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처키, 그녀와 드라이브하다
그 날은 일요일이었고, 그녀는 혼자였다.
어찌나 반갑던지, 달려가 껴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정도였지만, 뭐 그랬다가는 따귀를 맞거나, 최악의 경우 성추행 혐의로 민형사상의 처벌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참았다.
한데 그 날 그녀는 혼자인 데다 낯빛 또한 무척 어두워 보였다.
“안녕하세요? 또 오셨네요?”
나는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그녀를 맞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저 간단히 목례만 보일 뿐 특유의 그 눈부신 미소로 화답하지 않았다.
“슬픈 영화…… 뭐 있어요?”
그녀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그 목소리가 너무도 애절하게 들려서 괜한 나까지 눈물을 글썽여질 정도였다.
“기쁨을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며 반절이 된다는데, 무슨 일인지 우리 함께 나누며 서로의 슬픔을 상쇄시키면 어떨는지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얼굴이 너무도 슬퍼 보여서 나는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나는 조심스레 진열장 구석으로 가서 이마에 먼지만 가득 쌓인 <언테임드>를 비디오테잎들의 납골당에서 끄집어냈다.
<언테임드> 원제는 ‘Untamed Heart’인데, 우리나라 출시사에서 지들 마음대로 ‘Heart'는 갖다버렸다. 그래서 해석해보면 ‘길들여지지 않는’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반쪽 짜리 제목이 되어버렸지만, 출시 당시에도 그랬고, 그 후로도 별로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던 비운의 러브스토리였다. <마이 보디가드> <5번가의 비명> <크레이지 피플> 같은 저예산의, 그러나 텅 빈 공갈빵 같은 블록버스터 영화들보다 훨씬 옹골진 영화를 만들었던 토니 빌 감독의 1993년작으로 쾌활한 웨이트리스 마리사 토메이를 짝사랑하는 수줍은 청년 크리스찬 슬레이터의 짧지만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였는데, 나는 마음이 구슬퍼질 때마다 이 영화를 빌려보곤 했다.
생각해 보니, 이 영화의 크리스찬 슬레이터의 사정이 내 사정과도 교묘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생각도 들었다. 비디오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수줍은 복학생과 비디오방 단골 손님과의 사랑이야기. 후후…….
그런데 그렇게 즐거워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저…… 이거 보셨어요?”
내가 그녀에게 <언테임드>를 내밀자, 그녀는 그걸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걸로 틀어주세요.”
그리고 그녀는 내가 안내해주는 방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 있는 지 몰라도 큰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그녀를 슬프게 한 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마음 같아서는 팔뚝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일을 해결해주고 싶었지만, 사실 아직까지 나와 그녀는 별 상관이 없는 사이였기 때문에 ‘오바’로 비추어지기 쉬웠다. 역시 비틀즈의 ‘Let It Be' 정신에 입각해 나는 좀더 두고 보기로 했다.
그녀가 방에서 나온 것은 영화가 끝나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지 않기에 행여 방에서 잠이 들진 않았나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슬픈 심정 때문인 것 같아서 나는 방에 불을 켜지 않고 조용히 내버려두었다. 내가 마감 청소를 하고 있을 때 방에서 나온 그녀의 눈은 젖어 있었다.
“나…… 많이 울었어요.”
여전히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가 내게 말했다. 아…… 이럴 때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녀의 눈물이 마르게만 할 수 있다면 나는 파우스트처럼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이라도 도매금으로 넘길 의향이 있었다.
“추한 모습 보여서 미안해요. 저 갈게요.”
돌아서는 그녀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저기요!”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추하다뇨? 정말 추한 건 비디오방에 비디오 보러 온 것처럼 가장해 들어와서는 밤꽃향기액체만 잔뜩 흘려놓고 가는 게 추한 거지요. 더 추한 건 그걸 발로 비벼서 가래침으로 위장해놓고 가는 거고요. 지금 그쪽 모습은 전혀 추하지 않아요. 오히려 너무 예뻐요. 진담이에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막상 그녀의 얼굴을 보니, 말문이 턱 하고 막혀 버렸다.
“……안녕히 가세요.”
그녀가 목례로 화답하고 비디오방을 나갔을 때 나는 들고 있던 대걸레자루를 던져 버렸다. 이런 젠장, 왜 그녀에게 위로의 말 한 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하는 거냐. 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괜한 비듬만 털어냈다.
밤 12시가 되어 마감청소까지 마치고 나자, 요다 사장이 나와 일을 교대해주었다. 나는 비디오방 밖으로 나왔다. 비디오방 일을 하면서 나는 방짝 녀석의 자전거를 대여해 출퇴근시 이용했다.
“이거, 원래 우리 집안 대대로 전해오는 가보(家寶)와 같은 물건이다. 나에게는 소중한 물건이니 잘 간수해라. 잃어버리면 죽어!”
녀석은 꽤나 생색을 내며 자전거 열쇠를 내밀었지만, 사실 자전거는 정말 집안 대대로 내려온 물건이 아닌가 싶을 만큼 낡아 보였다. 페달을 밟을 때마다 끼걱끼걱 녹슨 체인이 몸살을 앓았다.
그 자전거를 타고, 나는 자취방을 향해 페달을 밟았다. 한데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아가씨의 모습이 상당히 낯익었다. 그녀였다.
나는 그녀 옆에 다다라 자전거를 세웠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돌아보았다.
“어머? 안녕하세요. 집에 가시나봐요.”
“아…… 예.”
“집이 어디신데요?”
“저기…… 사직동인데요.”
“그래요? 저도 사직동이에요.”
“아…… 그러세요? 방향이…… 같네요.”
인연이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나와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다니…….
“같은 방향인데, 태워다 드릴까요?”
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당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젠장, 이게 낡아빠진 자전거가 아니라, 폼 나는 스포츠카만 되어도, 아니, <비트>에서 정우성이 타던 오토바이만 되어도, 아니 아니, 하다 못해 정상적인 자전거만 되어도 그 말이 쉽게 나올 텐데,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 같은 물건이라 그녀를 태우기가 영 망설여졌다. 그녀가 말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아니다. 이건 아니다. 이렇게 그녀를 보낼 수는 없다. 나는 목례를 하고 먼저 걸어가는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저기요, 드라이브 안 하실래요?”
돌아본 그녀가 피식 웃었다. 하긴,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를 타고 ‘드라이브’라니…….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흔쾌히 승낙했다.
“그럼 집 근방까지만 태워다 주실래요?”
“그럼요! 집 근방이 아니라, 전국일주, 아니, 세계일주라도 시켜드립죠!”
라고 대답하고 싶은 걸 겨우 참으며, 나는 소리쳤다.
“타세요.”
그녀가 내 자전거 뒤에 걸터앉았다. 그녀가 앉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전거는 더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머뭇거리며 내 옆구리에 살짝 손을 얹었다. 옆구리부터 시작된 짜릿짜릿한 느낌이 온몸의 신경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며 감전시켰다. 하마터면 그 느낌 때문에 자전거 핸들을 놓칠 뻔했다. 겨우 중심을 잡았기에 망정이지, 넘어졌으면 그 얼굴 팔림을 무슨 수로 감당했겠는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녀를 내 뒤에 태우고 달리는 기분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즐거웠다.
“짜이~ ♪ 랑랑리이~ ♬”
어디선가 등려군의 <첨밀밀>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정말 영화 <첨밀밀>에서 장만옥을 자전거 뒤에 태운 여명이 된 기분이었다. 그녀도 여명 뒤에 탄 장만옥이 된 기분이었을까.
비교적 가파른 언덕을 올랐지만,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다.
“힘드신 거 같은데, 내릴까요?”
그녀가 물었다.
“아뇨, 괜찮아요.”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는 법.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오르막길을 올랐다. 그녀를 태우고서라면 에베레스트까지도 자전거로 등정할 의향이 있었다.
마침내 오르막길이 끝나고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페달을 밟지 않아도 자전거는 빠르게 언덕 밑으로 내려갔다. 가속도가 붙으면서 서서히 속도를 줄여야 할 계제가 되었다.
그런데…… 브레이크가 들지 않았다. 그 때 방짝 녀석의 말이 떠올랐다.
“참, 그 자전거 있지, 다 좋은데, 브레이크가 잘 안 듣는다.”
가속도는 무시무시했다. 이상했다.
고등학교 때 배운 과학 이론에 의거하자면, 수레의 질량이 일정할 때 가속도는 수레에 작용한 힘에 비례하고, 수레에 작용한 힘이 일정할 때 수레의 가속도는 수레의 질량에 반비례하는 법, 한마디로 그녀를 태웠으니 가속도가덜 붙어야 정상인데, 더 붙는 느낌이었다.
그녀도 위협감을 느꼈는지, 내 허리에 살짝 얹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좀 빠른 거 아니에요?”
그녀가 약간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랬다. 나와 그녀가 타고 있는 건 자동차도 아니고, 오토바이도 아닌, 자전거였다. 그럼에도 내리막길에서 일단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자, 자전거는 자동차나 오토바이에 버금가는 속도를 내고 있었다.
나도 점점 겁이 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용을 쓰며 브레이크를 잡아도 브레이크는 전혀 들지 않았다. 평지를 달릴 때에는 그래도 강하게 잡으면 어느 정도는 들더니만, 오늘은 완전히 무용지물이었다. 어쩐지 일이 잘 되어간다 했다.
쌔애애애애앵~
자전거는 엄청난 속도로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저만치 교차로가 보였다. 거기에서 갑자기 차라도 튀어나오면 나와 그녀는 사이좋게 차와 부딪혀 운명을 달리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공포심이 마음 속에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그녀도 생명의 위협을 느낀 게 분명했다. 그녀는 어느새 내 옆구리를 찢을 듯이 꽉 쥐고 있었다.
아…… 이럴 때 어떻게 해야한단 말인가.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나 혼자라면 자전거를 포기하고 펄쩍 뛰어내려 데굴데굴 구르면 좀 다치더라도 살 수도 있었다. 물론 그 방법도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안 되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브레이크 안 드는 자전거와 인연이 깊었다.
중2 때 친구에게 5천원을 주고 자전거를 산 적이 있었다. 그 자전거도 브레이크가 잘 안 들었다. 그걸 타고 신나게 비포장 언덕길을 내려오다 가속도가 너무 붙어 곤경에 빠졌던 날, 나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날렸다.
공중에서 제비돌기로 3회전을 하고 낙법으로 땅에 안착할 계획이었는데, 막상 착지는 얼굴부터 했다.
그 날 얼굴 반쪽이 땅에 쓸려 완전히 <마징가Z>에 나오는 아수라 백작이 되어야 했던 악몽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일을 어떻게 모면해야 한단 말인가.
마침내 나는 결단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