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부
어두운 바에 앉아 있는 윤미. 조금 취한 것처럼 얼굴이 붉다. 윤미의
손에 들린 잔은 이미 비워진 상태다. 윤미가 잔을 내려 놓고 바텐더를
보며 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준벅 한 잔.
원래 윤미는 독한 술을 마시지 못한다. 기껏해야 칵테일이나 맥주 정도를
마시는데 그것도 겨우 서너잔이면 취한다. 윤미가 휴대폰을 꺼내 수정에게
전화를 건다.
-나야, 지금 어디야?
약간 취한 듯 혀가 살짝 꼬인다.
-왜?
-왜?....넌, 내가 오라구 그러면 와야 하는 거 아니니?
윤미의 말에 수정은 대답을 하지 않는다. 윤미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앞을 응시하며 다시 말한다.
-여기로 지금, 당장...내 앞에 와.
-명령이니?
-그래, 명령이다.
-치사하게 굴래 증말?
-여기, 레인보우에 와 있으니까 알아서 찾아와....올 때까지 기다릴거야.
윤미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린다. 그리곤 바텐더가 내려 놓은
잔을 들고 마신다.
-성진우....너 자꾸 내 자존심 짓밟지? 내가 언제까지 참아줄 수 있을 것
같니? 난 절대루...너 안건드려, 니가 그럴수록...황보수정이 힘들어진다는
걸 아셔야지...내 자존심이 뭉게 질 때마다...수정이가 당하는 고통의
수위가 점점 높아진다는 걸 알아야해.
굳은 표정으로 앞을 응시하며 윤미는 천천히 술을 마신다.
***************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윤미의 전화에 수정은 기가 막히고, 화가 나는데
태희가 그런 수정을 힐끔 본다.
-무슨 전환데 그렇게 똥 씹은 얼굴이냐?
태희의 말에 대답을 안하던 수정이 잠깐 갈등하다가 태희를 본다.
-나 가봐야할 것 같어...
-어디 가는데?
-어...친구 좀...
수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태희도 뒤따라 일어선다. 공짜로 얻은 옷이
든 쇼핑백을 들고 태희가 먼저 까페 문을 열고 나가자 수정이 뒤따라
나간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
-근데...아까 그 고모란 사람 말야, 정말 친 고모야?
-그럼, 어디서 주워 온 고모냐?
-아니, 고모라는 분은....돈이 많아 보이는데, 넌...왜 그래? 혹시
돈 많은 남자랑 결혼하셨니?
수정의 말에 태희가 어이없게 웃다가 쇼핑백을 수정에게 안겨주듯
툭 건네준다.
-아주 귀에 돈딱지가 붙었다 붙었어....가.
태희가 홱 돌아서자 수정이 무안한 듯 태희를 보고 서 있다가 손을 들어
태희를 부른다.
-오늘 고마웠어...담에 내가 밥 살게.....비싼 건 절대루 못 산다.
수정이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쇼핑백을 들고 돌아서 간다.
태희는 그런 수정을 돌아보다 피식 웃는다. 그러다 다시 수정이쪽으로
걸어간다. 수정은 태희가 다시 뒤따라 오는 것도 모른 채 전철을 타기
위해서 지하도로 내려간다. 윤미가 기다리는 장소로 가기 위해 전철을
타는 동안에도 태희가 따라 전철을 탄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전철 밖을 보며 쇼핑백을 들고 있는 수정, 그러다 태희가 수정이 든
쇼핑백을 홱 뺏자 수정이 놀란 눈으로 뒤돌아 본다.
-뭐야?
-친구 누구 만나냐?.....그때 그 자식 만나냐?
-그 자식?...아, 진우? 야...진우가 니 자식이냐? 왜 이름 놔두고 자식,
자식 하냐? 그리구, 너 왜 따라 왔어?
수정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묻자 태희가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대수롭지 않은 듯 툭 내뱉는다.
-내가 오늘만 니 보디가드 하기루 했다....어제처럼 너 또 그렇게
술 마시면, 걷지도 못하잖아...오늘은 또 누구 등에 업혀서 갈려구 그러냐?
그래도 나나 되니까 너 업구 가지, 딴 놈은 택두 없어.
-웃겨 증말...
그 뻔한 우연...그러니까 전철이 흔들릴 때 순간 몸을 가누지 못해서
태희의 품에 안기는 꼴 정도는 생기지도 않는다. 그 뻔한 기회가 생길 리가
없다. 태희는 마치 그런 뻔한 기회를 기다린 것처럼 허탈한 표정으로
전철에서 내린다. 둘은 지하도를 나와 레인보우 앞에 도착한다.
-너 정말 따라 들어올 생각은 아니지?
수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태희가 먼저 바 안으로 들어간다. 수정이
놀라서 뒤따라 들어가 태희의 팔을 잡는다.
-너 미쳤니? 빨리 가...
수정이 말리는데에도 불구하고 태희는 안을 훑어 본다.
-그 자식은 안 보인다?....어?
바에 앉아 있는 윤미를 본 태희가 수정일 쳐다본다.
-쟤, 접때 나한테 보이라구 한 기집애 맞지?
-니가 보이지 그럼, 뭐야?..빨리 가.
수정이 태희를 밀치는데 꿈쩍도 안한다. 그때 윤미가 돌아본다.
비틀거리며 윤미가 일어나 입가에 묘한 웃음을 날리며 다가온다.
-이게 누구야?....머슴까지 데리고 왔니?
-머...머슴?
윤미의 말에 태희가 기가 막힌 듯 눈을 크게 뜨며 본다.
그런 태희의 말을 무시하고 보란 듯이 진우에게 전화를 건다.
-난데...여기루 지금 좀 와야겠다....아주 재밌는 상황이거든.
윤미의 행동에 수정이 화가 난 듯 노려 보고 서 있다.
-여기 수정이도 와 있어, 보고 싶지 않아?....기다릴게.
윤미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고 비틀거리며 바로 가서 앉는다. 태희는
수정의 손을 잡고 끌고 가 윤미 옆 자리에 앉히고 자신도 앉는다.
-맥주 둘.
태희가 바텐더에게 말하자 윤미가 비웃듯 입가에 웃음을 짓는다.
그리곤 수정일 돌아본다.
-옛애인은....아직도 옛사랑에 빠져서 허우적대는데, 넌....그새 새 남자
만나서 아주 살판 난 얼굴이다? 진우를...사랑하긴 했니?
윤미의 말에 수정은 대꾸조차 하기 싫은 표정으로 윤미를 본다.
-내가 보기엔...진우가 아니라, 니가 먼저 맘을 바꾼 것 같어...아냐?
-내가 매달리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래야 니가 기분이 아주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아서 서운하니?
수정이 쏘아보며 말하자 윤미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는다.
-황보수정다워....진우가 왜 너같은 앨 좋아하는지 이해가 안간다 증말.
그쪽은 왜 수정이가 좋은 거야?
태희를 힐끔 쳐다보자 태희가 아예 무시하고 못 들은 척 앉아 맥주를
마신다. 그러자 윤미가 피식 웃는다.
-남잘 만나려면 좀 제대로 만나...쟨 너한테 뭘 해줄 수 있니?
그래두 진우는...너 때문에 자길 나한테 팔았어...
취한 윤미가 말끝에 실수를 하고 만다. 수정이 놀란 눈으로 윤미를
쳐다 보고, 태희는 윤미의 그런 행동에 화가 나서 노려 본다.
-뭘 팔어?...너, 다시 말해봐...그게 무슨 소리야?
-그 오백만원에 내가 진우를 샀다구...그런데, 넌 딴 남자랑 연애
하느라 그런 진우가 눈에 안 들어오지?....나쁜 기집애, 니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뭐니?
윤미의 말에 수정의 눈빛이 흔들리고 기가 막혀서 말을 잇지 못하는데
그때 진우가 들어온다. 수정이와 태희가 앉아 있는 걸 본 진우는 순간
멈칫하고 윤미가 그런 진우를 보며 손을 든다.
-여기야...
윤미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수정과 태희가 고개를 돌려
진우를 본다. 진우가 다가오는데 윤미가 비틀거리며 넘어지려 하자
진우가 윤미를 안는다.
-진우야...나 좀 업어줄래? 도저히 못 걷겠어...
그러더니 윤미는 거의 쓰러진다. 진우가 그런 윤미를 업으려 하자
수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윤미의 겨느랑이 사이에 팔을 끼고
세운다.
-쇼하지 말구, 똑바로 일어서.
수정이 윤미를 강제로 일으켜 세우자 진우가 그런 수정일 본다.
태희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헷갈리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너 나한테 할 말 있지?
수정이 진우를 보며 묻자 진우는 영문을 모르는 눈치다.
-난 너한테 물어 볼 말이 있어.
진우는 수정이 옆에 선 태희를 보자 기분이 언잖아지고 수정에게서
윤미를 빼앗아 업는다. 수정이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진우를
보고 서 있다.
-다음에 얘기하자.
진우가 윤미를 업고 밖으로 나가자 수정이 태희를 무시하고 뒤따라
나간다. 그리곤 진우 앞을 가로 막고 선다. 태희가 엉겹결에 쇼핑백을
들고 뒤따라 나온다.
-지금 당장 얘기해...오백만원에 너 몸 팔았니?
수정의 말에 진우가 순간 당황하다 이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본다.
-날 그렇게 몰라?....내가 그런 짓할 이유 없어...너 말대로 윤미랑
나 바람 피우고 있는 거야 지금...대답 됐지?...비켜.
진우는 수정일 지나쳐 윤미의 차 문을 열고 윤미를 뒷좌석에 눕힌다.
그리곤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돌아가다 고개를 들어 수정이 서 있는
뒷모습을 본다. 태희는 쇼핑백을 든 채로 서서 진우를 못마땅한
눈으로 보고 서 있다. 진우와 태희의 시선이 순간 짧게 교차되고
진우는 차에 오른다. 차가 사라지자 수정이 그제서야 몸을 돌려
사라진 차를 본다.
-뭘 그렇게 봐?
태희가 투덜대며 톡 쏘아 붙인다. 아까부터 내내 자신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는 수정에게 화가 난다. 쇼핑백을 수정에게 덥썩
안겨 주고는 툭 내뱉는다.
-너 혼자 가...
태희가 돌아서 걸어가자 수정이 한숨을 내쉬며 쇼핑백을 내려다 본다.
태희는 잡지도 않고, 따라오지도 않는 수정에게 더 화가 나고
그게 질투라는 감정이란 걸 눈치채지 못한다.
************
윤미 집 앞에 도착한 진우는 뒷좌석에서 윤미를 부축해서 내리게
하고 키를 가방 안에 넣어 둔다. 초인종을 누르고 윤미를 대문
앞에 세운다.
-누구세요?
인터폰에서 들려오는 낯선 여자의 음성.
-윤미 친군데요....윤미가 지금 좀 취해서요...
-얘가 미쳤어....알았어요.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진우가 윤미를 다시 부축하는데 윤미가
느닷없이 진우의 목을 껴안는다.
-나 안 취했어....멀쩡해 지금....너 한 번만 더 날 무시하면, 그땐
정말 용서 안해...오늘은 시범경기였어...나두 내가 수정일 어떻게
할지 몰라.
윤미의 말에 진우는 굳은 표정으로 그대로 있다. 그러다 윤미가 손을
풀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진우를 본다.
-잘가...가다가 옆길로 새지 말구, 그대로 집에 가.
윤미가 돌아서 비틀거리며 들어가자 진우는 표정없이 돌아서 걸어
내려 간다. 조금 전에 본 수정과 태희를 떠올린다. 그러자 기분이
나빠진다.
************
욕실에서 씻고 나오는 수정, 현숙은 그새 쇼핑백을 열어 옷을 입어보고
난리다. 현숙이 입이 확 찢어진다.
-살다살다 내가 이런 옷도 입어 보게 되는구나...근데, 도대체 이게
얼마짜리야?
현숙이 거울 앞에 서서 아주 패션쇼를 한다. 수정의 표정은 울적하다.
들어와서 로션을 바르는 수정을 현숙이 내려다 본다.
-근데, 넌 왜 아까부터 똥 씹은 표정이야?...근데...그 남자, 부자 아니니?
현숙이 수정 앞에 앉으며 묻자 수정이 힐끔 본다.
-부자는 무슨...호텔 보이라니까.
-아니 그렇잖아, 지 고모는 패션 디자이너라는데...왜 걘 보이냐구?
혀를 굴리며 현숙이 제스처까지 오바한다.
-몰라 나두.
건성으로 대답하는 수정, 자리에 눕는다. 입을 삐죽거리며 수정을 보다
현숙이 옷을 벗는다. 그러다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는 수정 때문에
화들짝 놀란다.
-아이씨.....놀랬잖아?
-아무리 생각해두, 내가...나쁜 년인 것 같애.
-그걸 이제야 알았냐? 너 나쁜 년 맞어.
현숙이 옷을 벗고 옷걸이에 걸어서 옷장안에 넣으며 건성으로 말한다.
-진우랑 그래두 삼년인데....내가 이렇게 너무 멀쩡한게 이상하잖아.
-사랑한게 아니었나부지 그럼.
-근데...오늘 진우를 보니까, 맘이 이상한거 있지...솔직히 말하면...
윤미한테 주기엔 좀 아깝단 생각까지 들더라....그리고 미안한 맘두
들고....아, 몰라...머리 아퍼.
수정이 다시 이불을 덮으며 눕는다.
-니가 왜 미안하냐? 바람은 그 놈이 폈는데...
현숙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수정은 내내 진우를 떠올린다.
윤미의 말이 맘에 걸리고...그러다 돌아 눕는데, 태희가 떠오른다.
-나쁜놈..그렇다구 혼자 가냐?
수정이 이불을 덮어 쓰자 현숙이 그런 수정을 한심하게 내려다 본다.
-백수 주제에 잠이 오냐? 하루종일 잘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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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누운 태희는 아무리 생각해도 수정이 괴씸하다. 그리고 진우가
계속 신경에 거슬린다.
-아이씨.....내가 미쳤나?
태희가 벌떡 자리에 일어나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수정일
좋아하는 것 같다.
-강태희 정신 차리자...너 지금 미친 거야....
태희가 다시 이불을 덮어쓰며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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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 자리에 다들 모인 강회장네 가족들...태희가 뒤늦게 식탁
앞에 앉자 강회장이 밥을 먹으며 묻는다.
-너 어제 몇시에 들어왔어?
수저를 들던 태희가 당황하며 말한다.
-열...열시쯤에 들어왔는데....
태희의 말에 강회장이 모친을 노려 본다. 모친이 그런 시선을 외면하고
밥을 먹으며 힐끔 태희를 본다.
-이제 거짓말까지 해?
-거..거짓말은 무슨...열한시나 열시나...
모친이 말을 더듬자 강회장이 한심하다는 듯 보며 국을 뜬다.
-아주 모자지간에 사기를 쳐라 쳐....태희 너, 늬 고모 만났냐?
-예?...아, 네....그냥 하도 한 번 오라고 하기에...
-안봐도 뻔해, 차 문제로 니가 부탁했지?
-아니에요...아버지도 참...
태희가 얼버무리며 밥을 먹자 태경이 피식 웃는다.
-차 끌고 다니는 건 눈감아 주는데....사고치면 그날로 팔아버릴테니까
그리 알아.
-네 아버지...걱정을 하지 마십시요.
강회장의 말에 태희는 기분이 아주 좋아지고 씩씩하게 밥을 먹는다.
-고모, 고마워.
혼자서 중얼거리며 태희가 모친에게 윙크를 날리자 모친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밥을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