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시골집에 갔다가 아버지에게서 큰할아버지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희 큰할아버지는 의병대장 이셨다네요.....
증조 할아버지때 많던 재산과 논과 밭을 의병활동을 하시면서 다 팔아서 군자금으로 쓰셨고, 할아버지는 형님때문에 경찰서에 끌려가 온갖 고문과 고통을 당하시며 그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다는군요.....
또 아버지는 그 처절한 가난에 굴레에 8살때부터 남의집 머슴으로 살며, 온갖고생을 하면서 학교는 근처에도 못가봤답니다....
그 아버지가 6.25 전쟁에 참전하여 팔, 다리, 어깨에 총을 맞고 그 후유증으로 아직까지 고생하며 살고 계십니다....
또한 저희 어머니는 결혼직후 남편이 군대(6.25참전)에 가셔서 전사하시는 바람에 지금의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45세 되던해 제가 태어났습니다.......
왜 이런 가족사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느냐구요.....?????
작년에 저희 큰할아버지에게 국민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 훈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보훈청에서 보관만 하고 있는상태지요..........
6.25전쟁 때문에 동사무소에 불이나 호적이 불타서 유가족 확인이 안된답니다.......그리고, 친아들, 친손자 에게만 훈장을 줄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규정에 맞추어 훈장수여를 하고,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주는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만, 저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억울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친아들, 친손자는 아니어도 큰할아버지에게 자손이 있었던것도 아니고,
의병가족이라는 이유로 고문받고 고생하신 저희 할아버지와
또, 가난과 핍박으로 학교근처에도 못가보고 남의집 머슴으로 20여년을 살아야 했던 저의 아버지는 진정 그 자손이 아니란 말입니까??????
올해로 79세이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 훈장을 가슴에 달아 드리고, 그동안 고생하며 살아오신데 대한 자그마한 위로라도 해 드리고 싶습니다......
생존기간: 1882~1909. 7.22
출생지: 경남 하동
운동계열: 의진활동
서훈내역(연도): 애국장(2003)
성명(한자): 박인환(朴仁煥)
경남 하동(河東) 사람이다.고광순(高光洵) 의진과 김승지(金承旨) 의진에 참여하여 경남 하동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07년 일제는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한 후 대한제국의 정규군인 진위대와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하였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하였다. 당시의 의병봉기는 동년 8월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진에 가담함으로써 전국적인 항쟁으로 발전하였고 참여계층도 유림, 농민, 포수, 해산군인을 비롯하여 상인, 광부 등의 평민들이 대거 참여하여 국민전쟁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이러한 시기에 박인환은 고광순 의진에 참여해 활약하였다. 고광순은 1907년 1월 24일 고제량과 더불어 창평(昌平) 저산(猪山)에서 창의의 기치를 세우고 토적격왜(討賊擊倭)의 전술전략을 수립하고 각 처의 의진과 연락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고광순은 남원의 양한규(梁漢奎) 의진 등과 연합하여 화순·능주·창평·곡성·구례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큰 공을 세웠으나 1907년 10월 11일(음력 9월 11일) 일본군의 기습으로 불행하게도 화개동 연곡사(燕谷寺)에서 전사하였다.박인환은 고광순이 전사한 이후에는 김승지 의진에 가담하여 좌십인장(佐十人長)으로 활동하다가 1908년 4월부터 임봉구 의진에서 활동하였다. 임봉구 의진은 하동군 청암면(靑巖面)을 근거로 인근 각 면을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박인환은 임봉구 의진에 참여하여 1908년 4월 하동군 적양동면(赤良東面) 동점촌(銅店村)에서 총기, 탄약 등 군수품을 모집하던 중 일본군 및 순사의 합동수색대와 조우하여 접전을 벌였다. 또한 7월에는 하동군 외횡보면(外橫甫面) 역마내동(驛馬內洞)에서 일신일어학교(日新日語學校)를 습격하여 일본인 교사를 인솔해 온 정우철을 응징하고 교사(校舍)를 소각 전소시켰다. 이어 내횡보면 토덕동(土德洞)에 거주하는 일진회원(一進會員) 장재수를 처단 응징하는 등 일제 침략세력을 일소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박인환은 하동군 악양서면(岳陽西面) 신흥촌(新興村) 부근에서 일경에 피체되었다가 탈출하였다. 그는 탈출 후에도 1909년 5월 권석도(權錫燾)·이학노(李學魯) 등과 경남 진주군 일대를 중심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1909년 7월 22일 일경에게 피살, 순국하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晉秘 第80號(暴徒에 관한 件, 1908. 2. 6)·秘收 282-4號(暴徒 一進會員 銃殺의 件, 1908. 4. 14)·暴徒에 관한 編冊(暴徒首魁 生擒에 관한 件, 1908. 7. 9)·秘收 第698號(暴徒 生擒에 관한 件, 1908. 7. 10)·暴徒에 관한 編冊(匪徒 逃走에 관한 件, 1908. 7. 15)·秘收 第153-2號(1908. 9. 26)·判決文(大邱抗訴院, 1910. 2. 19)·韓國獨立運動史資料(國史編纂委員會) 15 58·59面·河東郡誌(하동군, 1972) 150面·河東郡史(하동군, 1978) 268面·慶尙南道史(경상남도, 1988) 上卷 1121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