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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

4월 중순에 접어들자 하루하루가 화창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따사로운 햇살아래 거리의 가로수는 파릇파릇한 잎들로 치장했으며 사람들의 옷차림도 가볍
고 화사하며 얼굴에는 생기가 맴돌았다.
하지만 그것은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모습일 뿐이었다.
오늘은 여전히 화창하기만 한 날씨에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이젠 차갑기보다 답답하기만
한 콘크리트 건물의 사무실에 눌러앉아 업무만 봐야 했다.
물론 주어진 업무만을 겨우겨우 처리한다지만, 여전히 내 머릿속엔 사랑했던 그에 대한 상
념들로... 그를 향한 사랑이 미련한 미련으로 가득할 뿐이었다.
그래도 다행스레 며칠 전처럼 사랑했던 그에 대해 너무 골몰한 나머지 업무에 지장을 줄 정
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또 다른 하나의 고민이 생겨 버렸으니 바로 김 변호사와의 일이었다.
김 변호사의 진심 어린 고백을 내 나름대로는 정중하게 거절했다고 생각하지만, '거절'이란
그 결과는 김 변호사와의 관계를 더욱 어색하고 불편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다행히 내가 담당하는 변호사가 아니었으니 그다지 마주칠 일은 많지는 않았지만, 행여나
어쩔 수 없이 마주칠 때면 서로 어쩔 줄 몰라 어색한 인사말만이 오갈 뿐이었다.
그리고 유진 언니가 김 변호사와 나의 일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묻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예상하고 눈치 챘는지 김 변호사에 대한 아주 공적인 사실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 왜 김 변호사 같은 남자를 마다하는지 짓궂게 추궁이라도 할까봐 내심 걱정하긴 했다.
그때 내가 담당하고 있는 최 변호사의 부름이 떨어졌다.
"이력서를 보니깐 C대학을 졸업했더군요, 법학을 전공하고. 그럼 신 교수님을 아시겠어요?"
"그리 두터운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졸업논문 때문에 몇 번 찾아 뵙긴 했습니다."
"그럼 잘됐군요. 다름이 아니라 신 교수님이 제 대학 선밴데 이번 재판에 관련한 사례 및
판례 등의 자료를 부탁했거든요. 그런데 좀 있다 의뢰인과의 갑작스레 약속 때문에 그런데
대신 좀 가져다 줄래요? 뭐, 당장은 필요 없는 거니깐 건네 받으면 회사로 돌아오지 말고
바로 퇴근하세요. 다음주 월요일에 꼭 챙겨오면 되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최 변호사님."
다시 최 변호사의 개인 사무실에서 나와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자 한참 다음주 김 변호사의 재판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던 유
진 언니가 의아해하며 말했다.
"어디가?"
"최 변호사님 심부름 때문에... 일보고 바로 퇴근하래."
"정말? 좋겠다. 난 내일이라도 마음껏 쉬려면 오늘 오후 늦게까지 다 정리해야 하는데 부럽
다, 부러워."
"그럼 수고하고 다음 주에 봐."
"응, 주말 잘 보내고..."
유진 언니의 투정 어린 말투를 뒤로한 채 다른 직원들과도 짧은 인사를 나누곤 사무실에서
나왔다.
우선 여기에서 C대학교에 가려면 토요일이고 하니 버스보다는 지하철로 가는 것이 더 편하
고 빠를 것 같기에 대략 10분 거리에 있는 인근 지하철역으로 막 향할 찰나였다.
그때 뒤에서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들려왔으니 고개를 돌리자 김 변호사였다.
"어디 가요?"
"최 변호사님의 심부름 때문에 C대학에 가요."
"보아하니 지하철역으로 가는 것 같은데 저도 그곳을 지나야 할 참인데 잘 됐어요. 지하철
역까지라도 태워드릴게요. 어서 타요."
순간 그의 말에 거절할까 했지만, 한 직장에 다니는 이상 어색하고 불편한 이유로 계속 피
해 다닐 수도 없는 상황이기에 막무가내로 김 변호사의 차에 탔다.
하지만 이내 나의 그런 선택에 후회가 들었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동안 말은커녕 굳게 입을 다문 채 운전에만 몰두했다.
그렇다고 이 어색함에서 벗어나고자 내가 먼저 말을 건넬 수도 없을뿐더러 아무리 생각해보
지만, 도무지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이런저런 생각 때문이었는지 어느새 지하철역에 다다랐다.
"고마워요, 김 변호사님."
안전벨트를 풀고 막 차 문을 열 순간이었다.
"잠깐 기다려요...!"
갑자기 김 변호사가 나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런 행동에 흠칫 놀라자 김 변호사는 얼른 내 팔을 놓고는 말했다.
"갑자기 미안해요. 하지만 할 얘기가 있어요. 5분 안에 끝낼게요."
난 김 변호사의 말에 그저 고개만 끄덕이자 잠깐 미소를 보이곤 말했다.
"고마워요. 그런데 말하기 전에 꼭 하나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말씀해 보세요."
"그 날 밤에 이런 말을 했죠? 진정으로 사랑하고픈 사람이 있다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
람이 있다고 말이에요. 그런데 그 말이 사실인가요? 아니면 나를 떼어놓기 위한 하나의 변
명인가요?"
확실히 변명은 아니었다.
이제서야 느낀 나의 진심이었다.
사랑했던 그에게만은 지금 이렇게 내 마음을 숨기고 있지만,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만은...
특히 김 변호사란 마음에게는 나의 감정을 숨기고 싶지 않기에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고개
를 끄덕였다.
"사실이에요..."
이내 김 변호사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랬군요. 정말 사실이었군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나한테 미안할 건 없어요. 그보다 그 남자를 아주 많이 사랑하시나봐요?"
"네... 그를 많이 사랑하고 다시, 사랑하고 싶어요. 어쩌면 이미 늦은 일이겠지만, 지금 내 안
에는 그 남자밖에 없어요. 왜 그때 경솔하게 헤어지자고 했는지... 왜 그를 좀 더 이해... 아
니,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는지 정말 후회..."
이런...!
너무 나의 푸념들만 늘어놓은 것 같아 얼른 말을 거두었다.
"제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요. 죄송해요. 주말 잘 보내시고 다음주에 뵐게요. 그럼..."
짧은 목례로 인사를 하곤 서둘러 차에서 내려 지하철역 입구로 향했다.
그런데 다시 김 변호사 차의 경적이 울렸고 다시 걸음을 멈췄다.
그 차는 아주 느린 속도로 조금씩 가까이 다가오더니 운전 보조석의 창이 열렸고, 김 변호
사가 말했다.
"끝으로 이 말만 할게요. 늦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러니 무슨 이
유로 그 남자와 헤어졌는지 모르겠지만, 다시 시작하자고 용기 내어 말해봐요. 분명 그 남자
도 진심을 알아줄 거예요. 힘내요! 그렇지 않으면 겨우 접은 내 마음이... 사랑이란 감정이
다시 일어날 것 같으니까..."
그리고 다시 김 변호사의 차는 내게서 조금씩 멀어져 갔다.
나도 김 변호사의 말대로 용기 내어 사랑했던 그에게 다시, 사랑한다고... 다시, 사랑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저 헛된 소망일 뿐이었다.
무엇보다 도무지 용기가 나질 않았다.
나 아닌 타인에게 나의 이런 고민을 털어놓는다면, 용기를 내라는 등 그것에 대해 쉽게 말
할 수 있겠지만, 당사자인 나로서 용기는커녕 그에게 먼저 헤어지자고 했기에 어쩌면 그럴
자격도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김 변호사의 말에는 어떠한 나쁜 의도가 없으며 그런 진심쯤은 알 수 있기에 당연히
고맙게 생각하지만, 다른 마음 한 편으론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내 심정을 몰라주는
것 같아 괜스레 야속했다.
다시 지하철역으로 내려와 잠시 기다림을 갖은 후 지하철을 타고 예전이나 지금이나 약 40
분이 지나서야 C대학 인근의 지하철역에 도착할 수 있었고, 다시 도보로 10분 정도 걸어서
야 이윽고 학교 정문에 이르렀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캠퍼스 안은 한산했다.
최 교수님의 심부름을 위해 아직은 익숙한 법정학관으로 들어서서 먼저 신 교수님을 찾아뵈
어 여러 서류들을 건네 받았고 대학재학 시절에 졸업논문으로 인한 면식도 있었으니 짧은
담소까지 나눴다.
그런데 이렇게 간만에 학교를 다시 찾았는데 이대로 돌아가기엔 못내 아쉬움이 있었다.
하긴 최 변호사의 일이 아니었으면 굳이 다시 올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
다 웬지 모를 설렘이 나를 좀 더 지체하게 한 듯 했다.
그렇다고 딱히 갈 곳은 없었다.
그러나 한 번쯤 다시 가고픈 곳은 있었다.
난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학과건물 옆으로 나있는 산책로로 시선을 옮겼다.
사랑했던 그와의 기억이... 추억이 유일하게 묻어있는 곳이었기에 다시 천천히 걸었다.
그런데 그 산책로는 지난 2월 졸업식 때만해도 침엽수림으로 가득했는데 이젠 푸른 잎으로
갈아입은 낯선 나무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행여나 몇 걸음만 가면 보이는 어느 벤치마저 바뀌거나 혹은 사라지지 않았는지... 그래도
그곳만이 그와의 사랑했던 추억들이 제일 많이 묻어난 곳이었기에 두근대는 마음으로 다가
갔다.
다행히 그 낯익은 어느 벤치의 모습이 나무 사이사이로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환해지는 표정으로 다시 또 몇 걸음으로 그 벤치의 모습이 온건히 보였을 때 일순 정
색한 표정으로 잠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미 어느 한 남자가 내게 등을 보이며 앉아있었다.
하지만 그 뒷모습은 많이 낯익었다.
지금 내 눈앞에서 '정연'이란 여자가 말한 그 '사랑의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갈수록 그 낯익은 느낌은 더해갔고 곧 확신이 섰다.
어느새 나의 눈시울은 뜨거워졌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훌쩍거렸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 남자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등을 돌려 내게 고개를 돌렸다.
역시 나의 확신은 정확했다.
이것이 우연인지, 아니면 '사랑의 기적'이라도 일어났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토록 그리웠고, 그토록 보고팠으며 그토록 다시 사랑하고픈 그였다.
그는 나를 보고는 많이 놀란 듯 자리에 벌떡 일어난 반면 난 그저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와 나는... 아니, 우리는 이렇게 재회했다.
[He...]

정연에게 작별인사도 건네지도 못한 채 떠나 보낸 것이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다행히 지난밤에 정연에게 잘 지낸다는 내용의 메일을 받아서 약간의 심적 위안은
되었지만, 그것이 면죄부는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메일에는 헤어진 그녀와 다시 잘 되었으면 좋겠다, 다시 용기 내어 나의 진심을
고백해보라는 등의 전과 같은 위로와 도저히 불가능한 바람들이 있었지만, 이젠 태연해 질
만큼 익숙해졌다.
게다가 그녀에 대한 그리움으로 많이 지치기라도 했는지 지난 사랑에 대한 아픔쯤은 사라졌
지만, 아직 그에 대한 후유증으로 인한 허전함과 쓸쓸함은 어쩔 수 없었다.
차츰 나아지길... 그리고 차츰 잊혀져 가길 시간이 약이 될 것이란 막연한 기다림뿐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정연의 말대로 비록 무모할지라도 용기를 내어 헤어진 그녀에게 다시, 시작
하자고... 다시, 사랑하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나의 지나친 욕심이었다.
괜한 욕심으로 헤어진 그녀에게 한없이 부족한 사랑을 다시금 안겨주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나 혼자 헤어진 그녀를 그리워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며 이렇게 아프고
슬픈 이별은 지금 이 한 번으로도 너무나 충분했다.
이제 더 이상 헤어진 그녀에 대한 망상도 끝내버리는 것이 옳았다.
물론 지금 당장 그렇게 한다는 것은 힘들겠지만, 한시라고 빨리 그렇게 해야했다.
이로 인해 다시 다가오는 사관후보생 시험에 '불합격'이란 결과를 다시 얻을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원서접수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지난번처럼 원서를 접수하려면 구비서류 중 하나인 대학졸업증명서가 필요했다.
물론 요즘 같은 네트워크 시대에 인터넷에서 발급 받을 수도 있지만, 집에 있는 프린터에
이상이 있는 모양인지 제대로 출력이 되지 않기에 결국 학교 내에 있는 학생민원센터를 한
번은 방문해야 했다.
일요일에는 당연히 휴무며 평일에는 학원수업을 비롯해 다가오는 시험에 따른 다른 계획들
때문이라도 토요일에나마 엄두를 낼 수 있었다.
그런데 토요일에는 오후 1시까지 업무를 본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넉넉히 오전 중에 다녀와
는 것이 상책일 듯 했다.
그래서 평소보다 훨씬 여유 있는 토요일임에도 어느 때의 토요일보다 일찍 잠에서 깨어 외
출준비를 했다.
다가오는 5월의 따스한 햇살에 포근함을 느끼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제 졸업한지 겨우 2개월 조금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로 가는 버스가 몇 번인지
순간 가물가물했다.
거의 4년 동안이나 그렇게 버스를 타고 다녔으면 익숙하다 못해 몸이 먼저 반응할 터인데
말이다.
차리리 비록 순간일지라도 4년이란 기간보다 훨씬 미치지 못한 지난 사랑에 대한 기억들이
가물가물 했으면 좋으련만...
아무튼 다행히 버스 정류장에 부착되어 있는 행선 안내표를 보고서야 생각이 났고 잠시 후
학교로 가는 막 도착한 버스에 올라탔다.
토요일에다 오전이라 그런지 버스 안은 한산했으니 어느 뒷자리에 앉아 편히 갈 수 있었다.
간만에 가는 것이라 그런지 버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이 어느 정도의 익숙함 속에 괜한
설렘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그런 미묘한 감정들은 학교에 도착해 학생민원센터에 이르기까지도 여전했다.
비록 2개월만에 온 것인지라 그리 큰 변화는 없었지만, 캠퍼스 곳곳에 넓더란 초록빛의 잎
들로 치장한 가로수들이 넘쳐 났으니 그것만으로 감회가 새롭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감흥은 잠시 뒤로하고 학생민원센터로 들어서 한쪽에 설치되어 있는 자동 발급
기에서 졸업증명서를 발급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직원에게 가져가 약간의 수수료를 지급하고서야 밖으로 나왔다.
이제 그만 집에 가볼까...?
언제나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학교 후문에 있는 버스정류장으로 발걸음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내려오는 길목에 법정학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하긴, 오늘이 아니면 아마 일부러 학교에 다시 찾아올 일은 없을 텐데 잠시 들려볼까...?
가던 걸음을 멈추고 법정학관으로 돌려 들어서서는 2층에 있는 어느 한 강의실에 들어갔다.
당연히 강의실은 텅 비어있었고 창문에 걸려있는 커튼 사이로 새어나오는 햇살은 강의실 안
을 한층 아늑하게 했다.
하지만 난 커튼을 제치고 뒤편의 창가 자리에 앉아 예전 수업을 들었을 때의 분위기라도 느
껴보고 싶은 마음에 괜히 깨끗하게 지워져 있는 칠판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잠시 고개를 돌려 어느 앞자리에 잠시 시선을 고정했다.
언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무슨 과목인지는 몰라도 헤어진 그녀와 같은 수업
을 수강한 적이 있었다.
나는 이 자리에, 헤어진 그녀는 나보다 조금 어느 앞자리에 앉았다.
종종 수업을 듣다 헤어진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괜스레 히죽거렸던 추억들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피식거렸다.
이번엔 반대로 고개를 돌려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예전에 수업을 시작하기 전이나 잠시 수업 중간의 휴식 시간일 때는 괜히 창 밖을 쳐다봤는
데 그때나 지금이나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문득 캠퍼스에서 유일하게 헤어진 그녀와의 사랑에 대한 추억이 많이 남아있는 산책
로가 보였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있다간 다시 지난 사랑에... 헤어진 그녀에 대한 미련한 그리움이란 늪
에 더욱 더 빠져들 것 같단 생각에 그만 자리에 일어났다.
그리고 법정학관에서 나와 나의 발걸음은 다시 후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어느새 그 산책로에 이끌린 듯 이내 나의 시선마저 그 산책로에 빼앗기
고 말았다.
연이어 나의 걸음도 그곳으로 향했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나의 본능은 나의 그런 얕은 다짐 따윈 무시한 채 결국 산책에
들어서 어느 익숙한 벤치에까지 다가갔다.
물론 그 벤치에는 지난 2월의 졸업식 때 헤어진 그녀에게 차마 전해주지 못했던 프리지어
꽃다발과 축하카드는 없었다.
다만, 선선한 그늘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난 잠시 그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그 그늘의 선선함과 그에 따른 상쾌함에 젖은 나머지 자연스레 눈이 감겨졌다.
이내 살며시 불어오는 늦봄의 바람이 더 진한 선선함과 괜한 설렘까지 안겨다주었다.
그리고 그 설렘은 이곳에서 있었던 헤어진 그녀와의 기억이... 추억이 다시금 아스라이 피어
오르게 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슬프거나 씁쓸하지도 않았다.
다시 살며시 눈을 떴다.
아직 그 괜한 설렘은 가시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편해졌다.
아무리 헤어진 그녀에 대한 미련한 미련이 남아 있다한들 절대 다시 사랑할 수 없음은 물론
우연이 아니면... '사랑의 기적'이 아니면 평생 볼 수 없다는 현실에 무의식적으로 단념해 버
린 것일까?
하여튼 지금 내 심정의 변화가 왜 갑작스레 돌변했는지 이유가 어찌되었던 간에 내가 살아
가는 동안 우연이나 사랑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 다시 헤어진 그녀를 그리워해도 평생을
볼 수 없다고 한들 지금처럼 더 이상 지난 사랑에 대한 미련한 감정으로 다시 슬프지나 말
았으면 좋겠다.
이런 아련한 설렘만으로도...
그때 등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 바람에 자연스레 고개가 돌아갔는데 순간 화들짝 놀라 자
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내가 지금 꿈이라도 꾸는 것일까?
그래, 지금 나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긴 갑자기 아무런 이유 없이 커다란 심경의 변화가 있을 리가 없으며 무엇보다 우연이 아
니면... 사랑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절대 뒷모습은커녕 그림자조차 볼 수 없는... 헤어진
그녀가 내 눈앞에 보여질 리가 없었다.
게다가 헤어진 그녀는 곧 흘러내릴 것 같은 눈물을 머금고 훌쩍거렸다.
슬며시 내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픔이 느껴졌다.
꿈은 아니었다.
정말 현실인가 보다.
우연일까...? 아니면 이것이 정연이 말한 '사랑의 기적'일까?
아무튼 헤어진 그녀가 내 눈앞에 있는 것은 확실했다.
우리는... 아니, 그녀와 나는 이렇게 재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