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하자마자 아버님은 한국으로 가버리셨다. 아들하고 말이 안통하니 역정이 나신거다. 그 즈음의 랑도 불안한 시기였는지 짜증이 많았다.
펄펄 끓는 젊은이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오면 할 일이 별로 없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는 한인 집성촌이 있는데 그 지역 이름을 한국인들은 '백구촌'이라고 했다.
109번 버스 종점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백구촌은 별로 지역이 좋지않은 곳에 이루어진 동네였다.
까라보보라는 큰 길 끝자락에 있는 동네인데 그 밑에 동네는 무법천지인 빈민촌이다.
경찰도 범인을 잡다가 그 동네로 들어가면 추격을 멈추어 버린다는 빈민촌.
어느 나라나 다 빈민촌이 있지만, 아르헨티나 빈민촌은 조심해야한다. 그 동네 지나가다가 돌멩이가 날라와도 차를 안세우고 가야 안전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 동네 근처라 밤 중의 백구촌은 위험한 동네이기도 했고, 도둑도 잘 드는 동네라 뭔가 아는 사람이면 그 동네 근처에 집을 얻지도 사지도 않는다.
하지만 한국 사람을 상대로 하는 한국 식품점이나 한국의 쇼프로나 드라마를 녹화해다 빌려주는 비디오가게, 미장원, 한국식당 등이 몰려 있어서 낮에는 그 곳이 한국인으로 버글댔다.
이 즈음의 아르헨티나에는 한국인이 비교적 많이 살던 때라 거의 6만명에 육박했다.
워낙 큰 나라라 지방에도 많이 흩어져 산다고 쳐도 많은 인구가 살고 있는 것이다.
뭐 중국, 미국, 소련같은 나라에 비하면 택도없이 작은 숫자지만 인근 남미 다른 나라에 비하면 많은 한국인이 분포되어 있는 것이다.
식품점은 까라보보가 끝나는 길 즈음부터 시작해서 니은자로 꺽어지며 이어진다.
숯불갈비집도 늘어만 갔다. 한국에서 진짜 숯불갈비집을 경영하다 이민 바람이 불어서 아르헨티나에 와서 숯불갈비집을 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그래서 그 질좋은 아르헨티나 쇠고기로 만든 숯불갈비는 전문가의 솜씨를 만나 환상적으로 맛있었다. 게다가 값은 무지 쌌다.
보통 일인당 미국 달러 10불씩 내고 먹는 고기 부페집도 생겼는데, 요거저거 먹기 좋아하는 랑은 물만난 고기처럼 좋아했다. 나같은 사람은 별로 많은 양을 안먹으니 부페 집이 별로였지만 랑 또래의 다른 남자들은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엄청 먹어댔다.
처음엔 저렇게 먹어대니 어디 음식점이 이익이 남겠나 싶었다. 그래도 내가 보기엔 보통 5-6인분은 거뜬히 해치웠지만 대부분 가족 단위로 오니깐 애들이 어른의 반값내고 여자들 내고 그럼 이익이 남을 듯도 했다. 아이들과 여자들은 별로 안먹으니까.
그 근방에 중국 부페집도 많이 생겼는데 아마 유행을 타서 그랬지 싶다. 보통 5불내고 들어가서 먹는 부페집이었는데 맛이 좋은 집이 꽤 많았다. 우리 동네에 생긴 중국 부페 집엔 버섯 요리가 많아서 난 버섯만 몇 접시씩 덜어다 먹곤했다.
백구촌이 발달하며 식품점도 하루가 다르게 늘어만 가고 비디오 가게도 늘어갔다. 선물가게도 생기고 만물상이란 가게도 생겼는데 그야말로 한국물건 만물상이었다. 한국 시장의 물건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옮겨다 놓은 착각에 빠지게 했다.
여기저기 생긴 한국식 짜장면 집도 맛을 자랑하며 가격 경쟁을 벌였다. 한국의 짜장면 집처럼 가게 천정 근처에 빙 돌아가며 플라스틱 잎사귀와 석류 다래 열매도 주렁주렁 매달아 놓아서 그 촌시러움을 재현시켜 놓기도 했다.
그 백구촌에 한국식 목욕탕도 생기고 당구장도 생겼다.
난 워낙 목욕을 좋아하니까 생기자마자 갔는데, 영 적응이 안되었다.
가면 꼭 아는 인물 하나는 부딪치게 되는게 아닌가. 민망의 극치다.
내가 몸매라도 이쁜 때라면 괜찮은데 배가 남산만해서 가서 좀 편안하니 목욕좀 하려고 하면 내 등을 치거나 어깨를 두드리며 내 또래 아줌마들이 혹은 어른들이 아는척을 했다.
에구 창피했다.
제발 그런데서는 아는 척을 안했음 좋겠는데...
그들은 매우 반가워하며 배가 크네 작네 아들같네 딸같네 하며 날 보며 지네끼리 평가를하고 쑥덕공론을 벌이곤했다.
그래서 그 목욕탕엔 발을 끊기로 했다.
랑은 그 당구장에 매일 출근을 했다. 예전 대학 시절 당구치며 200인가 놓고 치던데 여전히 200이다. 랑 친구들이 랑보고 점수가 짜다못해 염전이라고 놀렸다.
그들은 내기 당구를 종종 쳤다.
피튀기는 싸움이었다. 판도 커서 지면 몇백불 나갔다.
랑은 날 데리고 가서 종종 그 당구장에서 기다리게 해놓고 당구 치길 좋아했는데, 다른 남자들은 배가 남산만해서 애 데리고 기다리는 날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아구 참말로 내가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그래서 그 당구장에 가는 걸 싫어하니 이젠 혼자 나돌아 다니길 좋아했다.
그 당구장에서 한 블럭 정도 내려가서 또 한국 만화가게가 생겼다.
이젠 그 곳도 가끔 갔는데 내가 워낙 만화를 좋아하니 그 곳은 갈만했다. 랑은 날 데리고 외출해서 그 만화가게에다 아들녀석과 나를 떼어놓고 자긴 당구를 치러다니거나 다른 데 가서 실컷 놀다가 왔다. 아님 그 만화가게에서 만난 사람들과 고스톱 판을 벌이곤했다.
우리야 여름 한 철 일하고 오는 사람들이지만, 그 만화가게에 몰려 있는 한국인들은 대부분 일거리가 없어서 노는 백수가 대부분이었고, 또 혼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총각 아님 이혼남들이었다.
그런 사람들과 어울려 돌아다니길 좋아하던 랑은 차츰 나와 아들 녀석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는듯했다.
종종 짜증도 잘 부리고 그들과 어울려 놀며 이삼일 집에 안들어올 때도 많았다.
산달이 가까워오니 랑도 미안한 기색을 하며 집에서 머무는 시간을 많이 내었다.
난 겁도 났고, 엄마도 보고싶었다.
아이를 낳아야 하지만, 산후조리를 해줄 사람은 대학생인 시누와 랑밖에 없었다.
그들이 과연 날 돌보고 태어날 작은 아가를 돌볼 수 있을지도 불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