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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克日의 상징’ 白冶 金佐鎭 장군 4.靑山里戰鬪 ⑵

조의선인 |2009.07.08 20:05
조회 156 |추천 0

 

★ 어랑촌접전(漁郞村接戰)

 

백운평교전(白雲坪交戰)에서 승리한 김좌진(金佐鎭) 장군 휘하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는 한밤중에 64킬로미터를 강행군하여 갑산촌(甲山村)에 당도했다. 그런데 때마침 인근 주민으로부터 일본군 1개 기병중대 병력이 천수평 마을에 들어가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김좌진 장군은 천수평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기병들에 대해 선제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독립군 병사들을 독려, 다시 전투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이범석 대장의 연성대가 선봉에 서서 천수평의 적군을 공격하되, 먼저 김훈 중대가 북쪽 산을 타고 나가 신속하게 적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이민화 중대는 천수평 남방고지를 점령하라.”

 

김좌진 장군의 지시에 따라 북로군정서 연성대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10월 22일 새벽 4시 30분경에 북로군정서 병사들이 천수평 외곽에 도착하였는데, 시마다[島田] 중위(中尉)가 거느린 일본군 기병 120여명은 독립군이 아직도 1백리 밖의 청산리 부근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토성 안에 군마(軍馬)를 매어놓고 민가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이범석이 2개 중대 병력을 이끌고 냇물을 거슬러 올라가 동쪽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 기병순찰대 보초가 독립군을 발견하고 사격을 시작했다. 이에 북로군정서 연성대도 일본군 기병중대가 자고 있는 촌락과 토성 안으로 집중사격을 가하면서 돌격전(突擊戰)을 감행하였다. 총성(銃聲)을 듣고 놀란 일본군은 허둥대며 전열을 정비하고자 했으나 북로군정서의 포위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4명이 군마를 타고 도주한 이외에 1개 중대 전원이 몰살당하였다. 이들은 27연대 소속 기병중대였다.

 

“사령관님, 이걸 보십시오.”

 

북로군정서의 중대장인 김훈이 전사한 시마다 중위의 시체를 뒤지다가 그의 군복 주머니 안에서 문서 하나를 발견하여 김좌진 장군에게 내밀었다.

 

“이것은 적군의 작전 지시를 기록한 문서요. 아즈마[東正彦] 소장(少將)이 직접 지휘하는 기병과 보병이 함께 편성된 5천여명의 전투부대가 어랑촌(漁郞村)으로 가고 있다는 정보가 적혀 있소.”

 

김좌진 장군의 말을 듣고 참모장 나중소(羅仲昭)가 다급하게 답한다.

 

“어랑촌에는 마록구(馬鹿溝)라는 고지가 있는데, 그 곳을 먼저 적군에게 빼앗기면 우리는 완전히 포위당하게 됩니다. 한시라도 지체하지 말고 어서 마록구를 점거해야 합니다.”

 

김좌진도 나중소의 의견과 동일한 생각을 갖고 있었으므로 재빨리 부대를 재편성하여 어랑촌을 향해 치달렸다. 북로군정서는 이범석 휘하의 연성대와 최인걸(崔仁杰)을 중심으로 한 기관총대를 앞세워 마록구의 남쪽 8백여개의 고지를 선점하고 다시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이제 곧 적의 대군이 이 곳으로 올라올 것이다. 우리는 비록 적군에 비해 병력과 장비가 열세에 놓여 있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 동포들을 마구 해치고 농토와 재산을 강탈했던 저 왜적(倭敵)들에게 꼭 원한을 갚자!”

 

김좌진 장군은 서둘러 전투 위치로 움직이는 병사들에게 엄숙하고도 결연한 목소리로 훈령하였다.

 

이윽고 일본군이 가납(加納) 연대(聯隊)을 선두로 하여 대포(大砲)를 쏘면서 고지를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김좌진 장군은 군도(軍刀)를 빼어 높이 쳐들고 독전(督戰)을 시작하였다.

 

“지금이다, 총공격하라!”

 

박격포(迫擊砲)가 먼저 포탄을 날리고 독립군의 기관총(機關銃)이 무수한 총탄을 퍼부었다. 산허리로 기어오르던 일본군은 독립군의 정확한 사격에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고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러나 악착 같은 일본군은 동료 군인들의 시체를 넘어 계속 밀고 들어왔다.

 

우레와 같은 포성(砲聲)과 더불어 일본군 진지에서 포탄이 날아와 고지 위의 독립군에게 떨어졌다. 전투를 지휘하던 김좌진 장군 근처에 포탄이 떨어지며 산을 쪼개는 폭음과 함께 파편이 사방으로 튀면서 엎드린 그의 군모(軍帽)를 날려 버렸다.

 

“앗, 사령관님!”

 

부하들이 놀라 뛰어왔지만 김좌진은 엎드렸던 자리에서 흙먼지를 툭툭 털면서 일어났다.

 

“나는 괜찮다. 내 염려는 말고 어서 적군을 사살하는 데에만 집중하라.”

 

한편 연성대장 이범석은 오른손에 권총(拳銃)을 쥐고 왼손에 군도(軍刀)를 든 채 전투를 수행했는데, 적군의 총탄이 군도를 강타하여 칼날이 부러지는 아찔한 순간을 겪기도 하였다.

 

아군 진영의 맨 앞에서 기관총(機關銃)을 잡고 일본군을 향해 연발사격(連發射擊)하던 최인걸은 배 부분에 적군의 총탄을 맞고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그는 더 이상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몸에 기관총을 묶은 뒤 있는 힘을 다해 일어났다. 그리고 고지 아래로 내려가며 적병들에게 기관총을 난사하다가 끝내 일본군의 집중사격을 받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미친 듯이 절규하는 최인걸의 고함 소리가 마록구 고지에 울려 퍼졌다. 그 모습을 본 독립군 병사들은 가슴 속에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느끼며 죽음을 무릅쓰고 맹렬한 항전을 전개하였다. 제대로 쉬지 못하고 배를 주리며 먼 길을 강행군한 독립군 병사들의 체력은 크게 소진되었지만 그들의 저항이 의외로 강력해 일본군은 사상자가 점점 늘어나면서 더 이상 전진해 오지 못하였다.

 

그러자 일본군은 병력을 나누어 천수평 서북방의 고지를 따라 아군의 우측을 위협하려 하고, 혹은 어랑촌 후방 산상으로 올라가서 아군을 견제하려 하면서 우회공격을 시도하였다. 양면에서 적군의 공격을 받게 된 북로군정서는 전멸될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 때 일본군의 배후에서 느닷없이 함성과 함께 콩 볶듯 하는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사령관님, 지원군이 오고 있습니다.”

 

나중소가 김좌진 장군의 어깨를 두드리며 뛸 듯이 기뻐했다.

 

홍범도(洪範圖) 장군이 영솔하는 독립군 연합여단(獨立軍聯合旅團)이 나타나 북로군정서를 포위하여 압박하려는 일본군을 기습한 것이었다. 홍범도 장군의 부대는 김좌진 장군의 부대가 있는 바로 옆 최고 고지를 점거하여 일본군의 돌격전을 저지하였다. 이후 독립군은 일본군과 병력 수에서 대등해진 상황에서 전투를 수행하였다. 독립군은 압도적으로 유리한 지형을 활용하여 일본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게 되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자군(自軍)의 출혈(出血)이 너무 심하다고 여긴 아즈마 소장은 분을 삭이며 퇴각명령을 내렸다.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주력 부대도 야음을 틈타 서북쪽으로 철수하였으며, 홍범도 장군의 부대도 북로군정서의 일부 병력과 합세하여 안도현 방면으로 철수하였다.

 

박은식(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 따르면 간도 일본총영사관 비밀보고서를 인용하여 어랑촌접전(漁郞村接戰)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1천 6백여명을 살상하는 전과(戰果)를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시정부 군무부는 어랑촌접전에서 전사한 일본군이 3백여명이라고 발표했으며, 이범석의 저서「우등불」은 연대장인 카노우[加納信暉] 대좌(大佐)를 비롯하여 1천여명의 일본군을 사살한 것으로 추산하고 독립군도 1백여명이 전사한 것으로 회상하였다. 일본군의 작전 보고서는 패전(敗戰) 사실을 숨긴 채 단지 전사자 3명, 부상자 11명이라는 허위(虛僞) 기록을 남기고 있다.

 

어랑촌접전에서 대승을 거둔 북로군정서는 23일 아침에 소부대로 재편성되어 안도현의 황구령(黃口嶺)으로 이동하였다. 이동 중 오후 3시경에 맹개골 산림 속에서 일본군 기병 30명이 이 골짜기로 진입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김좌진 장군은 북로군정서 병사들에게 지시하여 곧 산림 속에 몸을 숨기게 하고 접근해오는 일본군을 향해 총격을 개시하도록 하였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10여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패주하였다. 이리하여 북로군정서 병사들은 군마 5필, 군용지도 4장, 시계 5개, 기타 피복장구 등을 노획하였다. 또한 맹개골로부터 약 20리 떨어진 만기구(萬麒溝)의 후방 산림 속에서 휴식을 취하던 북로군정서 병사들은 전방 약 100미터 지점에서 일본군 보병 50명이 행군해 오는 것을 발견하고 총격을 가하여 3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월 24일 아침에는 북로군정서 소속 병사 50여명이 쉬구로 이동하던 가운데 일본군 1백여명과 조우(遭遇)하여 교전이 벌어졌는데, 일본군은 30여명이 전사하고 20여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다. 그날 저녁 8시경에는 홍범도 장군의 부대가 북로군정서 일부 병력과 함께 천보산(天寶山)의 서남쪽 부근에서 은(銀)·동광(銅鑛)을 지키고 있던 1개 중대 규모의 일본군을 두 차례에 걸쳐 공격하였다. 25일 새벽에는 식량조달을 위해 천보산 부근에 나갔던 독립군이 현지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습격하여 치명타를 가했다. 천보산의 일본군은 크게 당황하여 국자가(局子街)에 있는 우군(友軍) 보병 1개 중대와 1개 기관총 소대 병력의 증원을 요청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 때에 반야(飯野) 소좌(少佐)가 거느린 150명의 일본군은 독립군을 찾아 산림 속에서 수색작전(搜索作戰)을 전개하다가 25일 밤 10시경에 고동하(古洞河) 골짜기에서 홍범도 장군의 부대를 발견하고 12시 정각에 기습적인 돌격전(突擊戰)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홍범도 장군 휘하의 독립군 병사 4백여명은 용맹하게 반격을 가해 약 45분간 격전을 벌인 끝에 1백여명의 일본군을 살상하였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아즈마[東正彦] 소장(少將)의 직접 지휘를 받던 장교인 반야 소좌는 일본군이 처음 출정했을 때는 1개 대대 병력을 지휘하는 대대장이었는데, 그가 고작 150명 정도의 부대원만을 거느리고 고동하곡교전(古洞河谷交戰)에 참가하고 있었다는 것은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 일본군의 인명피해가 상당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한편, 간도 지역 여러 곳에 분포하고 있던 독립군 부대들도 각기 자신들의 활동지역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우선 백두산 산록을 향해 근거지 이동을 시작한 본대의 뒷수습을 위해 훈춘에 남아있던 독립군 병사들은 기림(木村) 지대(支隊) 제1토벌대인 상판(上坂) 대대(大隊)와 11월 4일 훈춘의 삼도구에서 일전을 벌였고, 나자구(羅在溝)에 근거지를 둔 의군부(義軍府) 산하 최정국(崔正國) 부대는 기림 지대의 제2토벌대인 아부(阿部) 대대와 맞서 싸웠다.

 

이 밖에 11월 9일에는 김운서(金雲瑞)가 거느리는 30여명의 모험대(冒險隊)가 훈춘 북방의 산림지대인 우두산(牛頭山) 남쪽 기슭에서 일본군 보병 2개 중대와 교전하였다. 이들은 재빨리 훈춘 동북방에 있는 낙타하자(駱駝河子) 부근으로 이동하여 다시 11월 20일 일본군 1개 소대 병력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일련의 전투과정에서 모험대장 김운서는 11월 30일에 훈춘현 판석구(板石溝)에서 일본군 보병 75연대와 교전 중에 전사하였으며, 그의 동생 김운하(金雲河) 역시 독립군의 통신사무원으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11월 8일 훈춘 차대인구(車大人溝) 북방 골짜기에서 같은 부대의 일본군에게 붙잡혀 참수(斬首)되는 비운을 겪었다.

 

뿐만 아니라 훈춘 지역의 독립군은 대황국·노흑산·왕팔발자(王八撥子) 등으로 진격해오는 기림 지대에 대해 유격전(遊擊戰)을 전개하였다. 특히 왕청현 십리평의 독립군 본부와 사관연성소를 지키고 본대 이동 후의 뒷수습을 위해 잔류해 있던 북로군정서의 일부 병사들은 왕청현 지역에서 기림 지대의 횡전(橫田) 대대를 맞아 밀림에서 일본군의 작전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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