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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칙사랑 - 14. 배꼽은 왜 생겼을까?

나비 |2004.12.02 22:31
조회 2,438 |추천 0

** 반칙사랑 - 14. 배꼽은 왜 생겼나?


그는 룸에도 없었고 화장실을 간 것도 같지 않았다. 밖에까지 나가보았지만 그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언니! 찬영씨 못 봤어?”

“글쎄. 안 보이네.”

“저 대리님, 찬영씨 집에 간다고 아까 인사하고 갔는데요.”

“고마워요, 은주씨. 언니, 나 지금 갈게. 여기 카드 받아. 사람들한테는 미안하다고 해주고 계산 좀 부탁해! 알았지, 언니?”

“너 어디 가려고 그래?”

“미안해, 언니! 내일 말해줄게.”


난 그에게 가고 있었다. 그를 만나야 했다. 급하게 잡아탄 택시에서 전화를 계속 걸었지만 통화를 할 수는 없었다. 아마도 배터리를 빼버린 모양인지 신호가 짧게 가다 음성을 남기라는 메시지로 넘어갔다. 수시로 시간을 확인하면서 손톱을 물어뜯었다.


‘벌써 한시가 넘었잖아.’


밤을 가르며 달리는 택시는 전혀 느리지 않았지만 속이 터질 정도로 답답했다.


“아저씨, 좀 더 빨리 갈 수 없어요?”

“아가씨, 그러다 사고 나요. 지금도 빨리 가고 있는 거라고요.”


답답함에 뒷자리의 창문을 모두 열었다. 열린 창문으로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세찬 바람과 동부간선도로의 풍경이 들어왔다. 컴컴한 밤을 줄을 선 가로등들이 밝혀주고 있었다. 하나의 빛을 다른 빛이 잇고 또 다른 빛이 그것을 잇고 있었다. 건너편 간선도로 가로등을 보고 있자니 하나의 가로등이 빛을 잃어서 길게 이어진 빛의 길을 끊고 있었다. 곧 가로등은 고개를 돌려서 봐야할 만큼 멀어졌지만 그것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았다. 다시 빛의 길이 이어지길 바라며.

택시비를 치루고 그에게 달려갔다. 숨이 차올라 큰 숨을 내뱉으며 초인종을 연거푸 눌렀다.


“누구세요?”


다행히 그는 집에 있었지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문이 빼꼼히 열리고 수염으로 거칠어 보이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웬일이야?”

“많이 늦었지? 자고 있었어?”

“들어와, 일단.”


신을 벗고 거실겸 주방에 들어섰다. 그의 방 텔레비전은 컴컴한 방의 유일한 조명이 되어주고 있었다. 다행히 어색한 침묵을 그가 틀어놓은 영화 속 주인공들의 말소리가 메어주었다.


“커피 한 잔 줄래? 술 깨고 싶어.”

“응. 그래.”


그를 만나자 마자 그에게 안겨 가슴팍을 때리며 왜 말하지 않았냐며, 항의하는 상상을 했는데 현실의 나는 첫마디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의 방엔 다용도로 쓰는 키 낮은 탁자가 있었다. 밥도 먹고 책도 읽고 여러 가지 잡동사니를 늘어놓는 그야말로 전천후 탁자였다. 그 탁자 앞에 앉아 할 말을 찾아 주춤거리는 사이 흰색 커피 잔에 담겨진 커피가 내 앞에 놓였다. 커피 잔을 잡자 따뜻한 기운이 느껴져 조금은, 아주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미안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첫 단추는 푼 셈이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마음을 돌린 거니?”

“이거 영 불편하다. 주방에 식탁이 있었으면 좋겠어. 식탁이 아니더라도 커피 테이블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의자에 앉아 마주보는 것도 좋잖아. 내일 사러 갈까?”

“그러자. 내일 퇴근 후에 같이 가.”

“그렇게 기쁜 눈빛을 하면 내가 미안해져. 사실 이야기를 듣게 됐어. 그러니까 애인 얘기 말이야.”

“들었니? 언젠가 귀민씨한테 말한 적이 있었지.”

“왜 다른 사람한테 들어야 하는 건데!”


주르륵. 눈물이 뺨 위에 구르고 있다. 소리도 없이 떨어지는 눈물들을 훔쳐낼 생각도 하지 않고 그를 원망 섞인 눈으로 노려보았다.


"미안하다. 지금은 후회하고 있지만 당시엔 말하지 않는 게 옳다고 느꼈어.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너한테 전체를 내줄 수는 없었거든.”

“······.”

“지금도 망설이고 있었어. 말을 하는 순간 내 옆이 완전히 비었다고 하게 되는 것 같아서.”


“오빠가 망설이는 동안에 난 어떻게 하고 있어야 하는 건데! 모든 걸 꾹 참고 기다려줬어야 했나? 나 그렇게 착하지 않아.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고! 내가 도망치는 꼴을 보면서 그랬겠지. 저런 여자 차라리 만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그렇게 안도하고 있었을 거라고!”


“아니야. 말 하려고 했어. 내가 말했잖아. 일주일 후에는 널 찾아오겠다고. 내일 말할 생각이었어.”

“내일 말하면 누가 받아준대!”

“미안하다, 홍주야.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어리석었어. 내 생각만 했어. 미안해, 미안해.”


그의 품은 단단했다. 뿌리치려 할수록 그는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이젠 보내지 않을게. 다시 사랑해보자. 내가 잘못한 만큼 더 사랑해 줄게.”


머리를 매만지는 그의 손을 느끼며 품에 안겨 엉엉 울어댔다. 그를 한순간도 믿지 못한 내 자신이 한심해서였다. 얼마나 아팠을까? 난 왜 그를 의심하기만 했을까? 믿은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매일 그를 의심하는 것이 내 일과였던 것 같다. 창고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날 가볍게 보진 않을까, 날 싫어하지 않을까, 내게 마음이 없는 건 아닐까, 늘 마음 조리며 그의 친절을 의심했었다.


“미안해! 나도 미안하단 말이야.”

“울지 마. 지금부터 시작하는 거야, 우리. 눈물로 시작하지 말자. 아프지 않았음 해, 우리 홍주. 울지 마.”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이젠 믿을 수 있는 사람의 품에 안겨있다. 하지만 눈물은 쉽게 멈춰주지 않았다. 그가 품에서 잠시 날 떼어놓고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의 손에 입을 맞춰주었다. 그는 이마에 입을 주었고 난 그의 입술을 훔쳤다.


“거짓말 하지 마, 앞으론. 절대 안돼. 거짓말은.”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맞췄다. 내 눈물 맛이 나는 입술이었다.


“아파서 울고 있는데도 참 예뻐 보인다.”

“뭐야?”

“참 예뻐, 홍주는.”

“싫어! 놀리지 마. 놀리면 화 낼 거야!”

“화는 내지 마라. 앞으론 화내지도 말고 싸우지도 말자.”

“몰라!”

“에구, 예뻐, 예뻐.”


그와 화해를 하고 보니 어느새 두시가 넘어 세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헤어짐은 아쉬웠지만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다행히 술은 먹지 않았던 그가 집에 데려다 주었다.


“내일 피곤해서 테이블 사러 갈 수 있을까?”

“싫어, 갈 거야. 사랑이 시작된 첫 날이라며? 그러면서 안 만날 생각을 하는 거야?”

“아니야. 너 피곤할까봐 그랬지. 꼭 가자. 사온 다음에 집에서 같이 자면 되지.”

“같이 자기는. 누가 잔대?”


그에게 핀잔을 주 듯 말했지만 내일의 일상을 함께 나눌 계획을 말하는 것은 가슴이 벅찰 정도로 기쁜 일이었다. 바로 몇 시간 후면 다시 만날 것이었지만 집에 가까워질수록 아쉬움은 커져갔다.


“홍주야! 배꼽이 왜 생겼는지 알아?”

“탯줄 자를 때 생기는 거 아니야?”

“아니. 옛날에 남자와 여자는 하나였어. 둥근 모양이었지. 팔이 네 개, 다리가 네 개였어. 사람을 둘 붙어놓은 모양이었거든. 팔 다리가 모두 여덟 개라서 무척이나 빨랐었대. 힘도 좋고 야심도 많아서 당시에 신을 공격하기도 했었어. 그러다 제우스와 신들이 화가 난 거야. 대책을 세웠지. 모두 없애버릴까 하다가 그러다가는 자신들을 숭배할 사람들이 없어지는 건 곤란하니까 약하게 만들자며 사람을 둘로 나누기로 한거지. 그 때 남자와 여자가 갈라진 거야. 사람을 잘라놓고는 그 상처를 평생 보라는 의미에서 얼굴을 반대로 돌려놓았어. 상처는 치유해주기로 했지. 잘라질 때 생긴 상처를 모아서 묶은 게 배꼽이야.”


“이게 남자와 여자가 갈라진 상처라는 거야?”


“응. 난 그보단 이렇게 생각해. 서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표식이라고. 인간은 서로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태어난 거지. 배꼽이 그 증거고. 내일은 홍주 배꼽 봐야지.”

“결국 그 소리야? 꿈도 꾸지 마. 그럴 일은 없을 거니까!”


아쉬움이 듬뿍 담긴 키스를 여러 차례 주고받은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에게 문자를 보내고 나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러다 무심코 배꼽을 내려다보았다.


‘배꼽이 못생긴 편은 아니지? 만약에 못생겼다고 하면 어쩌지.’


어느덧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 내 모습에 픽, 하고 웃음이 나와 버렸다.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표식을 조금 더 바라보다 세수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간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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