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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1부 1막 : 묘령(昴靈)의 추억 #02)

J.B.G |2004.10.26 03:53
조회 375 |추천 0

 

 

제국력(帝國曆) 1315년 전장.

용마(庸馬)에서 풍양(豊洋)평야의 길목을 놓고 봉국(鳳國)과 수추국(秀鄒國)의 대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전쟁의 귀신’ 적령(赤靈)이 될 운명인 봉국(鳳國)의 장군 묘령(昴靈)이 있었다. 그녀는 전장의 최전선에서 기마대를 이끄는 젊은 장수였다.

 

장수 묘령은 은빛의 갑옷을 입고 흑발의 긴 머리를 흩날리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전장에 나온 장수가 아니라 검무대회에 나온 무희 같았다. 전장에서 점점 붉게 물들어 가는 그녀의 은빛 철갑은 적군에게는 정신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아득한 두려움을, 그리고 아군에게는 아름다움을 넘어선 경이로움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봉국(鳳國)의 황도 천산(天山).

묘령은 황제 유달(流達)에게 승전에 대한 보고를 하기 위해 남방대륙의 성지와도 같은 천산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묘령의 아버지인 제상 조위(朝爲)와 어머니인 대장군 호령(虎靈)을 비롯한 문, 무의 대신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승전하여 개선하는 장수 묘령과 그 휘하 장수 및 병사들을 각 지방의 제후에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진심으로 환대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환대를 바라보는 묘령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백성의 환호에도 여전히 투구를 벗지 않고 어두운 얼굴을 가린 채 손만 흔들고 있는 그녀에게 부장 요서위(要瑞爲)가 물었다.

 

“장군께서는 승전을 하고도 어찌 안색이 어두운 겁니까?”

“환호하고는 있지만… 모두 궁핍하지 않은가? 이들은…”

“그건, 아직 추수 때가 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지금은 엄동설한 이야… 추수 때가 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제 막 지났다고…”

“오랜 전쟁을 하려면, 비축한 식량이 필요한 법이 아닙니까? 지금은 고통을 참아내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도성의 귀족들은 지금 전쟁 중이라는 것 조차 모르겠지…”

“저희는 장수일 뿐 입니다. 정치는 뒤로 잠시 미루어 두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뒤로 미루라…”

“장수로서 본다면 묘령님은 생각이 너무 복잡합니다.”

“장군…”

“네”

“만약, 내가 지금… 황제를 무능하다고 한다면… 참수 감 인가?”

 

요서위는 묘령의 말을 농(弄)이라 생각하고 웃으며 받아 넘겼다.

 

“하! 하! 하… 행여 지금 가는 자리에서 그런 말씀은 삼가 해 주시죠.”

“훗… 자중하도록 노력해 보지…”

 

봉(鳳)의 황도인 천산(天山)에서는 승전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흘 동안이나 계속 되고 있었다. 그러나 전란 중에 열흘 동안이나 질펀하게 즐기는 귀족들의 승전 축하연회를 바라보는 묘령은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승전 축하 연회가 있는 내내 집안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제상 조위(朝爲)의 저택.

제상 위(爲)의 저택에서는 군의 수장(首將)들과 문신들이 모여서 집회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묘령(昴靈)과 어머니인 호령(虎靈)도 함께였다.

 

대장군 허조위(許操位)의 부장인 장군 사기(仕起)가 대륙의 지도를 펼쳐 놓고 전황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힘이 잔뜩 들어가서 자칫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러다 쉬는 것이 아닌가 불안감을 안겨주기까지 했다. 그렇듯 그의 사기는 충천해 있었다.

 

“묘령장군의 이번 용마(庸馬)전투 승전으로 해서 우리 봉국(鳳國)은 수추국(秀鄒國)의 남하를 또 다시 저지시킬 수 있었습니다. 또한 북서의 주요 거점을 확보함으로 해서 이제 북으로는 동에 위치한 천위국(天魏國)을 봉쇄하는 과제에 중점을 둘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의 용국, 동의 현국(炫國)과는 천강(天江)과 지강(地江)을 경계로 하고 있으므로 우선은 안심할 수 있으리라 판단 됩니다.

 

장수 사기(仕起)는 더욱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정체일 뿐 도약은 아니라고 판단 됩니다. 봉(鳳)이 도약하려면 결과적으로 수추국과 천위국을 복속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용국과 현국을 복속 시켜야만 합니다. 우리가 만약 수추국과 천위국을 복속시킬 수만 있다면, 운하와 육지 그리고 바다에서 동시에 용국이나 현국을 복속시킬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한참 동안 침묵한 채 장수 사기의 말을 듣던 묘령은 별안간 조소 섞인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사기장군께서는 너무 일방적이시군요.”

“응?”

 

묘령의 시큰둥한 반응에 힘을 주어 말하던 사기의 미간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그러자 대장군 허조위가 묘령의 의견을 대신했다.

 

“사기장군! 내 생각에는 우리가 삼면으로 공격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적도 역시 우리를 삼면으로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되네. 묘령장군의 말은 길은 열리겠지만… 절대로 한쪽으로만 열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네.”

“…”

 

묘령이 다시 말을 이었다.

 

“더구나 용국은 대장군 적청(赤靑)을 중심으로 그 힘이 실로 강대해 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용국이야말로 지금 아홉 나라로 찢어진 이 제국을 통일할 수 있는 강대한 잠재력을 지닌 국가라고 판단합니다.”

“그런…”

 

그곳에 모인 장수들과 중신들은 모두 묘령의 이 말에 다소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국이 아닌 타국이 천하를 통일할 것이라는 것은 사실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이었다. 좌중이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하자 제상 위가 굵고 낮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묘령을 제지했다.

 

“묘령장군은 말을 삼가 하시오.”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그 동안 침묵하던 대장군 호령이 말했다.

 

“우선은… 수추국을 복속시키기 보다는 봉인한 상태에서 전황을 유지하고, 천위국을 치는 것을 기점으로 동으로 군사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판단합니다.”

 

그렇게 군사회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깊어지고 있었다.

 

그날 밤.

대장군 호령은 딸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 들였다. 묘령은 어머니의 방에 들어서자 먼저 입을 열었다.

 

“제 발언을 책망하시려고 부르신 건가요?”

“네 판단은 옳다.”

“…”

 

묘령은 자신의 예측을 넘어서버린 어머니의 발언에 잠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호령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봉(鳳)의 백성이다. 비록 봉이 그 힘이 강대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나라를 강대하게 일으켜야만 한다. 그래서 이 제국을 하루 빨리 통일해야만 하는 사명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머니인 대장군 호령의 위엄 있는 말에도 묘령은 실소를 비치며 말했다.

 

“어머니… 이 전쟁을 빨리 끝내는 길은 모든 제후국의 왕들이 자신의 욕심을 포기하면 될 일 입니다.”

“…”

 

딸의 대답에 호령은 적잖이 노기를 발하고 있었다.

 

“너는 봉(鳳)의 장수이다. 제상인 아버지로부터 지혜를 배웠고, 이 어미의 스승인 이성강(李星江)장군에게서 무예를 배웠다. 우리는 네가 시대를 짊어질 영웅의 자질을 타고난 것을 안 이후부터 네가 제국의 미래를 일으켜주기를 바라면서 너를 가르쳤다. 그리고 너는 그 기대에 부응해 이렇게 잘 자라주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가장 중요한 것이 빠진 것 같구나…”

 

그러나 지금 묘령은 어머니의 말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다.

 

“야망… 말인가요?”

“…”

 

두 모녀는 잠시 침묵했다. 그렇게 침묵한 채 한참 동안 어머니가 말이 없자 묘령이 되물었다.

 

“시대를 짊어질 영웅이라… 헌데, 어머니… 그런 발언은 반역이 아니었던가요? 부모님께서는 시대를 짊어질 영웅으로서 봉의 황제를 주인으로 택한 것이 아니었던가요?”

“…”

“정말로 이상하군요. 이상해… 어머니는 스승님과 같은 말씀을 하시면서… 왜 스승님을 참수하셔야 했죠?”

 

딸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이미 크게 당황한 호령은 대답을 회피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지난 이야기는 왜 하는 것이냐?”

“전… 전쟁에서 승전하는 장군 이성강이 아니라… 그분의 12검무를 보고 무예에 반했어요. 제가 검에 심취한 것은 절대로 사람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어요. 절대로…”

“…”

“스승님의 검은 항상 태양에 빛났죠. 저는 그분의 물을 먹인 한낱 천 조각으로 바위를 쪼개는 부드러운 강함에 반했어요… 그런데, 막상 제가 그 검무를 전장에서 했을 때는… 제 검은 곧 피로 물들어 빛나지 않았고, 제 천은 가볍게 날지 못하고 땅에 피를 뿌리며 추락하고 말았어요. 바위를 쪼개는 대신 병사의 머리를 쪼갰죠…”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냐?”

“모르겠어요… 저도… 그냥, 스승님의 가르침이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되어요. 그래서 묻고 싶었어요. 스승님께… 그분의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 그런데 제가 다시 스승님을 찾았을 때, 그분은… 이미 반역죄로 참수를 명 받은 상태였죠.”

“…스승님의 참수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인내가 부족하셨어…”

“인내라… 마지막 날에 뵌 스승님께서는… 제게 검을 백성을 지키는데 쓰라고 하셨어요. 그분은 이 전쟁을 빨리 종식시키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가장 강대한 용(龍)에게 힘을 빌려주기로 하셨다고…”

“그것이 바로 반역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미처 자신의 힘을 빌려주기도 전에 자신의 제자에게 포박되어 참수를 기다리고 계셨죠”

“…스승님께서는… 용(龍)이 그 기세가 커지는 것을 보고 용(龍)국에 희망을 보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분은 본래 너에게 희망을 거셨었다. 네가 태어나자 너에게서 영웅의 기재를 보았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분은 어찌해서 네가 성장할 때 까지 기다리지 못하신 건지…”

“…스승님께서는 제게 미안하다고 하셨어요. 제가 성장할 때까지 피를 흘릴 백성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다고…”

“어리석긴… 용(龍)의 영웅은 이제 곧 질것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묘령은 물었다. 그리 생각하는 연유를…

 

“어찌… 그리 생각하시죠?”

“한 나라에 두 태양은 있을 수 없다. 용의 황제는 이미 열로 하다. 그리고 양위를 받을 태자는 자신의 신하보다 미흡하다. 그렇다면, 용의 황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긴 침묵…

두 사람은 그 말의 의미를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어쩌실 생각이죠?”

“무엇을 말이야?”

“때가 되어… 스승님의 예언대로 제가 영웅의 반열에 섰을 때… 말이에요.”

“무엇을 알고 싶은 거냐?”

“아무것도…”

“넌 폐하에 대한 신의를 지키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네 스승이나 미래의 용의 영웅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다.”

“전… 백성에 대한 신의를 지킬 겁니다. 하지만 황제에 대한 충의는 없습니다.”

 

순간, 호령은 딸의 따귀를 때렸다.

 

“닥치지 못하겠느냐! 만약, 여기가 군부였다면, 난 네 목을 쳤을 것이다.”

“연극은 그만 두세요”

“뭣이?”

 

두 모녀는 그렇게 대치한 채 감정의 접점을 전혀 찾지 못하고 있었다. 서로에 대한 기대와 원망으로 갈등의 골이 깊어져만 가고 있을 때 묘령의 아버지인 제상 위가 방에 들어왔다.

 

“령아… 너는 그만 네 방으로 가거라…”

“…”

 

묘령은 부모님과의 좁혀지지 않는 감정을 극복하지 못한 채…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방을 나섰다.

 

“너무 밀어붙이면 아이가 삐뚤어 지고 말 거요.”

“저 아이… 저러다가는 용의 영웅처럼 피기도 전에 지고 말 겁니다.”

“운명을 믿어 봅시다. 저 아이가 진정 영웅이라면… 이겨낼 겁니다.”

“령아…”

 

딸의 위태한 모습을 어찌해 보지 못하는 호령은 그만 남편 앞에서만은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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