처리하던 김좌진은 자신이 심중에 숨기며 생각해왔던 일을 결행하리라고 마음먹고 동네 사람들을 자택에 불러모아 큰 잔치를 벌였다. 잔치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었다.
잔치가 끝나자 김좌진은 집안 하인들을 한 곳에 모으고 노비문서(奴婢文書)를 보여주며 세상이 바뀌었으니 이제 봉건적인 신분사회도 끝이 났다며 하인들이 보는 앞에서 문서를 불태웠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하인들은 깜짝 놀라며 술렁거렸다.
김좌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하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나라는 바야흐로 서구 열강의 발달된 여러 가지 새 문물을 받아들여 차츰 개화되어 가는 새 시대를 맞이하려고 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에는 양반(兩班)과 천민(賤民)의 신분 차이가 있을 수 없으며 개개인의 능력에 따라 대우받게 된다. 말하자면 누구나 재주가 뛰어나고 슬기로우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으며 그 힘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지금 매우 딱한 사정에 놓여 있다. 제국주의 열강은 우리 나라에서 온갖 이권을 챙기며 경제를 잠식하고 있는데, 특히 일본과 러시아 두 나라가 우리 나라를 집어삼키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모든 국민이 뜻과 힘을 합쳐 한덩어리가 되어 나라를 위한 일에 뛰어들어야 한다. 너희들이 우리 집에서 하인의 신분으로 묶여서 그 아까운 힘을 잠재우고 있으면 안 된다. 그래서 나는 깊이 생각한 나머지 너희들을 자유로운 몸으로 풀어주기로 결심하였다. 이 며칠 동안 내가 얼마간의 재물을 너희에게 골고루 나누어줄 터이니 각자가 자유롭게 살고 싶은 곳으로 가서 사람 노릇을 하거라!”
김좌진은 하인들이 따로 정착해서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자금을 나누어주고 논과 밭을 헐값에 소작인들에게 분배하기도 하였다.
조선의 전통적인 양반 사대부 가문 자제인 김좌진이 그 어린 나이에 봉건적인 사회제도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개화사상(開化思想)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물론 시시각각 변하는 국내외 정세를 이해하고 근대화에 앞장서는 선각적인 사고방식을 갖추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에게 개화사상을 전수한 김석범의 영향이 매우 컸다.
그 무렵 일본은 조선을 완전히 자국의 영향력 안에 가두기 위해 러시아의 세력을 몰아내려고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2월 8일에 일본 해군이 여순항에 정박중이던 러시아 군함을 불시에 공격하고 다음날은 인천 외양에 떠 있던 러시아 군함 2척을 격침시킨 뒤 인천을 상륙해 서울로 진격했다. 일본은 10일에야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대한제국 정부가 중립을 선언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군대를 남양, 군산, 원산 등지에 주둔시켰다.
러시아는 1903년부터 여순에 군대를 상주시키고 극동총독부를 설치해 만주와 조선으로 진출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러시아군이 언제 압록강을 넘어올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이에 일본이 치밀한 계획 아래 영국과 미국의 동의를 얻어 선제공격에 나선 것이다. 세 나라는 러시아를 분할하려는 음모 아래 러시아의 동방 진출을 막고자 했다. 러일전쟁[露日戰爭] 전선은 동해와 황해, 그리고 여순 등 만주 땅에 형성되었다. 예전 청일전쟁 때 일본은 러시아의 간섭으로 요동반도를 차지하지 못한 원한이 쌓여 있었다.
개전(開戰) 초기 러시아 해군은 원산과 쓰시마에서 일본 군함 3척을 격침시키기도 했으나 황해와 발해만에서 패전(敗戰)을 거듭했다. 특히 일본은 군용전선을 확보해 신속하게 작전을 지시했으나 러시아는 그렇지 못해 황해와 동해에 있는 군함들과 연락이 끊겨 버렸다.
일제(日帝)는 2월 23일 대한제국 정부를 강압해 이른바 일한의정서(日韓議定書)를 체결했다. 그 내용을 보면, 일본은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의 보존을 보증하며 황실의 안녕과 영토의 보존에 위험이 있을 때에는 필요한 조치를 하고, 반면에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에 편의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군사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얻어 쓸 수 있다는 구절도 들어 있었다. 일제는 전쟁을 수행하면서 공수동맹(攻守同盟)을 맺어 조선의 보호권을 확보하고 식민지 방식의 지배를 강화해나갔다.
일제는 8월 22일에 다시 대한제국 정부를 강요하여 두번째 일한의정서를 체결하였다. 그 내용은 고문을 두고 일체의 정책을 그에게 물어 시행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제의 추천으로 외교고문을 비롯해 재정, 경찰, 궁내부, 군부고문을 두었다. 더욱이 외교고문으로 일본 외무성 고문인 미국인 스티븐스를, 나머지는 일본인을 임명하도록 했다. 이들은 각자 맡은 부분을 지휘, 감독, 집행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제 고문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일제는 용산 등 군용기지를 확보한 뒤 경의선을 군용철도로 지정해 부설하고 중국이 가설했던 선로와 전선을 접수해 관리했다. 또 집회, 결사의 자유를 금지한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일본군은 러시아군과의 전투에서 연달아 승리했다. 1905년 1월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여순(旅順)을 점령한 다음 봉천(奉天)까지 치고 올라갔다. 러시아는 전세를 만회하고자 발틱 함대를 파견했으나 5월 27일 쓰시마해전[對馬海戰]에서 일본 해군에게 참패를 당함으로써 패색(敗色)이 더욱 짙어졌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자 일본은 군수물자가 바닥나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여력을 상실하여 종전을 서둘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러시아도 국내에서 제정(帝政)을 반대하는 혁명이 세차게 일어나고 있어서 오랫동안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두 당사국은 전쟁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1905년 7월 29일 미국 육군장관 데프트는 일본으로 와서 내각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비밀회담을 가졌다. 데프트는 일본의 조선 점령을 인정해 주는 대가로 미국의 필리핀 식민지 경영을 인정받았다. 이어 일본은 영국과 영일동맹(英日同盟)을 갱신해 조선에 대한 여러 가지 권리를 인정받는 대가로 인도 식민지 지배를 지지했다. 이같은 흥정을 벌이고 난 일본은 이 해 9월 러시아와 강화조약(講和條約)을 맺었는데, 러시아는 앞으로 조선의 일에는 일절 간섭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수십년 동안 집요한 공작을 펼친 끝에 마침내 조선에 대한 독립적 지배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일제는 지배정책을 원활하게 진행시키고 조선 민중의 반발을 억누르기 위해 친일 주구배를 내세워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통역관 출신인 송병준(宋秉畯)을 조종해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도록 했다. 또 1904년 갑오농민항쟁에 참가했던 손병희(孫秉熙)와 이용구(李容九)가 조직해 활동하고 있던 진보회(進步會)를 친일단체로 만들려는 음모를 꾸몄다. 두 단체는 일본의 낭인들과 조선 주둔 군부의 지원 아래 일진회(一進會)로 통합되었다. 일본 군부는 경부선(京釜線) 철도와 전신선을 보호하고 경의선(京義線) 철도 부설에 노역을 동원하는 임무를 일진회에 맡겼다. 일진회는 일제의 정책에 영합해 “동양의 평화”니 “국민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니 “생활의 개선”이니 하며 떠벌렸으며 러일전쟁을 두고는 “조선의 독립을 확고하게 보장한다”느니 하며 한일제휴(韓日提携)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일본 황제의 특사로 서울에 왔다. 그는 무쓰히토[睦仁] 황제의 칙서를 들고 왔는데 거기엔 동양의 평화라느니 조선의 안전이라느니 하는 말이 들어 있었다. 또 두 나라는 친선과 협조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조선은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일본은 황실의 존엄과 안녕을 확실하게 보장한다는 말도 있었다. 고종은 이 글을 읽고 치를 떨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토는 며칠 뒤 일한협상조약(日韓協商條約)을 내걸었다. 그 내용은 한마디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일본에서 이를 대신하며 외교사항을 관리하기 위해 일본인 통감(統監)을 둔다는 것이었다. 고종은 이토의 강압을 뿌리치고 서명을 거부했다. 당시 러시아 주재 한국공사로 있던 이범진(李範晉)은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 직후에 고종의 친서를 러시아의 외무장관에게 전달했다.
‘하야시 공사, 하세가와 장군, 이토 후작이 일본 군인과 헌병들을 거느리고 야밤에 궁전을 침입해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조약에 서명하라고 강요했습니다. 나와 대신들은 그들의 위협에 저항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옥새가 있는 방과 외부대신의 인장이 보관된 곳을 강제로 점령한 뒤 미리 준비된 서류에 날인을 하고 거기에 서명하도록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강력히 거부했습니다.’
이 문서대로라면 고종은 조약문에 서명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신속하게 조선의 외국 공관에 강요로 조약을 맺은 사실을 알려 그들의 국가 원수들에게 외교권 회복을 요청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고종은 이같은 요청을 다섯 차례나 보냈다.
11월 17일 중명전(重明殿)에 내각회의가 소집되어 대신들이 모일 때 중무장한 일본 군인들이 완전 포위하고 있었다. 이토는 대신 한 사람마다 가부를 물었다. 의정부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은 강력하게 반대 의사를 내세웠고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도 반대했지만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은 적극 찬성했고,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이 동조했다. 이렇게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박탈당했고 통감정치가 시작되었다. 오백년 왕국이 일본과 전쟁 한번 치르지 못하고 반식민지(半植民地)로 전락한 것이다. 서울에 주재하던 미국, 영국 등 열강의 공사관과 외교관들은 서울에서 철수해 일본 주재 공관으로 가거나 본국으로 돌아갔다. 다만 조선에서는 영사업무만 수행했다.
일제(日帝)는 1906년 2월 1일부터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를 설치하고 통감정치를 시작했는데 초대 통감은 이토였다. 통감은 총독보다 한급 낮은 직위인데도 내각총리를 지낸 인물을 통감으로 임명한 것이다. 이토는 대한제국 내각을 괴뢰정부로 만들었다. 또 정부를 지도한다느니 유신을 도모한다느니 하는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동원하여 식민지로 만들어 나갔다. 통감부와 내각은 서로 정책을 협의한다고 시정개선협의회를 만들어 토의하는 척했으나 대한제국의 대신들에게 거의 발언권을 주지 않았으며 의견을 내더라도 거의 무시했다.
통감부는 반일적 기세를 억누르고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종전의 영사경찰관 217명을 통감부에 소속시키고 일본인 경찰관도 1800여명으로 늘렸으며 헌병대를 강화한 다음 반일 세력을 효과적으로 억압하기 위해 군사경찰 기능과 고등경찰 기능을 부여했다. 따라서 헌병들은 한국인들의 집회·결사 행위를 막고 무기·탄약·폭발물을 단속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일제는 내각도 제멋대로 개편했다. 참정대신 한규설에게 구실을 붙여 체포한 뒤 박제순 내각을 성립시켰다가 다시 이완용 내각을 출범시켜 완전한 괴뢰내각을 구성했다. 내각의 대신들은 고종의 명령을 듣지 않고 오히려 그를 억압했다. 고종은 경운궁에 유폐되어 옴짝달싹 못했다. 그런데도 통감부에서는 1906년 7월에 궁금령(宮禁令)을 내렸다. 왕궁 출입이 무질서하다는 이유를 붙여 통감부 관리나 괴뢰내각의 대신들 말고는 고종을 만나지 못하게 한 것이다. 고종은 완전 연금 상태였다.
통감부는 대한제국을 완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단계적으로 침략 정책을 수행해 나갔다. 하지만 러일전쟁 이후 민족적 모순이 심화되자 다시 반일적 기세가 심해져 지축을 흔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