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노래가사처럼 하루에도 몇번씩 환하게 웃음짓는 그 애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지나갑니다.
마음이 참 따뜻한 아이였어요. 농부들은 수확할때 열매를 모두 다 거두어가진 않는다고 하죠. 날짐승들 먹으라고 몇개는 나무위에 대롱대롱 매달아놓는답니다. 법정스님은 한겨울 꽁꽁 얼어붙은 개울의 얼음을 깨 물구멍을 만들어둔다고 해요. 물 찾아 개울로 내려온 짐승들을 위해서지요.
꼭 그 아이 마음이 그랬습니다. 작고 보잘것 없는 일에도 감동했고, 힘든 주변사람을 위해서 베풀 수 있는 넉넉함을 지닌 아이였어요. 추운겨울의 조그만 난로처럼 언제나 묵묵히 따스함을 전해준 아이였습니다.
사귄지 이제 막 천일이 넘어가네요. 처음 그 아이와 사귀게 될때 정말 힘겨웠어요. 저 뿐만 아니라 그 아이를 좋아한 몇몇의 사람이 더 있었거든요. 같은 동아리 동기도, 갓 입학한 후배도 내색은 안했지만 그 애의 말 한마디에 기뻐했고 속상해했습니다. 그 애가 저를 좋아하는지 어떤지 알아보기 전에 교통정리를 해야한다는 생각이었어요. 동기와 후배를 불러다가 술 한잔 했죠. 여자 셋이서 남자 하나 두고 목맨다는게 우습잖아요. 우정으로 힘껏 밀어주기로 약속했죠. 그날 서로 눈물 찍 콧물 찍 그동안 맘 아팠던거 이야기 하면서 위로해주고 다독여주며 술을 마셨습니다.
술이 정말 술술~ 넘어갔고, 술기운을 빌어 저는 강력하게 그 아이를 포기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어요. 맘 아파도 너희들이 포기해라. 난 죽으면 죽었지 포기 못한다. 정말 애원했고, 화를 냈고, 여자로서 자존심 다 버리고 부탁했습니다. 결국 술김인지 어 떤지 동기와 후배는 포기한다고, 잘 되길 바란다고 이야기했어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이미 새벽동이 환하게 터오고 있었습니다.
"사귀자, 응? 나 너 진짜 좋아한단 말야, 우리 사귀면 안될까?" 여자는 자존심으로 먹고 사는데 저는 말마따라 간이고 쓸개고 다 빼고 매달렸습니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무수히 고백했고 그 아이가 가는 곳은 어디든 따라다녔어요. 정말 지겹게 사랑고백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계속 " 난 친구가 더 좋아, 우리 그냥 예전처럼 친구로 지내자." 하는 말만 해서 제 마음을 아프게 했어요.
그래도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요? 제 마음을 하늘이 알아줬습니다. 밤늦게 술한잔 먹고 음주운전(?) 하던 그 애가 덜컥 사고를 치고 만 것입니다.( 아, 음주운전이긴 했으나 자동차가 아니라 자전거였어요.) 얼마나 세게 벽에 부딪쳤는지 이마가 다 찟어져서 피가 나고 난리였어요. 저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그 애는 왠일인지 그 힘든 상황에 제일먼저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제가 울며불며 달려가보니 정말 피는 주룩주룩 흐르죠, 애는 술기운에 정신을 못차리죠,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택시타고 병원가서 진료받고 결국 입원까지 하게 되었어요. 그후로 일주일 정도 저에게는 꿈만 같은 날들이었습니다. 그 아이가 아퍼서 저 또한 맘이 아팠지만, 바로 옆에서 간호할 수 있다는게, 제가 도움을 줄 수 있다는게 너무 기뻤어요.
학교 수업도 무단으로 빼먹고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옆을 지켰습니다. 책도 읽어주고, 병원밥 맛없으니까 밖에서 통닭이나 김밥 사가지고 가서 먹여주었어요. 꼭 데이트 하는 기분이랄까요?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그 아이 옆자리를 지켰습니다. 학교 친구들이 병문안 오면 눈치를 있는대로 줘서 빨리 쫒아버렸지요.
그렇게 그 아이는 제 애인이되었어요. 이마 꿰매고 퇴원해서 저에게 사귀자고 이야기했거든요. 그날의 감동은 정말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닭살커플 많이 보셨겠지만 저희는 정말 왕닭살이었어요. 그 아이는 남자인데도 많이 수줍어했고 반면에 저는 와일드하게 애정공세를 했죠.
" 왜 이리 춥지, 좀 안아줘봐~ 여기 골목길 어두운데 뽀뽀나 할까?" 제가 눈도 깜짝 안하고 이런말을 하면 그 애는 " 엄마 걱정하셔, 빨리 들어가봐." 하는말로 제 마음을 아프게했습니다. 정말 돌부처가 따로 없었어요.
하지만 우린 행복했습니다. 인라인스케이트도 함께 타고, 수업도 맞춰서 같이 듣고 틈나는 대로 연애편지도 주고 받고.... 행복한 시간이 백일이 지나고 이백일이 지나고 결국 천일이 되었습니다. 이젠 설렘도 떨림도 없지만 서로가 서로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고 위해줍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복병을 만나게 되었네요. 그 애에게 마음을 고백한 여자가 있다고합니다.
저는 몰랐어요. 초등학교 동창들 만나서 재미있게 지내나보다 라는 생각만 했지, 초등학교 때 첫사랑을 그 애가 다시 만나리라는 생각은 미처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오래된 친구로 예전 이야기하고 술한잔 하면서 만남을 가졌는데, 점점 서로의 감정이 미묘해졌나 봅니다.
그 아이는 여전히 제게 잘 해줍니다. 전화도 매일 꼬박꼬박 하고, 함께 영화보며 데이트를 즐기고 주말이면 여전히 인라인스케이트를 타지요. 하지만 그 아이 맘 한구석에 작은 동요가 생겼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어요. 자꾸만 제가 아닌 다른 여자가 떠오르나 봅니다.
그 여자의 마음을 거절했다지만, 그 아이 맘 한구석엔 아쉬움이 자리하나봐요. 저만으로는 부족한 무언가가 있나봅니다.
요새 저는 심각하게 생각해요. 내가 먼저 그 아이를 놓아줘야 하는 걸까? 하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아이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하고 똑바로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묵묵히 그 아이 옆자리를 지키고, 다시 제게 온 마음이 열리길 바라고 있습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 언젠가 다시 그 아이 마음에 단 한 여자만이 존재할 날이 오겠지요.
지금 우리는 잠시 헤어져있는 상태입니다. 한달정도 서로 연락하지 말고 곰곰히 마음을 정리해보자고 이야기했습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결론이 내가 된다면 연락해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지만 저는 그저 기다릴뿐입니다. 훗날 지금의 헤어짐을 허허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게 되길 바랄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