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날은 밝아있었다. 이른 새벽 5시. 사람들이 모두 잠에 든 사이 유미는 대충 옷을 걸치고 걸어나왔다. 마음같아선 한시라도 빨리 이 끔찍한 장소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유미의 몸은 생각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어쩌면 걸어서 나간다는 것 자체도 대단한 것이었다.
..
"으읏...."
한걸음씩 뗄 때마다 온 몸에서 느껴지는 진통에 신음소리가 절로 새어나왔다. 그런 소리마저 내고 싶지 않아 유미는 입술에 피가 나리만치 꽉 깨물었지만, 퉁퉁 부어서 피까지 맺혀있는 유미의 입술만 더 아파올 뿐이었다.
"정말 꼴좋네.."
자조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천천히 걸어나가 대문을 나서자, 그 앞에서 낯익은 차 한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제밤, 이 곳까지 같이 달려온 .. 해빈의 차였다.
해빈은 유미가 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차문을 열고 나와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어제 입었던 정장 차림 그대로에 얼굴이 푸석한 것이 마치 어제밤부터 계속 집앞에서 기다린 듯 했다.
그는 아무 말없이 유미를 부축해서 차에 태웠다.
"...미안해요."
해빈은 유미에게 안전벨트를 매주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그는 유미의 온 몸에 퍼져있는 검붉은 자국들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한참을 멍하니 그렇게 앉아있었다. 무언가 안타까운 듯, 한편으론 원망스러움이 가득한 눈길로 유미를 바라보던 해빈은 입고있던 마이를 벗어 유미에게 덮어주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유미씨 집으로 갈게요. 얼마 안걸리지만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요."
...집이 어딘지는 아세요? 하고 말하려던 유미는 문득 그가 자신에 대해서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대로 그의 차 안에서 그의 옷을 덮은 채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해요. 그쪽에서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어요. ...최대한 막아보려고 내가 같이 갔었던건데.."
유미가 한 걸음 걷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걸 알았는지 해빈은 괜찮다고 말하는 그녀를 안고서 집 안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는 주방에 들어가 한참을 뒤적거리는 듯 하더니 따뜻한 꿀물을 한잔 타서 유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마음대로 주방을 뒤져서 미안해요. 그렇지만 따뜻한 걸 마셔야 할 거 같아서요.."
유미는 말없이 그가 건네주는 찻잔을 받아들었다. 적당히 따뜻하게 데워진 꿀물 한 모금에 여태동안 굳어있던 몸이 한순간에 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따스한 이 꿀물 한 방울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유미의 몸은 그대로 나른하게 퍼져가는 듯 했다.
해빈은 침대 옆에 있는 화장대 의자에 앉아 유미가 꿀물을 손에 꼭 쥐고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고는 다 마신 컵을 받아 들고 일어섰다.
“뭐 내가 더 해줄 일은 없나요? 뭐든지 해줄 수 있으니까 말해봐요. 음... 예를 들면, 씻겨줄까요?”
장난스런 미소를 띄며 말하는 해빈이 그 순간 너무 귀여워 보여 유미는 자신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 유미가 해빈을 알게 된 건 하루도 채 되지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자신에게 보여주는 행동들이 아직은 납득하기 힘듬에도 불구하고 그냥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버리는지도 몰랐다.
그녀의 원룸을 휙 둘러보며 구경하고 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하게 있지만.. 사실은 중요한 어떤 것을 숨기기 위해 그녀의 곁에 남아있는 듯한 저 남자...
도대체 저 남자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그리고 무엇 때문에 자신을 이렇게 돌봐주는 걸까.. 정확히 사장과는 어떤 관계인 걸까..
유미는 마음대로 원룸을 뒤적이고 있는 해빈의 뒷모습을 가만히 쫒았다. 한참을 서성이던 그가 쇼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켜는 것을 바라보다 테이블에 무언가가 놓여져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거, 뭐에요?”
목이 부었는지 말할 때 느껴지는 통증에 유미는 살짝 인상을 쓰며 물었다. 해빈은 테이블에 놓인 것을 물어본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그것을 들고서 유미가 누워있는 침대쪽으로 왔다.
테이블에 있었던 것은 어제 유미가 입었던 연두빛 정장과 구두, 핸드백이 담겨진 쇼핑백이었다. 어제 김비서가 퇴근하는 길에 갔다 놓은 건지 그녀의 메모도 같이 접혀있었다.
「아까 보니까 사장님두 유미씨한테 반한 것 같더라. 유미씨 오늘 너무 예쁜거 알지? 생각해보니까 아까 옷 갈아입구 사진찍는 걸 깜박했어! 마침 디카폰도 샀는데..너무 아쉽다. 내일 출근해서 파티가 어땠는지 꼭 얘기해줘야해! 그리구 맘대로 집에 들어와서 미안. 사장님이 아무래도 짐을 집에 갖다주는게 좋을거 같다고 하셔서..들어와버렸어. 그럼 내일봐!」
어제의 파티에 대해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한 김비서의 메모에 유미는 씁쓸해졌다. 오늘이면 김비서도 알게될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 출근..!..웃......”
그제서야 출근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눈치 챈 유미가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몸을 움직였지만 온 몸에서 느껴지는 뼈마디 사이의 비명소리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신음소리를 냈다. 해빈은 아파서 주저앉다시피 한 유미를 다시 침대에 눕히고고 이불을 덮어주면서 말했다.
“....오늘은.. 출근하지 않아도 좋다고 하더군요.. 오늘뿐만이 아니라.. 당분간은요. 전화할테니까.. 밀린 휴가라고 생각하고 집에서 푹 쉬라는군요.”
망설이는 듯 꺼내는 해빈의 목소리. 윤비서의 메모에는 없었던 말인 걸 생각해보면 그 집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면서 사장과 통화라도 했었던 것 같았다.
...대단한 일 하나 했으니까 당분간은 쉬라는 일종의 포상휴가.인건가?
풋.
유미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너무나 어이없음에서 나오는 웃음..
여태동안 무슨 일을 해도 단 한번도 쉬라는 말이 없었던 한상운사장이 이번엔 밀린 휴가라고 치고 쉬라는 말을 하다니.. 어제 밤 유미가 해준 일이 대단하기는 했었던 모양이었다.
“..보너스는 없나보죠?”
누가 들어도 비웃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유미를 보며 해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그럴것이.. 비록 해빈이 유미와 같은 일을 겪은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유미의 심정이 자신은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끔찍할 걸 알기에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더군다나..
“....유감스럽게도, 보너스도 있더군요.”
“......포상휴가에 보너스라.. ..좋아서, 웃어야 하는 건가요?”
침대에 반쯤 기대고 앉아 아직 어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모습으로 해빈을 똑바로 바라보며 웃는 유미의 모습. 그 모습에 해빈은 마음이 너무 아파왔다.
처음엔 호기심이었다. 상운의 회사에서 우연히 본 미인에 대한 호기심. 그 미인의 속사정에 대한 동정. 우연히 한번 씩 보게 될 때마다 그 호기심과 동정은 해빈의 시선이 자꾸만 닿게 만들었고, 유미가 상운의 밑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는 진작에 알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항상 일이 끝나도 아무 의욕없이 시체가 걸어가는 듯한 얼굴을 한 그녀가 안타까워 상운에게 그만두라고 몇 번이나 말을 했었다. 처음엔 자신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며 신경도 쓰지 않던 상운이었지만 해빈의 끈질김에 유미의 일을 조금씩 줄이기 시작했다. 물론 자신에게 손해보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 상운에게 적당한 대가를 치루기는 했었다.
처음 어제의 일을 알고서 절대로 안된다고 화를 내며 반대했지만,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유미에게 더 이상 손대지 않고, 해빈도 함께 간다는 조건으로 같이 갔었고, 상운이 그들과 어떤 계약을 맺었던 말건 자신이 어떻게든 훼방 놓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결국엔 생각했던 대로 일이 되지 않았지만...
“..오늘 고마웠어요. 아니, 정확히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방금의 꿀물 한잔은 정말로 고마워요. 근데... 이제 나 쉬고 싶으니까 이만 가줄래요?”
“....뭔가를 더 해주고 싶지만, 내가 더 이상 해줄 게 없는 거 같네요. 이럴 때는 그냥 가주는 게 도와주는 거겠죠? ...”
침대 옆에 멍하니 서있던 해빈은 유미의 말에 고개를 끄떡이며 나섰다. 그대로 나가던 해빈은 멈칫하며 뒤돌아 무슨 말을 하려는 듯 했지만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나중에 전화할게요. 푹 쉬어요.”
-달칵.
해빈은 유미의 집 문 밖에 기대고 한참을 그렇게 서있었다. 어제, 처음으로 그녀의 옆에 설수 있었던 그날, 그는 모든 걸 알면서 그녀가 아파할 장소로 들여보냈다. 끝까지 막아주지 못한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바보같았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만든 성운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차마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서 그 앞에서 밤새 그녀를 기다렸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모를 그녀지만 무작정 기다렸다. 어떤 일을 당하고 있을 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게 전부 다 자신의 탓인 것 마냥 수없이 밀려드는 생각에 잠시 눈조차 붙이지 못하고 차 안에서 뜬눈으로 지새웠다.
새벽 5시. 그 이른 시간에 지쳐 보이는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꿋꿋이 제 발로 걸어 나오는 유미를 보는 순간 뛰쳐나가 그녀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어제 밤 그녀를 도와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쓰러질 것 같은 그녀를 안고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동안 생각보다 더 작은 그녀의 가녀린 체구에 가슴이 아팠다. 자신의 행동에 묻고 싶은 것이 많을 텐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무슨 자격으로 여기 있는거냐고 묻고 있는 것 같아서도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아직은... 아니 결국은 하지 못했다. 지금 유미에게 자신은 그냥 이상한 남자일 뿐이니까. .. 그녀에게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어쩌면 수상한.. 사람일테니까.
..언젠가 가능하다면 가까운 시일에 하고 싶은 그 한마디.
‘......내가 당신을.. 안아주면 안되나요?’
그 말을 해빈은 그렇게 가슴속으로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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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좀 늦었지요..;ㅅ;...
어제 정신이 없었거든요... 바쁜 건 아니었는데..잠에 취해서;;;
그대신 오늘 분량이 쫌..많아요..ㅋ
어쩌다 보니 해빈이 툭! 하고 튀어올라버린 거 같네요..
해빈이 유미에게 느끼는 감정은, 좀 더 자세히 표현하고 싶었는데..
생각처럼 잘 안된거 같네요....ㅜㅂ ㅜ..
이제, 유미의 몸바쳐(?)일궈낸 휴가.. 뭘 할까요? ^- ^;
낼은 여태보다 좀 더위가 가라앉는다죠.. 이제 정말 여름도 막바지네요..
얼마 안남은 여름, .. 시원하게 보내세요! >ㅂ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