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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

'정연'이란 여자를 만나 그에 대한 오해를 깨달은 그 다음 날에도 헤어진... 아니, 사랑했던
그에 대한 상념들로 도무지 업무에 집중할 수 없었다.
문서 하나를 작성해도 곳곳이 오자(誤字)들이 난무했고, 사무장이나 담당 변호사가 나를 부
르는 것조차 모를 정도였다.
그래도 할 수 없이 내가 해야하는 업무이기에 울며 겨자 먹기 식이었다.
그러다 과다한 업무만을 남긴 채 어느덧 오후 6시... 퇴근시간을 맞이했다.
평소라면 야근까지 하며 할 일을 다 처리하겠지만, 그렇게 한들 오늘은 별 도움이 되지 못
할 듯 했다.
이미 부산하게 퇴근을 준비하는 다른 직원들처럼 나도 하던 일을 접어두고는 책상에 놓여
있는 다이어리와 휴대폰을 주섬주섬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유진 언니는 이미 퇴근준비를 마쳤는지 가방 끈을 어깨에 걸치며 말했다.
"이 언니는 먼저 간다."
집이 같은 방향이라 항상 퇴근도 같이 했는데 먼저 간다는 말에 모호한 생각도 잠시 유진
언니는 나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오늘 김 변호사님과 데이트 잘하고 좋은 시간 가져, 알았지?"
데이트...?!
어머...!
깜박 잊고 있었다.
평소엔 내가 좋던 싫던 한 번 정해진 약속에는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는데 유진 언니가 아
니었으면 하마터면 그냥 집으로 직행했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긴 하나 솔직히 그냥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가서 씻고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
했다.
그보다 그만큼 사랑했던 그에 대한 상념이 나의 머리... 가슴까지도 채워져 날 이리도 혼란
스럽게 만든 만큼 그렇게 큰 것일까...?
어쨌든 유진 언니는 내게 인사하고는 먼저 사무실을 벗어났고 나도 이제 막 가방을 다 챙길
찰나에 김 변호사가 다가왔다.
그는 오늘도 언제나 처럼 말쑥하고 고급스런 차림새였지만, 오늘따라 진한 향수냄새가 전해
져 왔다.
이미 다른 직원들은 사무실에서 빠져나가 엘리베이터에도 단 둘만이 올랐다.
그는 내가 자기와 단 둘이 있다는 사실이 불편하다는 것을 눈치라도 챘는지 이런저런... 또
는 그다지 우습지 않은 얘기들로 주차장에 있는 그의 차에서는 물론 공연장으로 향하는 동
안에도 계속 이어졌다.
물론 그의 그런 배려에 정말 고맙긴 하지만, 단지 그 뿐이며 그에게 미안하지만, 지금 심정
에는 그의 얘기가 귀에 제대로 들려올 리가 없었다.
여전히 사랑했던 그에 대한 괜한 상념만이 여전히 혼란스럽게 만들뿐이었다.
이미 헤어졌고, 그에 대한 오해도 풀렸으니 최소한 난 정말 좋은 남자랑 연애를 했다는 좋
은 추억만을 지닌 것만으로 더 이상의 미련도 없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내가 그를 오해했던 그 사실에 대한 잘못과 그가 내게 준 사랑보다 내가 그에게 준
한 없이 모자란 사랑에 더욱 후회하고 아프기만 했다.
그러다 이제는 왜 내가 오해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는지...? 서로 그렇게 좋아하고 사랑했는
데 정작 나에 대한 본인 자신의 사랑은 왜 그렇게나 자신이 없어 자기 스스로 상처입고 나
로 인해 또 다시 상처받으면서까지 나를 붙드는 척하며 떠나보내야 했는지 다시 원망스럽기
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 또한 아주 잠시일 뿐이었다.
그저 그런 후회와 원망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계속 되니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뮤지컬이
내 눈앞에서 매력적인 노래와 율동들이 비추어진다 한들 어떠한 감성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 그렇게 두 시간을 보냈다.
당연히 그 뮤지컬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
반면 나와는 달리 김 변호사는 정말 재미있게 감상이라도 한 듯 붐벼대는 공연장을 나서면
서까지 그 뮤지컬에 대해 말했다.
물론 난 그의 말에 공감하는 척 가끔 고개만 끄덕이며 은근슬쩍 웃음으로 넘겼다.
이젠 뮤지컬도 관람했으니 그만 집에 갔으면 좋겠건만, 김 변호사는 배고프지 않느냐면서
이미 근사한 레스토랑에 예약했다며 같이 저녁을 하자고 했다.
평소라면 아직 저녁도 안 먹었으니 허기가 지는 것은 당연했지만, 오늘 하루동안 다른 곳에
정신을 쏟았더니만, 허기가 지기는커녕 그다지 입맛조차 없었다.
그러나 이미 예약도 했고 이젠 나의 의견은 무시...? 아니면 나의 성격이 우유부단하다는 것
쯤은 이미 알았는지 김 변호사의 차는 이미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내가 김 변호사와 도착한 곳은 어느 고급호텔에 위치하고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몇 번 TV나 잡지에서나 보아왔던 곳이기에 너무 좋다는 생각보다는 얼떨떨한 생각이 더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김 변호사는 여기에 자주 오기라고 하는지 약간의 연륜이 있어 보이는 한 지배인과
다정한 인사를 나누곤 야경이 훤히 보이는 어느 창가자리로 안내 받고 이어 메뉴판까지 건
네 받고는 무작정 메뉴판을 펼쳐 보았다.
거기엔 불어, 이태리어와 함께 한국어도 조그맣게 나마 표기되어 있다지만, 대부분 낯선 이
름의 요리들뿐이었다.
이번에도 김 변호사는 내가 이런 곳엔 너무나 낯설다는 것을 알았을까?
그가 말했다.
"여기는 양고기가 좋은데... 어때요?"
"네..."
내 대답은 그게 고작이었다.
연이어 그가 다시 말했다.
"우리 와인도 해요."
"저야 괜찮지만... 김 변호사님은 운전하셔야 되잖아요."
"와인 몇 잔 정도는 괜찮아요."
"그래도 명색에 변호사신데 한치라도 법을 어기시면 안되죠."
난 그다지 우스운 얘기를 하지 않았는데 김 변호사는 불현듯 웃어됐다.
"하하하!!! 이거 크게 한 방 먹은 걸요."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순간 나도 조금이나마 웃음이 나버렸다.
그러자 김 변호사가 좀 전의 호탕한 웃음은 온데간데없고 약간의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이제야 제대로 웃는 것 같네요. 좀 전까지만 해도 애써 웃으려는 것 같았는데... 혹시 어제
나 오늘 무슨 일이라고 있어요?"
"네?!"
나도 모르게 그의 물음에 당혹스럽게 반문했다.
김 변호사의 말은 계속됐다.
"어제 오후부터 오늘까지 업무시간 내내 허둥대거나 멍하니 있는 모습이 자꾸 보이더군요.
평소답지 않게..."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선 사과부터 했다.
"죄송해요..."
나의 사과에 김 변호사는 나보다 더 당혹스런 표정이었다.
"오해하지는 말아요. 질책하려고 한 말은 아니니깐. 다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걱
정스럽고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도와주고 싶을 뿐이에요."
"김 변호사님의 마음은 충분히 알겠지만, 그냥 제 개인적인 일이에요."
다소 내 말투가 김 변호사에게 차가운 인상을 줄 수도 있겠지만, 유진 언니처럼 직장에서
편히 대할 수 있는 상대도 아니거니와 더구나 내게 마음 있는 김 변호사... '김영찬'이라는
남자에게 내 심정을 말하고 싶지 않았고,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 때문인지 서로에 대한 약간의 어색함과 함께 그리 편하지 않은 저녁을 마치고, 호텔 정
문을 통하여 나오자 이미 김 변호사의 고급스런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당연히 운전석에 탔지만, 더 이상 이런 어색함과 불편함에 견딜 수 없는 나머지 난 타
지 않았다.
그러자 보조석의 창이 열리며 그가 내다보며 말했다.
"어서 안타고 뭐해요?"
"여기에서 집도 그리 멀지 않은데 그냥 택시 타고 갈게요."
"그건 여자에 대한 에티켓은 아니죠. 어서 빨리 타기나 해요."
그는 팔을 뻗어가면서까지 보조석의 차문을 열었다.
난 이번에도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한 채 다시 차에 올랐다.
이내 차는 출발했고, 김 변호사는 마치 우리 집이 어디인지 아는 마냥 익숙한 도로로 주행
했다.
그런데 좀 전까지만 해도 내가 자신에게 느끼는 어색함이나 불편함을 지워보고자 쉴 새 없
이 떠들어 됐던 사람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갑작스런 그의 반응에 좀 의아한 점도 있지만, 오히려 그다지 흥미가 없는 그의 얘기에 호
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다행이었다.
그래서 멍하니 차창 밖으로 먼발치에 있는 하늘만 바라봤다.
곧 소나기라도 퍼부으려는 심상인지 평소 밤하늘의 어두움보다 더 탁하고 짙었다.
어느새 김 변호사의 차는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 105동과 근접한 주차장에
이르렀다.
내가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리자 마지막까지 여자에 대한 남자로서의 에티켓을 챙겨주
려는지 김 변호사도 서둘러 안전벨트를 풀고는 차에서 내렸다.
난 가벼운 목례를 했다.
"김 변호사님, 이렇게 바래다 주셔서 고마워요. 그리고 뮤지컬도 잘 봤어요."
"아뇨, 오히려 저야말로 간만에 좋은 시간 가졌어요. 고맙단 인사는 내가 해야되는 걸요."
"네... 그럼 어서 돌아가세요. 저 때문에 많은 시간을 지체하신 것 같아 죄송하네요."
난 다시 짧은 목례를 하고 또 다시 엄습해오려는 어색함에 얼른 등을 돌리고 105동 현관으
로 바삐 걸음 했다.
"잠깐만요!"
김 변호사가 불렀다.
난 자연스레 그의 부름에 고개가 돌아갔다.
김 변호사는 얼른 자신의 차 트렁크를 열더니 부시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를 등뒤로
감추고는 내게 달려오듯 다가왔다.
평소보다 짙은 어둠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알아내기도 전에 문득 꽃다발을 내게 내보였다.
빨간 색의 꽃이었다.
그렇다고 흔한 장미꽃은 아니었다.
이미 엄습해온 어색함과 불편함에 주춤할 순간 김 변호사의 비록 나직하지만, 강경한 목소
리가 들여왔다.
"빨간 색의 아네모네의 꽃말이 뭔지 알아요?"
그 꽃 이름은 한 번쯤 스쳐 들었다지만, 보기는 처음이었으니 꽃말조차 알 리가 없었다.
그저 고개를 절래 흔들었다.
"비너스를 바라만보다 허무하게 죽어버린 아도니스처럼 좀 더 당신에게 내 본심을... 당신에
게 향한 내 사랑을 적극적으로 털어놓지 않는다면 다른 남자에게 당신을 뺏길 것 같아요.
그래서 내가 먼저 이렇게 용기를 내어 당신에게 고백하는 거예요. 이 꽃의 꽃말처럼 당신만
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 꽃다발을 내게 내밀었다.
이미 나에 대한 김 변호사의 마음은 알고 있었지만, '사랑'이라는 말을 담으면서까지 내게
마음을 전하려는 그의 고백에 당혹스러웠다.
이내 나의 머릿속은 하얀 백지장 처럼 비워졌고, 잠시 어떠한 미동도...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이 고개만 떨구었다.
그러자 여전히 그가 내게 내밀고 있는 빨간 아네모네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문득 지난날의 어느 추억 하나가 조금씩 백지장 같은 나의 머릿속에 서서히 그려지
기 시작했다.
어느 따스한 5월의 어느 날, 한 남자가 내게 다가와 보기와는 달리 무척 쑥스러운 모습으
로... 게다가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좋아하는 프리지어 꽃다발을 들고 다가왔다.
그리고 약간의 떨림이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그 동안 이 프리지어 꽃처럼 청초한 너를 혼자 바라만 보고... 혼자 사랑해왔어. 하지
만 이제라도... 비록 많이 부족한 나일지라도... 떳떳하게 널 사랑하고 싶고 나도 떳떳하게 사
랑 받고 싶은데... 그러면 안되겠니...?」
그 남자는 바보같이 몰랐다.
사실 나도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고 사랑했다는 것을...
그가 흔적 없이 날 사랑하듯 나 역시 그랬다는 것을...
순간 울컥거리는 마음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사랑했던 그와 나는 이미 헤어져 단지 추억 속의 인연(因緣)이며 우연(偶然)과 기적(奇蹟)만
이 사랑했던 그와 나의... 우리의 재회(再會)를 허락할 것이다.
그리고 진정 서로의 다음 사랑과의 행복을 기원하며 그렇게 자신만의 추억 속에 영원히 묻
어둬야 한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내게 있어 너무나 과분한 한 남자가 내게 마음을 표하며 이렇게 고
백하는데 왜 나는 사랑했던 과거의 그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것일까...?
그의 모습이... 그의 목소리가 자꾸만 눈에 선해지고 귓가에 맴돌았다.
그러다 그런 감정을 추스를 틈도 없이 나의 눈에선 한 줄기의 눈물이 흘러 내렸다.
김 변호사는 갑작스런 나의 눈물에 몹시 난처한 표정이었다.
난 얼른 손가락으로 눈물을 흘기며 그의 고백에 답했다.
"김 변호사 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이란 건 잘 알아요. 하지만... 죄송해요. 죄송하단 말밖에
드릴 수 없네요. 이미 늦었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도 없겠지만, 그래도 이제서야 깨달았
어요. 진정으로 사랑하고픈...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저 먼저 갈게요..."
단 일초라도 그 자리에서 벗어나야 했다.
나 같이 모자란 여자에게 거절당한 김 변호사의 처연한 모습도 보기 싫거니와 그에 대한 죄
스러움만이 늘어나는 것이 두려웠다.
이런 나의 마음을 하늘은 아는 것일까?
마치 갑자기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는지 소나기가 억세게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난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105동 현관에 들어서 위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버
튼을 누르고는 엘리베이터와 마주하는 벽에 잠시 몸을 기댔다.
그리고 아주 잠깐이지만 비에 젖은 머리카락 아래로 빗물이 뚝뚝 떨어졌고, 아직도 글썽거
리는 눈시울을 여전히 흘기고 있을 때였다.
그때 가방에 넣어둔 휴대폰의 벨소리가 들여왔다.
훌쩍거리며 가방을 열고 휴대폰을 꺼내자 외부 LCD화면에는 그냥 일반전화인 듯한 번호가
나타났다.
누구지...?
그래도 우선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말했다.
"여보세요...?"
여전히 정적만 흐를 뿐이었다.
그러다 '뚜뚜 '거리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일순 나의 망상이 시작되었다.
혹시 금방 온 전화가 사랑했던 그의 전화가 아니었을까?
물론 이런 망상의 끝엔 허탈감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희박한 생각이나마 하고
싶었다.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가 내게 전화를 걸어 말해줬으면 좋겠다.
다시, 사랑하고 싶다고...!
아니면 내 휴대폰엔 남아있지 않지만, 아직까지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그의 전화번호로 전
화라도 해볼까?
그래서 이번엔 내가 먼저 말해볼까?
다시, 사랑하고 싶다고...!
그렇게...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He...]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 6시 반이면 마구 울려대는 알람소리에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눈꺼풀
을 비벼대고 깊은 하품까지 동반에서야 겨우 일어났다.
그런데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새벽하늘의 푸른빛이라도 방안을 약간이라도 밝혀주었는데 지
금은 방안이 온통 어둑했다.
난 온전하게 일어나 창문을 열어 창밖으로 목을 길게 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씨는 그리 싸늘하지는 않다만, 한바탕 비라도 곧 쏟아 내리려는 심상인지 흐리고 짙은 구
름이 넓게 깔려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학원 갈 때 우산을 챙겼지만, 다행스레 학원에 도착해서도 흐린 날씨만
지속될 뿐, 비는 내리지 않았다.
난 그다지 비를 좋아하지 않는 터라 오늘 같이 비가 올 기미가 있는 날에는 그다지 기분도
좋지 않을뿐더러 집에 머물고 싶은 심정만 간절할 뿐이었다.
그래도 다시 '불합격'이란 멍에를 짊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런 심정 따윈 미련 없이 버려
두고 수업에 열중해야 했으며 그렇게 했다.
그런데 나의 이런 결심도 몰라주는 야속한 휴대폰이 외투 주머니에서 마구 진동했다.
그렇다고 받을 상황은 아니었다.
강의실에 수강생들이 많다보니 내 자리 주위 역시 여러 수강생들로 둘러싸여 섣불리 나갈
수도 없었다.
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자칫 다른 수강생들에게 불편을 줄 수도 있으니 계속 되는 휴대
폰의 진동을 외면했다.
그러다 1분쯤 지났을까?
더 이상의 진동은 없었다.
누가 전화했는지 궁금한 나머지 슬며시 휴대폰을 꺼내어 착신이력을 보았다.
「032-743-3749」
지역번호로 보아하니 인천인 듯 했지만 인천엔 지인(知人)조차 없으니 부득이하게 걸려올
전화는 없었다.
그냥 심드렁하게 휴대폰 폴더를 덮어 다시 외투에 집어넣고자 했다.
그때 짧은 진동과 함께 음성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착신번호로 보니 좀 전에 전화가 왔던 번호와 일치했다.
하지만 문자메시지도 아니고 지금 당장은 확인도 할 수도 없으니 잠시 참기로 했다.
그렇게 2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수업이 끝났고 다음 수업을 위해 책상에 널브러진 책과 필기
류를 대충 챙기고는 많은 수강생들 속에 섞여 그곳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좀 전에 도착한 음성메시지를 확인했다.
처음엔 잠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더니 어느 낯익은 목소리가 조그맣게 들여왔다.
「나야...」
정연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잠시 정연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새 나는 다음 수업이 있는 강의실로 들어와 어느 자리에 앉을 무렵에서야 다시 정연의 목
소리가 들여왔다.
「많이 시끄럽지...? 지금 여기 공항이야... 너는 내가 내일 떠나는 줄 알겠지만, 사실... 오늘
오후 1시 15분 비행기로 떠나게 됐어.」
갑작스런 정연의 말에 난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느닷없이 떠나 버린다니...?!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시계바늘은 막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가방을 둘러메고 강의실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거의 뛰다시피 학원에서 나와 택시를 잡았다.
"인천국제공항으로 가주세요! 급하니깐 빨리 가주세요!"
나의 재촉에 택시기사는 서둘러 출발했고 내 마음은 더욱 더 급해져만 갔다.
하지만 정연의 느긋한 목소리는 계속 되었다.
「네가 지금 공항으로 온다고 해도 날 만날 수는 없을 거야. 그래서 일부러 네 학원수업시
간에 맞춰서 전화했으니깐. 물론 다른 친구들은 오늘 내가 떠난다는 것을 알기에 어제 작별
인사를 나누었어. 너에게도 작별인사를 했어야 했는데...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더라. 널 보
고 작별인사를 한다면 나... 차마 아직은 너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기에 너무 슬
플 것 같아. 」
이어 정연의 목소리는 애써 울음을 삼키려는 듯 했다.
그래도 정연의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이제야 너한테 하는 말이지만... 사실 나, 얼마 전에 그 애를 만났어. 네가 그렇게나 사랑
했고 지금도 잊지 못해 사랑하는 그 애 말이야. 그리고 너에 대한 오해와 너의 진심도 말했
어. 이제 동전도 떨어지고 녹음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말할게. 그래, 난 솔직히 그
애가 어떤 여자인지는 몰라. 하지만 예전의 네 말을 들으면 정말 좋은 여자라고 생각해. 그
리고 너에 대한 오해가 풀어져서일까? 너도 알다시피 내가 눈치 하나는 빠르잖아. 하여튼
그 애도 네가 그 사람을 못 잊듯 널 잊지 못하고 있는 것 같더라. 아니, 어쩌면 그 사람도
너처럼 잊은 척을 했을지도 몰라. 그리고 내 생각에는 지금쯤 그 사람은 너에 대한 오해가
풀어짐으로써 너에 대한 진심을 다시 알게 됐을 것이라고 생각해. 게다가 그 애 역시 네가
돌아와 주길... 다시, 사랑하고 사랑해주길 원하고 있을 거야. 어쩌면 이게 기회인지도 몰라.
정말 그 사람이 네 사랑이라면 더 이상 바보같이 가슴 아파하지 말고 자신의 사랑에 초라해
지지 말고 용기 내어 말해봐. 다시, 사랑한다고...! 다시, 사랑하자고...!」
그것을 끝으로 정연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지갑에 있는 돈을 택시 요금으로 거의 다 지불하고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막 오후 1시 반을
넘기고 있었다.
그래도 서둘러 안내 표지판이나 안내원들에게 물어물어 영국으로 출국하는 게이트에 달했지
만, 이미 굳게 닫힌 상태였다.
이미 예상은 했지만 이어진 허탈감을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등을 돌렸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괜한 미련에 다시 슬쩍 등을 돌려봤지만, 여전히 굳게 닫친 출국게이트
만이 나의 허탈감을 더했다.
정말 떠나버렸다.
작별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게다가 뻔히 나를 향한 정연의 마음을... 그리고 사랑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나의 이기적인
사랑에 정작 정연의 마음은 묵인했던 나의 지난 행동들이 이렇게 원망스러울 줄은 몰랐다.
정연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부디 주지 못하더라도 좋은 친구로서 좋은 모습으로 좋은 추억이
라도 만들어 줬으면 좋았을 텐데... 연이어 아쉬운 후회와 함께 공항에서 나왔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후 2시였다.
지금 시간으로 보아선 이미 끝나버린 학원수업을 수강한다는 것은 어려운 실정이었으니 느
긋하게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곧장 헬스클럽에서 운동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다 독서실
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학원수업을 제외하곤 평소의 계획대로 잘 실행하고 있지만, 운동도 그렇고 공부도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끝내 작별인사는 물론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떠나버린 정연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서 아른거
렸다.
또한 정연이 남긴 음성메시지 때문일까?
정연에 대한 아쉬운 후회 속에 문득 사랑했던 그녀의 모습까지 떠오를 뿐이었다.
책상에 책을 펴놓고 앉아있다지만 이런 복잡한 상념으론 그저 시간만 죽이는 듯 했으니 오
히려 오늘은 일찍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상책일 듯 했다.
결국 1시간도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채 독서실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다.
이미 밖엔 해가 진지 오래였고 곧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짙은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
어 달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제 막 떠올랐지만, 그러고 보니 집에서 독서실에 온다고 가방을 다시 챙기는 바람에 그만
우산을 두고 오고 말았다.
행여나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운 나쁘게 비라도 맞을세라 나의 걸음을 바빠졌다.
그런데 오늘은 나의 기분이나 운 따윈 그다지 좋지 않았기에 이내 굵은 빗방울들이 툭툭 떨
어지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빨리 뛰어도 보지만, 그 굵은 빗줄기는 금세 나의 옷가지까지 파고들어 나의 살갗을 적셨다.
우선 비를 잠시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에 급히 주위를 둘러보니 마침 공중전화박스가
보였다.
난 재빨리 그곳으로 뛰어 들어가 하늘을 치켜 올려봤지만, 굵은 빗줄기는 멈출 기색이 없는
듯 했다.
급하게나마 아직도 버리지 못한 버릇으로 챙겨버린 손수건으로 대충 머리와 얼굴을 닦아냈
는데 무심코 수납장에서 가져온 손수건이었지만, 사랑했던 그녀가 선물해준 것이었다.
그보다 그녀는 억세게 내리든... 부슬부슬 내리든... 비를 참 좋아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날이면 나랑 한 우산을 나란히 쓰고 괜스레 돌아다니길 좋아했고, 지
금처럼 억세게 비가 내리는 날이면 어느 카페 창가자리에 앉아 따뜻한 코코아를 앞에 두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렇다고 내가 심심하지는 않았다.
그냥 그녀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내게 행복이었으며 사랑이었다.
좀 전에 손수건으로 머리와 얼굴을 닦아냈더니 금세 눅눅해진 바람에 다시 손수건을 주머니
에 넣었다.
그런데 손수건을 꺼냈을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에서야 동전 하나가 손에 잡혔다.
꺼내어 보니 100원짜리 동전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 눈에 공중전화가 들어왔다.
연이어 정연이 남긴 음성메시지가 떠올랐다.
정말 정연의 말대로 그녀는 날 그리워하고 날 다시 사랑하기 원할까?
아니면 내가 다시 사랑하자고 말하길 원하는 것일까?
어쩌면 언제나처럼 정연이 내겐 해준 위로나 격려의 말일 수도 있는데 자꾸만 정연이 남긴
말에 솔깃해졌다.
그래, 난 아직도 바보같이 '사랑의 기적'을 내심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쓸데없는 기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어찌됐건 동전투입구에 100월을 넣었고
이내 수화기에서 "뚜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정연의 말대로 용기 내어 전화로나마 다시, 사랑한다고 말할까?
하지만 금세 그것은 나의 지나친 욕심이었다.
게다가 그런 무모한 용기를 낼 재간도 내겐 없었다.
그냥 목소리라도 듣는 것으로 나의 감정의 욕구를 채울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번호 버튼을 누를 정도의 용기정도는 있는 나머지 아직도 내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은 그녀의 연락처를 막힘없이 눌렀다.
몇 번의 통화 연결음이 울리더니...
"여보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그런데 목소리가 잠긴 듯 했다.
어디가 아픈 것일까?
감기라도 걸린 것은 아닌지...
항상 이맘때면 감기를 달고 다니다시피 했는데...
그렇다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그럴 용기도 배짱도 없었고 그것이 갑자기 생겨지지도 않는 것이기에...
"여보세요...?"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들여왔을 땐 긴 한숨과 함께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렇게 세차게 내리붓던 빗줄기도 어느덧 멈췄고 하늘을 잔뜩 뒤덮던 짙은 먹구름도 점점
사라져 최소한 달의 윤곽정도는 나타났다.
난 다시 집으로 향했다.
여전히 정연에 대한 아쉬운 후회와 함께 사랑했던 그녀를 향한 미련만을 잔뜩 껴안은 채 용
기도 없으면서 터무니없는 망설임만이 맴돌았다.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