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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노트

김진숙 |2004.08.28 21:44
조회 239 |추천 0

 

 

인생을 살면서 가장 의미있는 일중에 하나가 내사람을 얻어가는 일이 아닐까 싶다.

나를 몰랐던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아낌받는 사람이 되는것이야말로, 살면서 내가 가장 뿌듯해 지는 일이다.

아마도 그것은 돈보다도 더 귀하고 값진 내 인생의 재산이기 때문이리라...


난.

내가 원했던 희망과는 전혀달랐던 미용이라는 직업을 선택해야만 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다른세계속에 뛰어들면서, 그곳에서 참 많은사람들을 만났다.

미용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새로운 기술과 자기발전을 위해서 우리는 길게는 3년 짧게는 3개월~ 6개월이라는 시간을 한직장에서 근무하게 된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꼭 이러하게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의 사람들이 늘 자기발전을 위해서 이직을 하는편이 많다.

나역시 몇군데 이직을 했었고, 그 와중에 미용학원 동기오빠의 소개로 전주에서 유명했던 한 미용실로 옮겨왔다. 처음엔 이직하려고 맘먹게된 동기가 단순히 동기오빠가 그곳에 근무하고 있어서 ‘이직의 낯설음’을 조금이나마 면할수 있으리라는 단순한 계기였다.

하지만 그 단순무식했던 선택이 참으로 탁월한 선택이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대형샵에 조금 부족했던 샵이긴 했지만, 대형샵이 갖지 못하는 가족같은 분위기가 참 마음에 들었다. 미용을 시작하기엔 조금 늦은감이 있었던 내 나이가 부담스럽지 않을정도로 직장동료들 또한 모두가 내 위로의 언니들과 오빠들(3명의여자,2명의남자 그들은 모두 동갑이었다)이였기 때문에, 졸지에 곳에서는 막내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익히 오빠에게서 수없이 좋으신분이라고 들었던 원장님..

그 칭찬의 효력도 어쩌면 내가 이직할 때 조금의 망설임을 덜어주었던 계기중의 하나이다.


새로운 직장에서의 첫출발은 그렇게 설레임에서 시작이 되었다.

하지만 그 설레임은 바로 초긴장속으로 몰려들어갔다.

샵에서 졸지에 막내신세가 된 내가 원장님을 어시스트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간에 여자원장님만을 대해왔던터라 남자원장님을 대하는것은 무서움의 극치였다.

원장님께서 작업하실 때 어시스트하는 사람은 긴장하지 않으면 말그대로 죽음이었기때문이었다. 만약 어시스트할 때 한눈이라도 팔았다 걸리면, 손님이 가신후에는 눈물이쏙 빠질만큼 호되게 야단을 치셨다. “눈으로 보는것을 헛되이 하면 안된다.”

그리고 그 헛되이 한 여파는 ‘갈굼’이라는 시련으로 다가왔다.

그때는 원장님의 ‘갈굼’을 모두가 무서워했지만, 무서워하면서 그 ‘갈굼’이 인생선배의 충고임을 우리는 잘 알고있었다.

원장님의 스타일과 성격을 파악하는데 3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 결실로 이제는 원장님과는 눈빛만 봐도 원장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수있는 보좌관(?)이 된것이다.

그래서 스탭(군대로 따지면 신병인 이등병)이라는 어시스트가 들어와도, 원장님의 어시스트는 여전히 내 몫이었다. 가끔은 내 몫의 자리를 피해 신병에게 자리를 내주면(그들도 배우러 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처음의 나처럼 원장님을 무서워하며 쫄거나 피해다니기가 일쑤였다. 그리고나서는 내게 다가와 푸념을 떨기가 일쑤였다.

내가 대단하다며, 어떻게 원장님의 마음을 그렇게도 잘 아느냐며 부러워했다.

“원장님 스타일 따라가기 힘들지? 난 꼬박 3개월 걸렸어.”

웃으면서 동료를 격려했지만, 그 웃음뒤에는 나의 시련이 있었다는것을 그도 느끼리라 생각이 되었다.


그렇게 내가 조금씩 새로운곳에 적응하기 시작했을때, 원장님에게는 커다란 파문이 조금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직원들중에 원장님이 가장믿고 신임했던 남자디자이너오빠가 말도없이 안나오기 시작했고, 나중엔 그만두겠다는 말을 통보해왔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었지만 이유는 동거했던 여자친구와의 불화로 인해서 였다. 그렇게 어이없게 오른팔을 잃어버린 원장님의 낙담은 예상치 못하게 커보였다. 나또한 동료들중에 내가 믿고 따랐던 오빠였기 때문에 아쉬움과 실망감은 말할수 없이 컸다. 하물며 원장님은 어떠했겠는가?.......

그러는사이에 다른 두명은 퇴직을 하였고,다른한명의 디자이너너 역시 말없이 짐을 정리했다. 그게 불과 한두달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졸지에 직원을 다 잃어버리신 원장님은 군사를 잃은 장군과도 같아 보였다.

그 어려운 시기를 같이 겪어야 했던 원장님과 난 졸지에 부모를 잃은 고아와 같은 심정이었다.  물론 직원공고를 내긴 했지만....

믿었던 사람을 잃는것이야말로 가장 슬픈일이라는것을 그때 알수있었다.



처음 직원채용이 잘 되질않아 평일엔 원장님과 내가 작업을 해야만 했고, 바쁜 주말에는 스페야(일일 알바생 같은격)를 불러 샵을 운영해 갔다.

그렇게 힘겹게 하루하루 샵을 운영해갔던 어느날 저녁.

퇴근시간이 가까운무렵 손님이 뜸하자 원장님께서 날 부르셨다.

“힘들지?” 하고 물으셨다.

“아니요. 원장님이 더 힘드신데요..”

“곧 사람 구해질테니까 조금만 참자.” 하시며 오히려 날 위로하셨다.

그리고서는 마네킹을 가져오시더니 여자컷트에 대해 알려주셨다.(그때 난 여자컷트를 배울무렵의 수련생이었다.)

우리가 말하는 “지라시”(기본적인 여자머리 컷트방식)의 단한번의 교육을 보여주셨다.

교육을 통해서 배우는것도 물론 있지만, 교육은 하나의 교과서일뿐이다.

컷트에도 공식이 있긴하지만 공식은 공식일뿐 그 방법을 터득하는건 나 자신의 몫이었다. 

그렇게 단한번의 방법을 알려주시고서는,

“내일부터 손님오면 니가 해.” 그렇게 단호하게 원장님은 말씀하셨다.

“아... 어떻게 제가 해요.” 그것은 겁 이였다. 미용을 하면서 제일 피해야 할거이 ‘겁’이였는데, 난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많이...

원장님의 단호한 그 한마디는 내게 큰 위압감으로 다가왔다.

내머리도 아니고 손님의 머리를 더군다나 초보인 내가 다룬다는것은 정말 큰 부담이 아닐수 없었다. 그래서 난 준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물론 그전에도 마네킹을 두고서 연습을 하긴했지만, 천천히 정확하게 배워야지~라고 생각했던 내게 그런생각 따위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그냥해” 라는 원장님의 반강압적인 명령에 따라야하는 불쌍한 중생이었다.

그렇게해서 처음 여자손님의 머리를 컷팅했을때  쿵쾅쿵쾅 떨렸던 심장소리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의 떨림을 행여 손님이 눈치채지 않을까해서 연신 손님과 대화를 나누며 첫컷팅의 시발식을 나름대로 무사히 마쳤다.

겁보였던 내가 그 행식을 무사히 마칠수 있었던것은 원장님의 “그냥해”라는 명제가 아니였으면 난 여전히 겁만내고서 손으로는 해볼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번,두번,세번 여러번의 시행착오를 거쳐서 난 시야기(디자이너가 되기위한 준비생)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원장님께서 내게 건네준 한권의 노트.

그 노트에 담긴 원장님의 짧은 메모가 늘 나를 일깨우는 지침서가 되었다.

내손으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것이 미용이다. 그만큼 기쁨과 환희 슬픔 정말 인생의 희노애락을 맛보는 순간이 많아서 가끔은 자기 딜레마에 빠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나역시 그런사람들중에 하나였는데 원장님께선 늘 그점에 대해서 아낌없는 조언과 충고를 해주셨다.


단순히 직장상사와 직원이라는 관계를 떠나서 ‘일’을 먼저 가르쳐주기이전에 ‘인성’을 알려주신 분이다.

좋은기술력은 언제고 내가 배우고 노력하면 얻게되는 것이지만,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것은 누가 가르쳐준다고 해서 얻을수 있는것이 아니라며 내가 가진 장점을 늘 아낌없이 칭찬해주신 분이기도 하셨다. 기술하나로 기고만장하는 사람보다, 손님에게 인간적으로 대할줄아는

사람이 미용인으로서 아니 사람으로서의 기본임을 항상 깨우쳐주신 분.

그분이 늘 가르쳐주고자하셨던 ‘깨어있음’의 진리는 아직도 내게 큰 가르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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