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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시골성당 프랑스신부님...

김순녀 |2004.09.18 19:01
조회 431 |추천 0

유년기의 기억은 그것이 어두운것이건간에 따스한 기억이건간에 오랬동안 지워지지 않고 어느 날 삶의 한 귀퉁이에서 문득 문득 떠올라 혼자 웃음짓게도 그리고 씁쓸하게 하기도 한다.
애정... 따스함...얼마나 햇살처럼 눈물겨운 단어인가.

내 초등학교 4학년때의 기억은 가끔씩 어느 시골성당의 마당한켠에서 정지되고는 한다.
하얀벽의 작은성당건? 조그마한 마당 구석에 심어진 어여쁜 화단의 꽃들, 낮은 담장.

서울에서 살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때 우리가족은 잠시 큰집에서 생활하게 되었고  큰집은 쉽게 말해 아주 촌구석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천주교 신자셨고 오빠는 중학생이 된 후 읍내로 중학교를 다녔다.
어느 일요일아침인가 처음으로 읍내에 있는 성당을 가보기로 했고
오빠는 다닌지가 나보다는 한참 되어 친한 친구가 많이 생긴모양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다 읍내 초입앞의 성당 앞에서 우리는 내렸다.
그런데 오빠는 성당 마당에서 나를 기다리라고 말한 후 친구와 어딜 갔는지... 도통 나타나지 않는것이었다.
하얀바탕에 빨간색 땡땡이가 찍힌 블라우스를 나름대로는 이쁘게 차려입고 갔던 나는
미사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지라 오빠를 기다리며 혼자 마당에 나무막대기로 그림을 그리며 놀고 있었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들리는 음성.
깜짝 놀라고말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외국인을 본것이다.
지금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저 XX의 동생이예요' 라고 말한것 같고 이런 저런 얘기를 물어오시다
신부님께서 반가와하시며 나를 꼭 안아준 후 눈에 뽀뽀를 해주셨는데 그런 문화에 익숙치 못했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있다가 눈에 신부님의 침이 묻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하얀 신부복을 입고 계셨던 쉰이 넘으신 인자하신 미소의 신부님은... 큰 풍채에 한국발음이 아주 능숙하셨다.
한국 이름으로는 안덕화 신부님... 몇십년이 흘러도 이름이 기억나는 이유는 이덕화와 이름이 같아서였다.
사실 나는 어린시절부터 친조부모, 외조부모의 얼굴조차 모르고 자랐고
부모님도 세파에 시달려 우리들의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주지는 못하셨다.

그때부터 매주 성당을 나갔고 성당 축제가 있었던 어느날인가는 성당안에서 얼굴까지 벌개져가며 열심히 포크댄스를 췄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혼자 빙그레 웃음을 짓게 만든다.
많이 사랑해주셨다. 우리 남매는 더더구나 버스까지 타고 먼곳에서 왕래를 했기때문에 그런지 더욱 아껴주셨나보다.
지각을 하면 다른 아이들은 능숙한 한국말로 된통 혼나기 일쑤였는데도 우리한테만은 그러지 않으셨다.
봄이 지나가고 여름도 지나고 가을도 끝나갈 무렵,
우리 남매는 영세명을 받게 되는 시기가 되었는데 갑자기 또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내가 성당을 더 일찍 다녔었더라면 신부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텐데...

서울로 나는 전학을 갔고 물론 서울에서도 다른 성당을 다니게 되었지만 그 어마어마한 성당규모와 낯선 사람들과의 어색함때문에 한 두번 나갔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물론 신부님과는 편지를 몇번 주고받았지만 이사를 하도 많이 다녀 편지왕래마저 끊기고 말았다.
그 후로 천주교와는 영 인연이 없었던것 같다.

 

집안문제때문에 큰집과는 왕래를 하지않았기에 시골로 내려갈 일이 없었고,
몇 해전 그 곳을 떠나온 후 처음으로 성당을 찾게 되었는데 이미 신부님은 본국으로 돌아가시고 계시지 않았고
성당은 붉은 벽돌의 거대하고도 현대적인 건물로 바뀌어있었다.
세월이 이렇게 흘렀으니 나도 변하고 세상도 변하고 건물도 변한것은 당연한 것이었겠지만 가슴속의 이 휑한 바람은 무엇일까.
어린시절의 애정과 사랑은 얼마나 그 사람의 무의식적인 정신적 토양을 튼튼하고 비옥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것일까.
내 어린날 기억에서 잊혀지지않는 나의 신부님...신부님의 따스함이 왜 성인이 된 저를 이렇게 눈물짓게 하는것일까요.

 

Dominic Miller Shapes...Gymnope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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