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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wi (키위) - 05,06. 분홍머리

나비 |2004.12.02 22:35
조회 2,289 |추천 0

kiwi - 05 


생각보다 날씨가 추웠다. 귀는 시리다 못해 아팠고, 치마 속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에 이는 더욱 세게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예상치 못한 강추위긴 했지만 집에서 나오기 전부터 청치마를 입을 만한 날씨는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치마를 선택한 이유는 그녀들의 권유도 있었지만 비장의 ‘유혹의 줄무늬 양말’ 때문이었다. 무릎까지 오는 길이의 빨간색과 주황색 노란색이 가로로 줄을 지어 있는 이 양말을  신으면 원래 그런 색의 다리를 갖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하루 종일 경쾌하게 걷게 되었다. 그리고 신체 부위 중 가장 자신이 있는 나의 발목을 더욱 강조해주는 것도 좋았다. 물론 셋째 언니는 키위에 색칠해 놓았냐며 비웃는다.


오빠를 만가기로 한 곳은 동네 버스 정류장 앞에 있는 편의점 앞이었다. 3년 전 우리 집 근처에 산다는 이유로 과외 선생님으로 강력 추천되었던 사실을 잊고 있었다. 물론 오빠의 동네까지는 도보로는 힘든 버스로 세 정거장 거리였지만 여태껏 우리는 왜 우연이라도 마주치지 못했을까? 아마도 내가 컵 떡볶이에 정신이 팔렸을 때 엄마와 들고 가는 장바구니가 무거워 투덜대고 있었을 때 오빠를 몰라보고 스쳐지나갔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오빠가 어제 전화 저편에 있던 여자에게 정신이 팔려 나를 못 보았을지도 모르고.


날씨가 추워 먼저 도착해 기다리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편의점을 향해 뛰었다. 멀리 보이는 편의점 앞에 남자 한명이 검은 옷을 입고 서 있었다.


‘누굴 기다리나봐. 이렇게 추운 날씨에.’


추운 날씨가 길가에 서 있는 저 남자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일 거라는 확신을 주었다. 그러기에 그는 서루 오빠일 가능성이 높았다. 서루 오빠라고 생각하니 왠지 수줍은 생각이 들어 오빠가 있는 곳까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종종 걸음으로 다가갔다.


사실 기대는 하지말자라고 생각하며 나온 길이었다. 당시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그는 대학생. 오빠가 없는 나였기에 연상의 남자는 무엇을 해도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다보니 서루오빠가 흰 피부에 깔끔한 인상이었을 뿐 그다지 잘 생긴 얼굴도 아니었다는 것이 기억나기도 했다.

이제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 그와는 평등하다. 예전에 무조건 주었던 플러스 점수는 더 이상 없는 것이다. 스스로 실망하지 않기 위해 마음의 단도리를 잘 하고 나왔건만 3년만에 보는 오빠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검은 차이나 코트에 자주색 뿔테 안경.

멋졌다.

김장훈을 연상시키는 환한 분홍색 머리.

충격이었다. 아니 그 말로는 모자랐다.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여러 모습을 상상했던 나였지만 분홍 머리는 충격이라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모범생이고 착실했던 그래서 미래의 신랑감으로 생각했던 오빠에게 3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혜림이 왔니?”


추위로 굳어져 있었던지 반가운 표정이 나타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네. 많이 춥죠?”


분홍 머리가 많이 추워보였다.


“어디 들어가야지. 많이 춥다.”


정말 추웠던 건지 서루 오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사실 전보다 스타일은 좋아보였다. 길에서 우연히 만나도 멋지다, 라고 바라볼 만큼. 분홍색 머리는 하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했고, 검은색 차이나 코트도 내 마음에 꼭 들었다. 하지만 멋지게 변신한 오빠가 달갑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서루오빠와 연애를 할 생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여느 여자들처럼 신랑감이란 단어는 성실이란 단어와 등호를 이루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오빠의 스타일은 흔히 말하는 성실과는 멀어보였기에 다소 실망스러웠다.

성실성 40점.

스타일 70점.


동네 몇 안 되는 사람들은 오빠의 머리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극한의 날씨에 더욱 돋보이는 나의 유혹의 줄무늬 양말 따위와는 게임도 안됐다.


선두에는 분홍 머리.

그 뒤를 따르는 화려한 줄무늬 양말.


졸지에 개성 만점인 한 개인에서 요상스런 커플로 전락해 버린 느낌이 들어 찜질방에 자주 오는 단골 아줌마들과 마주치지 않기만을 바라고, 바라고 또 바랬다.


오빠는 차와 음식을 같이 판다는 그냥 그런 레스토랑로 들어가 버렸다. 이곳은 현상오빠와도 자주 왔던 곳인데.


“오빠 여기 자주 와요?”

“응. 아니. 예전에 자주 왔지. 요즘은 못 온 것 같다. 뭐 먹을까?”


3년 만에 만난 오빠 나에게 시선을 거의 주지 않았다. 약간의 반가움과 제자에 대한 예의가 그리고 어제 자신이 잠결에 해버린 약속 때문에 이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빠 오랜만이에요.”

“그래. 얼마나 됐나? 그때가 군대가기 직전이었으니까 스물 둘. 셋, 넷, 다섯. 3년 만이네. 그런데 넌 여전히 고등학생 같다.”


‘아니, 어딜 봐서 고등학생이란 말야.’


“그래요? 제가 조금 어려보이긴 하죠. 그런데 어디가 고등학생 같아요? 피부?”

“하하. 아니 옷 입은 게.”


양말을 두고 말하나 보다.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 동안 오빠는 머리 속 깊이 묻혀 있었던 나에 대한 기억을 찾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너 별명 있었는데. 뭐드라? 과일이었는데. 바나나?”

“갑자기 별명은.”

“맞다. 키위. 그런데 왜 키위였지?”

“겉은 좀 그런데 벗겨놓으면 이쁘다 그런 뜻이죠. 몸매가 되니까.”


은근슬쩍 오빠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날 가르쳐주던 고등학생 제자가 아니라 여자로 봐주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키위는 벗기지 않고 반으로 잘라야 예쁜 거야. 그냥 벗겨만 놓으면 푸르딩딩하기만 하지. 그게 이쁜가?”


상상력 자극은 실패였다. 가족들, 친구들, 최근 스캔들 난 연예인 이야기, 시원치 않은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마쳤다. 말을 해보니 예전 오빠와 다를 것이 없었다. 상냥하고 부드러운. 예전에 내가 모른 것이 있으면 자상하게 답을 해주곤 했던 오빠의 모습 그대로였다.

자상함 85점.

머리 스타일 하나 바꿨다고 색안경을 긴 내가 미안했다. 하지만 역시 집에 인사드리기는 곤란한 머리다.


“오빠 어제 제가 늦게 전화했죠. 주무시는 것 같던데. 어디였어요? 집은 아닌 것 같던데.”


kiwi - 06 


“어제?”


오빠는 또 자신의 기억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혹시 나에게 차마 못할 말이 있어 할 말을 만드는 것을 아닐까하는 염려가 생길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 말을 꺼냈다.


“아하, 택시 안이었어.”


저 말이 사실일까 의심이 생기면서도 일단은 안도감이 들었다.


“택시 안이요? 여자 목소리도 들리는 것 같던데요. 여자 친구랑 같이 있었던 거예요?”

“아니. 뮤직 비디오 찍는데 출연하는 여배우야.”


‘여배우? 뮤직비디오 출연할 정도면 쭉빵녀라는 소리야?’


“어제 회식이 있었거든. 같은 방향이라 택시를 같이 타고 갔지.”

“자다 받은 것 같던데요.”

“술을 좀 마셨더니 깜박 잠이 들었나 보더라.”


‘으음. 쭉빵녀가 옆에 있는데도 잠을 잤다. 별 사이는 아니라는 뜻이군.’


이로써 내내 마음에 걸리던 궁금증은 풀린 것이었다. 하지만 여자 친구냐고 묻던 내 질문에 아니라고 말하던 오빠의 표정이 쓸쓸해 보인 것은 나의 착각이었을까? 초면과 다름없는 내게 감춰두어야 것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오빠가 꼭 내게 진실만을 말할 의무는 없었고, 사실 나도 잔혹한 진실보다는 적당한 거짓말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도 오빠의 표정을 쓸쓸하게 만든 그녀에 관한 진실만큼은 알고 싶어졌다.


“오빠 일하나 봐요? 학생 아니었어요?”

“휴학하고 뮤직 비디오 찍는 스튜디오에서 아르바이트 하고 있는 거야. 조만간 복학해야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이다. 지금 상태로는 아마 복학을 안 할 것 같기도 하고.”


장래성 60점.

마음속으로 오빠의 점수를 가혹하다할 만큼 철저히 매기고 있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나에게는 점수였다. 그가 밥을 흘릴 거나 커피를 소리 내서 마실 때면 태도 점수 2점이 깎였고, 진한 눈썹을 매력적으로 움직이거나 빨간 입술을 혀로 적실 때면 스타일 점수가 5점 상승하기도 했다. 다소 커트라인에도 못 미치는 부분도 있었지만 자상함이 큰 점수를 얻고 있었으므로 일단은 합격점을 주기로 했기에 점수 채점은 그만두고 좀 더 편안히 대해보기로 했다. 서로 공통된 화제가 없는 관계로 할 말이 떨어져 가자 나는 생면부지의 가족들 안부를 새삼 물었다.


“오빠네 식구들은 잘 있어요?”

“아니. 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셔. 병원에 계신지 좀 됐어.”

“어머, 어쩌다가.”

“지병이야.”

“병원에 계신다면서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요?”

“처음엔 나도 많이 당황 되고 했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익숙해지더라. 벌써 3개월째거든. 그런데 아버지가 당신 돌아가시기 전에 나 꼭 결혼하는 거 보시겠다고 성화라 그것 때문에 미치겠다.”


‘이런, 운 좋을 데가 있나. 하늘이 맺어주는 구나.’


“그럼 당장 결혼하면 되잖아요?”

“여자가 없어. 그러니 걱정이지. 소원이시라니까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꼭 식을 올리고 싶은데.”

“오빠, 그럼 저는 어때요?”


염치불구하고 물어보았다. 여자가 없어 걱정이라는데 넓은 아량을 베풀어줄 생각이었다.


“하하하. 그렇다면야 나는 좋지.”


좋다고 하면서도 다음 말을 잇지 않는 서루 오빠. 은근슬쩍 이렇게 묻어갈 기회가 오다니. 농담이 진담되고 오빠가 여보야 되는 걸 보여주고 말겠어. 그때 핸드폰 문자가 왔다는 신호음이 들렸다. 왜 하필 종치는 소리인지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어제 나와 헤어진 사람의 문자였다.


‘맞다. 나 어제 헤어졌지.’


어떻게 까맣게 잊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런 무신경함이 여러 사람에게 큰 상처를 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살기에는 편했기에 버리겠다고 마음먹은 적은 없었다.

헤어진 남자, 이제 나와는 상관이 없는. 현상 오빠는 핸드폰의 액정 속에서 나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현상 오빠는 온통 서루오빠로 가득 찬 내 마음에 작고 네모난 액정만큼의 자리를 잡고 있을 뿐이었다.

문자를 무시해버리고 서루 오빠에게 집중했다. 하지만 서루 오빠의 말을 듣는 동안에도 자꾸 문자가 올 때 울리는 종소리의 환청이 들리는 듯 했다. 전원을 꺼놓을까 배터리를 빼놓을까 고민하는 사이 다시 종소리가 울렸다. 환청이 아니었다.


[화가 많이 났구나. 너희 집 앞에 있는 오션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만나서 얘기하자.]  


‘오션이라면 바로 여기잖아.’


다행히 아직 도착을 하지 않았다. 어서 서둘러서 나가야 한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을 피해 왜 도망을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서루 오빠와 함께 있는 모습은 보이기 싫었다. 소란스러움. 그래 소란해지는 것이 두려워서일 거다. 서루 오빠와 있는 시간을 방해 받기 싫어서.


“오빠, 집에서 급하게 연락이 왔어요. 우리 그만 나가요.”


먼저 가방을 메고 일어났다. 서루 오빠도 갑작스런 말에 놀라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급한 마음에 계산을 하는 종업원이 얼마나 굼떠 보이는지 속이 다 탈 지경이었다. 잔돈을 꺼내는 것은 왜 그리 느린지, 왜 돈을 주기 전에 다시 세어보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오빠가 계산을 마치자마자 바로 문을 열고 좁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무 늦은 모양이었다.


'차라리 당당하게 자리에 앉아 있을 걸. 도망가다 잡힌 꼴이라니.'


나와 서루 오빠를 번갈아 보던 현상 오빠는 금세 사태 파악을 마친 모양이었다.


“너 뭐야?”


단 세 글자의 말이 큰 모멸감을 주었다. 헤어지더라도 지켜야 할 예의가 있는 것인데 이사람 큰 상처를 받은 모양이다.


‘충분해. 충분해. 이 정도면 정 떨어졌겠지. 오히려 잘됐어.’


좁은 통로였기에 내려가기 위해서는 현상 오빠를 가깝게 스쳐가야 했다. 잡으면 어쩌나하는 두려움을 느끼며 계단을 내려갔다.


‘날 잡지 마. 잡지 말아줘. 잠시 만났다가 떠날 사람이라면 그냥 지금 보내줘. 어차피 헤어질 사람이라면.’


다행히 오빠는 잡지 않았다. 현상 오빠를 지나 계단을 내려오면서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오빠가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오빠를 버렸다는 것을.


“강혜림. 남자 생겼냐?”


결국 참기 힘들었는지 현상 오빠는 내게 소리를 쳤다.


'듣지 못한 척 가리라. 억울해도 참으리라. 변명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야. 나랑은 남남이니까.'


곧 쿵쾅거리며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고, 순식간에 현상 오빠에게 팔을 잡혀 버리고 말았다.


“너 남자 생겼냐고? 그래서 헤어지려고 결혼 얘기 꺼낸 거지? 그 얘기하면 내가 헤어지자고 할 줄 알고.”

“아니야. 그런 거.”

“아니면 뭔데? 우리 어제 헤어졌어. 그런데 오늘 다른 놈이랑 우리가 자주 오던 여기에서 밥을 먹어? 네가 나랑 헤어질 생각이 없었다면 이러지 못하지.”


오해가 깊어지고 있었다.


“아니야. 나 고등학교 때 과외 선생님이야. 3년 만에 만났다구. 그리고 누굴 만나든 무슨 상관인데. 오빠랑 나 헤어졌잖아.”


구차한 변명은 나나 현상 오빠가 아닌 난처해하고 있는 서루 오빠 때문이었다.


“우리 아직 안 헤어졌어.”

“방금 오빠 입으로도 말했잖아. 우리 어제 헤어졌다고. 이러지마.”

“너 정말 왜 그러니?”

“나 불확실한 사람 만날 수 없어. 나에게 확신 줄 수 있어?”

“······.”


팔을 잡았던 손이 스르르 풀렸다. 확신, 결혼이라는 말 앞에서 오빠는 항상 저렇게 뒷걸음을 쳤었다.


“선생님 죄송해요. 먼저 가볼게요.”


작은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수였다. 바늘에 찔려도 아픈 법인데. 내 마음 속에 액정 크기만큼 남아있던 현상오빠가 날 아프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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