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초희는 열쇠 꾸러미를 다락방 자물쇠에 모두 넣어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딸깍’
결국, 다락문은 열렸지만 초희는 다시 잠시 망설였다.
“…”
한참을 비밀의 문 앞에 서 있던 초희는 마침내 결심을 한 듯, 10여년 동안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세월의 무게를 알게 하는 듯 삐걱거리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먼지가 부서져 날렸다.
삼각형으로 뾰족하게 솟은 천장의 뼈대가 보이고, 여기 저기 거미줄이 얽혀 있었다. 마구 널려있는 박스들... 낡은 박스들은 대부분 모두 닫혀 있었다. 초희는 한참을 멍하니 한 자리에 서서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열려져 있는 박스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박스에는 낮이 익은 사람의 흔적이 배어져 있었다.
‘평생... 찾지 않던 이곳을... 돌아가시기 전에 왜...‘
초희는 흩어진 박스를 열어보았다. 그리고 그 안의 물건들 사이에 눈물자국이 베인 액자를 발견했다. 낡은 액자의 주인공은 처음 보는 젊은 남자였다. 초희는 한참을 멍하니 사진 속의 인물을 바라보았다.
“이… 이 사람은…”
어렴풋이 한번 스친 기억...
묘지.
새벽의 새하얗고 투명한 안개가 낮게 가라앉아 묘지를 온통 가득하게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하얗게 깔린 두터운 안개 사이로 차갑고 매서운 겨울 바람이 날카롭게 일고 있었다. 그 바람은 안개의 회오리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안개에 섞여 내리는 차디찬 새벽의 세우가 서서히 그 남자의 코트에 스며들고 있었다.
지금 초희는 엄마와 단 둘이 차의 보조석에 앉아서 엄마와 같은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 안은 심히 고요했다. 단지, 자동차의 미세한 엔진 소리와 와이퍼의 고무 마찰 소리만이 무심하게 전해질 뿐 이었다. 차창 밖의 그 남자는 알 수 없는 한 사람의 묘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듯 보였다. 먼 발치에서 그 남자를 바라보는 초희는 오늘 자신을 데려 온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왜… 저렇게 빠져들 듯 깊은 눈을 하며, 저 남자를 바라 보고 있는 것일까?’
다락.
초희는 표지에 제목이 없는 낡은 공책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낮이 익은 공책이었다. 초희는 조심스럽게 첫 장을 넘겼다. 일기는 1981년의 어는 봄날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1981년 4월 18일
오늘 나에게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딸이다. 그이를 닮은…
하지만 그이는 모른다…
자신의 아이가 태어났는지도…
나에게도 이제 비로소 가족이 생긴지도…
이 아이가 자라… 언젠가 자신을 찾아간다면…
그이는 이 아이를 알아볼 수 있을까…
아니… 이 아이만은 자신의 가족으로 인정해 줄까…
이 아이만은…’
초희는 그 자리에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엄마의 일기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새… 산장에 붉게 아침햇살이 고대를 들고 있었다.
“엄마가… 배우였다니...”
시간이 흐르고 있다. 해가 떴다가 다시 지고 있다. 초희는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지는 줄도 모르고 종일 엄마의 일기를 읽고 있었다. 산장 주변은 모두 무척 평화로워 보였다. 밖에는 다시 눈이 아주 조금 가늘게 내리고 있었다. 다락방의 황색의 낡은 백열등만이 숲을 밝히고 있었다. 마치 산장의 등대처럼… 하얀 눈들을 황금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엄마…”
초희는 지금 급속히… 자기 자신의 깨닫지 못했던 과거에 더욱 가까워 지고 있었다.
#06
며칠 후.
초희는 별장을 떠나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학교 도서관.
초희는 그 동안 엄마가 묻어두려 했던 그녀의 과거를 쫓기 시작했다. 자신에게도 아직 한 하늘 아래 남아 있는 가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그런 희망을 품고 지금 초희는 인터넷에서 신문 자료를 검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일은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역시, 어느 곳에도 ‘여배우 이영희’에 관한 기사는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시간이 흐를수록 처음과 달리 초조해져 가던 초희는 문득 하나의 흥미 있는 기사를 발견했다. 그녀는 1980년 10월 당시 재판 중이던 신인 여배우를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여배우의 행적을 쫓던 중… 1981년 5월 18일자 신문을 보고 초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총망 받던 신인 여배우 ‘이신영’ 자살?!”
초희는 놀라움과 호기심으로 신문 속 배우의 사진을 확대해 보았다.
“이… 이건…“
초희는 지금 점점 더 흥분되고 있었다.
“틀림없어… 이 신문 속의 신인배우는 엄마가 틀림 없는데…?”
지금 초희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엄마의 일기에도 없었던… 새로운 사실에 그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신영... 엄마 이름은 이영희... 인데…”
그녀는 곰곰이 여러 가지 가정을 해 보았다.
‘하지만, 당신 재판 중이던 여배우는 이신영 뿐이야. 이영희라는 배우는 어디에도 없어... 엄마가 가명을 섰을까? 하긴, 그런 일은 흔한 일이니까... 그렇다면 엄마는 벌써 20년 전에 죽었다는 건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아냐! 단지, 일기장에 기록된 대로… 그 기간에 엄마가 재판 중이었다는 것만 가지고는... 어쩌면… 엄마가… 신문에 날 정도가 아닌 그리 유명한 배우가 아닐… 수도... 있잖아…’
초희는 그렇게 하루종일 자료를 뒤적거리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신이 빠져있었다.
‘역시… 신인 배우라… 찍은 영화도 한편 밖에 없고… 배우로서의 이신영의 자료는 더 이상의 찾을 길이 없어…’
결국, 초희는 ‘이신영’ 이라는 배우가 묻힌 장소를 프린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락방.
어느새 밤이 되었다. 초희는 밤이 맞도록 다락방에서 무언가를 단서가 될 지 모를 엄마의 기록들을 찾고, 읽기를 반복했다. 때론 웃다가... 때론 울다가... 그렇게 초희는 그 동안 미처 깨닫지 못했던 엄마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것을 깊이 깨달아 가고 있었다. 그녀는 엄마가 떠난 뒤에야 엄마를 더 깊이 이해해 가고 있었다.
‘난… 정말 바보야… 미안해… 엄마…’
다음날.
초희는 한 사람의 묘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신영’ 이라고 쓰여 있는 묘 앞에 서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이신영… 이영희… 당신의 사연은 도대체…’
초희는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 계속 초조해 보였다. 그렇게 안정을 못하고 부산하게 묘 주변을 서성거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사이 이미 해가 지면을 넘어가고 있었다.
‘난,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거지…?’
결국, 초희가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돌아서 가려 할 때, 어렴풋한… 기억 속의 어느날처럼 세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 이건…”
초희는 다시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했다. 세우를 맞으며… 초희는 누군지 모르는 누군가를 다시 기다리고 있었다. 세우가 초희의 코트를 모두 적실 때 까지 그녀는 그렇게 서 있었다. 초희는 주변을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어디서 본 듯한 장소지만… 기억이 나질 않는 듯…
‘도대체… 여긴… 기억 속에 잠재되어 있는… 낯설지 않은 곳인데… 난 왜 이 비를 보자… 다시 마음을 바꾼 걸까…? 도대체 무엇에 이끌려서…’
이제는 완전히 해가 지고 말았다. 결국, 초희는 발걸음을 돌리고 있었다. 그렇게 묘에서 멀어지던 초희는 무슨 생각에선지 무의식적으로 잠시 멈춰 서서는 멀리에서 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또 다시… 시간이 한참 흘렀다.
“역시… 여긴… 여긴, 차가 있던 자리… 이곳에서 보니 확실해 졌어…”
그때 초희는 무엇인가를 목격했다. 그 언젠가… 과거와 같이 그 남자가 그 자리에 세우를 맞으며 서 있었다. 초희는 순간 놀란다. 다시 정신을 차리는 순간… 그 남자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잠시 꿈 같은 환상을 본 것일까…?
‘여기는 바로… 바로 12년 전 바로 저 묘에서 슬프게 흐느끼고 있던 남자를 본 그곳이야. 도대체... 그 남자와 엄마… 무슨 관계였을까? 이신영은 도대체 뭘까…?’
다락방.
초희는 며칠째 계속 다락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이 잡듯이 다락을 다 뒤지고 있었다. 뭔가 새로운 해답을 찾기 위해서… 그러다 초희는 다락방을 자물쇠가 채워진 새로운 나무상자를 발견했다. 급히 열쇠꾸러미에서 열쇠를 찾지만 열쇠는 없었다.
‘도대체 뭘까...? 죽어서까지 내게 알리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던 걸까?’
이제 초희는 더 이상 열쇠를 찾지 않고, 망치를 가지고 와서 박스를 부수어 버렸다. 그리고 그 부서진 박스 안에는 엄마의 일기로 보이는 또 다른 공책이 있었다. 그 새로운 박스 안에는 너무나 행복해 하고 있는 어머니와 한 남자가 있었다. 초희는 일기의 첫 장을 넘겼다. 일기는 1978년의 어느날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1978년이면… 나를 낳기 이전 이쟎아… 왜 이건… 죽어서도 숨기려 했을까…?’
‘1978년 01월 18일
오늘 그이를 처음 만났다.
그이는… 그러니까…
외로운 사람이다. 나처럼…
첫눈에 날 알아본 사람이다.
내가 영화배우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외로운 여자라는 것을…
가슴이 설렌다…
지금… 그이한테… 전화가 왔다.
오늘의 애기는 다름으로 미뤄야 겠군…
나의 마음아… 다음에 보자…’
다락방.
초희는 지금 단번에 그날 이후의 모든 엄마와 아빠의 행적을 회상하고 있었다. 일기를 보며 엄마와 아빠를 상상해 내고 있었다. 엄마가 그토록 숨기려 했던 또 다른 과거를 모두 알게 되어버렸다.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의 엄마를… 그리고 엄마의 사랑과 배신, 슬픔… 그리고 아빠에 관해서도...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