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부
굽신굽신 쩔쩔매며 겨우겨우 허락 받고 나온 수정은 병원으로 달려간다.
수정이 병원에 도착했을 땐 막 수술이 끝나고 아직 마취에서 덜 깬
아버지가 병실에 누워 있었다. 새어머니는 앉아 있다 수정을 보고는
화색이 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정이 오는 날은 새어머니의 주머니속이
두둑해지기 때문이다.
-수술은 잘 됐어요?
-그럼, 수술하면 아무 문제 없다고 의사선생님이 그랬어...근데,
수술비는 어떻게 됐어?
새어머니의 말에 수정이 머뭇거리며 말을 못하자 새어머니의 눈이
치켜 올라간다.
-왜, 안됐어?
-그게...좀 모자라요, 그치만 구해볼게요.
-넌 매니전가 뭔가 한다면서....돈 다 벌어서 어쨌니?
저럴 땐 정말이지 새어머니고 뭐고 확 면상을 긁어 놓고 싶어진다.
그러나 수정은 꾹 참는다. 수정이 다가와 아버지를 내려다 본다.
새어머니가 입을 삐죽거리며 흘기더니 나간다. 수정의 눈에 눈물이
그렁해진다. 수정이 가만히 아버지 손을 잡는다. 손이 거칠다.
-아버지...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아셨죠? 제가 성공하면 꼭 호강하게
모실게요...그러니까, 제발 아프지 마시구 오래오래 제 곁에 계세요.
수정이 초등학교 때 새어머니가 딸을 하나 데리고 들어왔다. 어릴 적
부터 노골적으로 새어머니의 편애는 심했고, 수정은 그런 새어머니의
구박 속에서 꿋꿋하게 버티며 살아왔다. 현대판 콩쥐 팥쥐라고 생각
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콩쥐가 그저 착하기만 하느냐, 그건 아니다.
야무진 구석도 있고, 화가 날 때는 할 말도 하고 산다. 그게 바로
콩쥐와 황보수정이 다른 점이다.
문을 열고 배다른 언니인 혜지가 들어온다. 그녀는 언제나 돈이 없다면
서도 옷차림은 화려하다. 누가 보면 재벌집 딸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왔니?
얄밉게도 생겼다. 수정은 눈물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누가 보면 아주 효녀 났는 줄 알겠네, 너만 아버지 생각하냐?
사사건건 수정에게 시비다. 수정이 그런 혜지를 흘겨 본다.
-뭘 봐, 수술비는 어떻게 됐어?
-너나 잘해.
수정이 혜지의 어깨를 툭 치며 나가려자 혜지가 수정의 팔을 잡는다.
-야, 언니라고 안 불러 너?
-언니두 언니 같아야 부르지, 대접 받고 싶으면 언니답게 굴어.
수정이 팔을 확 뿌리치고 나가려자 수정의 머리채를 휘어 잡는 혜지.
-아얏, 이거 안 놔?
-이게 오냐오냐 하니까 기어오르려 하네, 언니라구 불러봐.
-내 머리채 다 뽑히는 한이 있어두 싫어, 안해.
수정이 혜진의 팔을 움켜 잡고 비틀자 혜지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온다.
-아얏...
수정이 그제서야 혜지의 손에서 풀려 난다. 머리가 죄다 헝클어져 볼만하다.
혜지의 팔을 잡고 비틀며 수정이 말한다.
-여긴 병원이야, 제발 장소 좀 가리면서 행동해. 담에 또 한 번 이런 식으로
나와봐, 그땐 어림도 없을 줄 알어.
수정이 팔을 놓아주자 혜지가 눈물을 글썽이며 수정을 쏘아본다.
수정이 한심하다는 듯 머리를 어루만지며 나간다. 정말....살기 싫다.
눈물을 글썽이며 혜지가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앞에 놓인 의자를
발로 걷어 찬다.
수정이 밖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 본다. 수술비를 어떻게 마련하지?
땅이 꺼져라 한숨만 나오고, 순간 끔찍하게도 싫은 윤미가 떠오른다.
-차라리 죽는 게 낫지...그건 절대 아냐.
수정이 고개를 저으며 걸어나간다. 현숙이 걱정스러웠는지 전화가 왔다.
힘없이 수정이 전화를 받는다.
-수술은 잘 되셨대?
-어...
-그 놈의 돈이 항상 문제다...어쩔거야?
-모르겠어, 나두...현숙아.
-나 돈 없다구 했다...그동안 니가 나한테 빌려간 돈만해두 얼마냐?
그러지 말구, 윤미한테 한 번 말해보지 그러냐?
-미쳤니?
-싫음 말구, 나중에 보자.
사실 현숙이한테 빌린 돈만 해도 제 두 달치 월급이다. 미안해서
도저히 빌려달란 소리는 안나온다. 수정은 기운 없이 터벅터벅
걸어간다. 그녀의 머리 위로 눈부신 볕이 쏟아진다.
-망할 놈의 날씨는 드럽게도 좋네.
*********
제주도에 도착한 강회장과 박전무는 대기해 있던 검은 세단 차에 오른다.
박전무가 앞좌석에서 고개를 돌려 강회장을 보며 묻는다.
-미리 전화를 넣을까요?
-그럴 거 없어, 내가 온다고 하면 달라질 게 뻔한데 뭐하러 그래?
강회장은 제주도에 있는 신라호텔의 운영이 어찌 되어 가는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윗 사람들 떴다 싶으면 그제서야 서둘러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할 것이 뻔했다.
-매출이 말야, 작년에 비해 터무니 없이 하락했단 말야. 그 원인이 뭐라고
생각해?
-관광사업이란 것도 경기를 타는 겁니다 회장님.
-당신 내 밑에서 일한지 얼마나 됐어? 한 이십년쯤 안됐나? 이런 답답한
양반을 봤나, 우리나라 경제가 아무리 바닥으로 떨어져도 먹고, 마시는
관광사업만큼은 떨어지지 않아. 썩어 빠진 정치인들 돈 없다 해도
지들 마시고, 놀고 할 돈은 있단 말이지. 다른 나라라고 별 수 있어?
달러 벌어 들인답시고 관광유치 사업만 늘여 놨다고 욕들 하지만, 그게
돈이 되거든....매출이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거지, 일 년새에 20%가 뭐야,
20%가?
강회장의 심기가 불편하다. 박전무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조금 돌린 채
강회장의 말을 듣고 있다. 사실 강회장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그걸
아는 박전무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새로 들어선 호텔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요즘 이유없이 매출이 하락증세를 보이는 건 사실이다.
-이것들이 사업하라고 맡겨 놨더니, 아주 말아 먹을려고 작정들 했어.
내 자식이나 남의 자식이나 믿을 놈 하나 없으니, 원...쯧쯧
-차라리 태희를 제주도 내려 보내시는게...
-그걸 어찌 믿누? 누울 자릴 보고 다리를 뻗으라 그랬어. 이제 겨우
정신 차릴까 하는 놈을 뭘 맡겨?
강회장의 말에 박전무는 입을 다문다.
-지 애비가 어떻게 모은 재산인데, 땀 한 방울 안흘리고 거저 먹으려 해.
요새 젊은 것들은 끈기가 없어, 그래서 안돼. 부모 잘 만나서 지들 배 안
곪고 사는 것만도 복이라 생각해야지.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회장님. 제가 그동안 태경이나 태희를 봐왔는데
요즘 애들 같지 않게 강단이 있습니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렇지, 태희
정도면 충분히 훌륭하지요, 기회만 된다면 얼마든지 해낼 겁니다.
-자네는 내 밑에 있더니 아부하는 것만 배웠나?
말은 그렇게 하지만 썩 기분 나쁘진 않다. 은근히 자식 칭찬을 하는
박전무가 싫을 수가 있을까. 그래도 이십년지기 친구처럼 지낸 사이가
아닌가. 뒷마당에 파 묻은 김치가 언제적 껀지도 알만한 사이다.
***********
짧은 청미니스커트를 입고 웨이브 머리를 날리며 호텔 식당으로
들어오는 윤미와 진우. 진우 표정이 내내 우울하다. 윤미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식당 안으로 들어오자 서 있던 태희가
그들을 안내한다. 윤미와 진우가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아 있다.
-오늘 특별 메뉴 있죠? 그걸루 갖다 줘요.
윤미의 말에 태희가 아니꼽게 쳐다보며 목례를 한다. 제일로 밥맛
없어 하는 여자다. 나이도 어려 뵈는 게 입만 고급이다. 태희가
가자 윤미가 다리를 꼬고 앉아 흔들며 진우를 쳐다 본다.
-나 지금 너랑 밥 먹을 기분 아니거든, 할 말 있음 빨리 해.
진우가 심각하게 앉아 윤미를 보며 말한다. 내가 미쳤지..저런 여우한테
홀려서 어쩌자구 우리 수정일 배신했을까...
-나 너랑 진지하게 사귀고 싶어.
윤미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한다. 진우는 윤미의 가증스러운 표정에
기가 막힌다.
-싫증 났다고 할 땐 언제고?
-생각해보니까, 좀 아깝더라....너, 수정이하고 너무 안어울려.
-장나하냐 지금?
-아니, 난 진지한데...왜, 싫어?
-싫어.
-왜 싫어?
-싫은데 이유 있냐? 아니...이유 많다 넌.
윤미의 표정이 하나도 변하지 않고 여전히 싱글싱글 웃는다. 도대체
뭘 믿고 저렇게 건방을 떠는지 진우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 웃음부터가 싫고, 니 목소리도 싫어...됐냐?
진우의 말에 윤미의 표정이 싹 바뀐다. 흔들던 다리가 멈추고 윤미는
진우를 뚫어지게 본다.
-웃지 않고, 말 안하면 되겠네 그럼.
윤미의 말에 진우가 피식 웃는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내가 왜 탐이 나는데? 니가 갖고 싶으면 다 갖을 수 있는 건 줄 아냐?
-지금까지 그랬어, 가지고 싶은 거 다 가지고 살았어.
-미안한데 이 시간이후부터 니가 갖고 싶은 거 하나만큼은 못 갖게
될거다...나, 너 엄청 싫거든, 너 보믄 소화도 안돼.
진우가 벌떡 일어난다. 윤미가 어디 해봐 하는 표정으로 보면서 휴대폰을
꺼내 진우 앞에서 수정에게 전화를 건다.
-나, 윤미야....지금 안 바쁘면 여기루 좀 올래?
진우가 윤미를 내려다 본다. 여전히 윤미는 진우를 올려다 보며
통화를 한다.
-진우하구 같이 있어 지금....너 돈 필요하지? 현숙이한테서 아까
전화 왔더라, 돈 좀 빌려 달라구.
진우가 그런 윤미를 보다 잠시 흔들린다. 그리곤 다시 자리에 앉는다.
-돈 줄게, 그러니까 여기 와서 받아가.
윤미가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 버리고 진우를 본다.
-수정이 아버지가 수술을 하셨대, 그건 알고 있니?
진우는 금시초문이다.
-몰랐구나, 근데 수술비가 없는 모양이야....난, 그 돈 얼마든지 해줄 수
있거든. 너만 나한테 다시 돌아온다면, 내가 그 돈 해줄 생각이야.
-지금....나더러 거래하잔 말이냐?
-굳이 그래야 한다면.
진우는 화가 난 듯 윤미를 쏘아 본다.
-싫으면 당장 일어나서 가도 좋아, 붙잡진 않을게.
-수술비가 얼마나 되는데?
-오백만원은 있어야 할걸...니가 해줄래 그럼?
진우는 잠시 고민한다. 그 놈의 돈이 항상 문제다. 진우는 아무 말 없이
한동안 그렇게 앉아 있다가 윤미를 본다.
-대신, 수정이한테 이번 일은 비밀로 해줘...너하고 나 아무 거래도
없었어. 순전히 니가 원해서, 돈을 빌려 주는 것 뿐이야.
진우의 말에 윤미는 다시 꼬고 있던 다리를 흔든다.
-그건 약속할게.
진우는 수정일 떠올린다. 가난하지만, 언제나 밝고 웃음이 많았던
그녀. 그녀와 함께 있을 땐 힘든 일도 그다지 힘겹게 느껴지지 않았
었다는 걸 새삼 느낀다. 수정아...이게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내 마지막 마음이다....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지? 내가 어리석은
놈이다, 왜 그걸 이제야 깨달았을까.
**********
수정은 헐레벌떡 호텔앞까지 뛰어 들어온다. 거친 숨을 내몰아 쉬고
호텔 입구를 본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되겠냐, 황보수정.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다가도 당장 돈이 필요한 건 사실인데
어디서 그 돈을 마련한단 말인가. 죽어도 자존심은 팔지 말자 했건만
결국 수정은 자존심을 몽땅 내놓기로 한다. 비장한 표정으로 호텔을
들어간다. 식당 안을 기웃거리니 윤미와 진우가 마주 보고 앉아서
밥을 먹고 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막상 눈으로 확인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오른다. 수정이 순간 돌아선다.
-나쁜 놈, 결국 이렇게 될거면서..아픈 척은 왜 해?
돌아서 다시 나가려다 멈춘다.
-돈이 웬수다 증말....그래, 한 번만 눈 딱 감자.
수정이 다시 돌아서 식당 안으로 들어간다. 멀찌기서 태희가 빈 잔에
물을 따르고 돌아서다 수정을 본다.
-어? 쟨....그 재수없는 왕 싸가지?
태희가 오냐 잘 걸렸다 하는 표정으로 성큼성큼 다가서려는데 수정이
윤미 앞에 와서 서는 걸 보고 잠시 서서 그들을 지켜 본다.
-일찍 왔네?...앉어.
윤미가 비아냥 거리듯 수정을 보다 진우를 본다. 진우는 머리를 박고
수정을 보지도 않는다. 차마 볼 수가 없다.
수정이 진우를 흘기며 진우 옆에 앉는다.
-담엔 진우 옆에 앉지 마, 오늘만 봐줄게...우리 정식으로 사귄다.
윤미의 말에 수정이 진우를 돌아본다. 여전히 진우는 음식만
깨작거리고 있다.
-싫증 났다며? 다시 가져가라 할 땐 언제고?
수정이 인상을 쓰며 윤미를 보고 묻자 윤미가 피식 웃는다.
저 웃음은 정말이지 밥 맛이다.
-내가 언제?
윤미의 말에 수정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본다.
-얼마나 필요해?....돈 말야.
있는 자의 여유와 건방이 하늘을 찌른다. 수정이 겨우 겨우 화를
삭히며 윤미를 본다. 하필 오늘같은 날 이런 자리에 진우까지 있냔
말이지....아우, 자존심 상해.
-얼마나 줄 건데?
-얘기해봐.
-오백만원.
-얘 좀 봐, 오백만원이 누구 집 개 이름이니? 허긴....나한텐 껌 값이지만
너한텐 집 값이겠다.
가방에서 돈 봉투를 꺼내 윤미가 수정이 앞에 밀어 놓는다.
-안 갚아도 돼, 기다려 봤자 나올 돈도 아니지만....담에 또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해. 내가 친구한테 해줄 게 돈 밖에 더 있니?
수정은 자존심이 상하고 손까지 부들부들 떨린다. 돈 봉투를 꽉 움켜
잡고 잠시 그렇게 앉아 있다.
-진우야, 너두 한 마디쯤은 해라. 그래도 옛날 애인인데...
윤미의 말에 진우는 아무 말 없이 여전히 음식만 쳐다 보고 있다.
-빈 부대가 똑바로 설 수 없듯이 가난한 사람이 끝까지 정직할 수 없다.
탈무드에서 읽은 글이야....잘가, 담엔 이런 일로 보지 말자.
윤미가 싱글싱글 웃으며 수정을 보다 음식을 먹는다.
-진우야, 이것도 좀 먹어봐...이게 남자들한테는 굉장히 좋대.
윤미는 마치 수정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수정은 구겨진 자존심을
애써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곤 뒤돌아서는데 눈물이 쏟아진다.
수정이 성큼성큼 눈을 크게 뜨고 걸어나가자 진우가 그제서야 수정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태희가 수정을 보고 냅다 뛰어 나간다. 그리곤
걸어가는 수정의 팔을 확 낚아챈다. 돌아보는 수정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태희는 뭔가 말을 하려 했는데 순간 말문이 닫힌다.
수정이 그런 태희를 보고 말없이 소리까지 내며 엉엉 운다.
태희는 순간 당황한다.
-너...너 왜 울어?
수정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해서 더 큰 소리로 운다. 태희는 미치고 팔짝
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둘을 쳐다 본다.
-아이씨...넌 왜 나만 보면 그렇게 울어대냐?
태희가 수정의 팔을 놓고 돌아서려는데 수정은 계속해서 울기만 한다.
-야, 그만 안 울어? 아이씨....도대체 나더러 어쩌라구? 이번엔 또
뭐냐, 뭘 사달라구 우는 거야 대체.
태희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수정이 울자 태희가 수정의 팔을 잡고
밖으로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