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純粹) : (명사) ① 잡된 것이나 이질적인 것이 섞이지 않은 상태. ②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는 것.
'순수'라고 하면 당장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보통은 티없이 깨끗했던 어린 시절의 이미지를 떠올리는데 나는 이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어린시절은 티없이 깨끗하지 아니했다. 게다가 뭘 몰라서 그러는 것과 정말로 티없이 깨끗한 것은 다르다고 본다. 내가 생각하는 순수는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세상에 적당히 찌든 이의 마음이 어떤 계기로 몹시도 깨끗한 상태로 변하는 것이다.
회사에서 태백산으로 야유회를 간 날은 1995년 가을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먼저 근무를 마친 순서대로 준비된 차량에 올랐다. 강릉에서 태백으로 가는 길에 비가 내렸다. 밤이었다. 도착한 후에는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고, 음악을 틀고 춤을 추며 난장판을 연출했다. 어느 야유회에서나 흔한 모습, 그리고 밤이 깊어 몇몇 이는 노름을 하고 나머지는 술에 못이겨 잠든다.
다음날 아침에는 태백산 등반이 있었다. 보슬비가 조금씩 흩뿌리다 말다 했는데 여의치 않고 예정대로 산행을 한단다. 당시 그 회사의 분위기가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 분위기였으므로 숙취를 핑계로 한 예외란 있을 수 없었다. 모두가 비닐 우의를 하나씩 받아들고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고약한 숙취에 분무기로 물을 뿌리는듯한 가을비를 헤치며 산을 오르는 기분은 상쾌함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산으로 몰때 몰더라도 해장이라도 좀 하게 해주면 안되나 싶어 욕지거리를 하며 산에 올랐다.
정상에 오를 즈음에 비가 그쳤다. 바람이 심한 정상에서 안개에 둘러싸인 산 아랫자락을 내려다보는 것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빗물을 머금은 바위는 반지르르했고 나무들은 단풍든 녀석은 단풍든대로, 그렇지 못한 녀석은 제 나름의 색대로 선명했다. 안개란 녀석은 그것들을 희미하게 감추었다가 백일하에 드러냈다가 하며 희롱해댔다.
산을 내려오는 길은 비가 그친 이후라 무척 미끄러웠다. 다리는 풀릴대로 풀려 있었고 청바지는 빗물에 젖어 빳빳한데다 길까지 미끄러우니 조금만 방심하면 넘어지기 십상이었다. 조심조심 긴장하며 땅만 바라보고 내려오는데 내 반경에 한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위태위태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와락 안아버릴만 했다. 그 아이는 Y였다. 며칠 전에 실업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실습을 나온 아이, 평범한 얼굴에 덧니가 있어 웃을때 귀여웠다. 저 나이때의 여자아이들은 소녀로서의 마지막 졸업장과도 같은 귀여움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어 저 나름대로 예쁜 법이다.
내가 왜 그랬을까. 나는 망설임 없이 다가가 아이의 손을 잡았다.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이 있다. 머리속으로 판단하고 행동했다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순간, 그래서 그때는 물론이거니와 한참을 지나고 나서도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어떤 순간 말이다.
아이는 놀란듯 내 얼굴을 보더니 이내 웃을듯 말듯한 표정을 짓곤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마치 넘어지지만 않는다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다는듯 조심조심 걷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 역시 손을 놓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얼마간이 지나자 아이는 내 손에 의지해 걸었다. 내가 아이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내리막길인데도 가슴이 몹시 뛰었다. 내려가며 만나는 동료들이 우리를 보고 한 마디씩 농을 쳤는데 우리가 손도 놓지 않고-나는 이때 아이 역시 내 손을 놓을 생각이라곤 추호도 없었음을 자신한다- 말없이 걷고 있으니 입을 닫았다. 이때의 내 심정은 놀라울 만큼 단순했는데 나는 오로지 아이가 미끄러지지 않고 산을 내려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었다. 단순했고 단순했고 또 단순했다. 아이의 심정이 어땠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고 다만 비가 오고 쌀쌀한 날씨에 오래 걸어서인지 볼이 발간 채로 땅만 바라보며 걸을 뿐이었다.
이미 좁고 험한 길을 지나 넓고 야트막할 뿐만 아니라 미끄럽지도 않은 길로 들어선지가 꽤 오래됐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등산로 초입에 다다라서였다. 그래도 우리는 손을 놓지 않았다. 이때의 나는 아이가 그만 손을 놓으려고 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조바심 뿐이었다. 어쩐지 그 손을 놓아버리면 나는 뭔지 모르지만 영 글러버릴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 고민이 하도 심하여 이렇게 고민하느니 차라리 몸이 아픈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등산로 초입을 지나 산장이 보일 즈음 아이는 슬몃 멈추더니 내 얼굴을 바라보곤 쿡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손에 조금씩, 아주 조금씩,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힘을 주어 내 손아귀에서 손을 빼내는 것이었다. 아, 그때의 그 기분을 누군가에게 고스란히 설명할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은 아름다운 배려였다. 손을 그냥 빼버리면 민망할 내 여린 가슴을 염려하여 겨우 알아차릴 만큼 조금씩 손을 빼낸 그 마음을 제대로 표현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마음은 아이에 대한 감사와 또 그것과는 조금 성질이 다른 감정이 흘러넘쳐 기쁨으로 충만했다. 아이가 얼마나 친숙한 느낌이었는지 그만 우리가 부부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순간 나는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였고, 그 사랑은 순수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이야기하려던 순수는 그런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날씨와 장소와 사람과 감정, 그리고 또 그밖에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한날 한시에 공모라도 하듯 낯선 세계를 만들어낼 때 느끼는 축복같은 감정이란, 그 세계의 밖으로 끌고나오면 이내 시들어 죽어버리는가보다. 우리는 마법에 걸린듯 얼굴이 벌개져서 산장으로 돌아왔고, 아직도 서로의 손에 느껴지는 상대방의 감촉은 이제까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낯선 세계로의 여행을 보증하는 여권 같았다. 그러나 돌아온 산장에서 네 사람 앞에 한 마리씩 지급된 타조만한 닭백숙을 뜯고, 재미없는 족구경기를 구경하는 동안에 그 마법은 서서히 풀려버렸다. 어느덧 야유회가 끝나 강릉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랐고 이내 잠들어 버렸다.
그로부터 아무렇지 않은 시간이 흘러갔고, 몇 달 후에 내게는 애인이 생겼다. 국문과 2학년이라는 그녀에게서 나는 소녀같은 귀여움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랑에 빠져들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공모하지 않고 제각각 유리된 이런 세계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정상인 법이다. 어찌 보면 그 아이와 그녀를 비교하는 것 같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 두 사람은 서로 전혀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순수라는 것은 대개가 그렇게 왔다 가는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 상황에서 문득 <이웃의 토토로>를 떠올리게 되는건 왠지 모르겠다. 화장실이나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