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정신이 없는 효은은 레오에게서 걸려온 전화도 받지 못했다. 부랴부랴 다시 전화를 건 효은에게 레오는 너무나 태평스러운 말투로
-오늘 끝나고 뭐해?
하고 묻는 것이었다.
-나 바빠. 오늘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미안해요. 전화 끊을게.
효은은 속으로 이 남자는 뭐가 이렇게 태평해? 궁시렁거리며 전화를 끊고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렸다.
-아가씨 바쁘십니까?
요한센이 묻자 레오는 그때서야 전화기를 내려 놓았다.
-그런 것 같아. 무진장 바쁜 것 같군.
-바쁜 애인은 상대방을 지치게 하죠.
요한센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렇군. 자네 말이 맞아. 너무 바빠서 얼굴 볼 시간도 없다네.
레오는 침울하게 말하고 책상에 엎드렸다.
-직접 찾아가시는 수 밖에 없죠.
-찾아가기도 하지. 그렇지만 너무 피곤한 얼굴로 바라보는데, 그냥 집까지 태워다 주기만 하네.
레오는 얼굴을 책상에 묻고는 말했다. 요한센은 커피를 다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건 그렇고 아가씨를 정말 자선 음악회에 초대하실 겁니까?
-그럼. 온다고 약속까지 받아놨네.
-그렇게되면 공식적으로 아가씨와 교제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되는데요. 그렇게 된다는 걸 아가씨도 알고 계십니까?
-어차피 신문에서 너무 많이 떠들어대서 더 이상 어떻게 해볼수가 없지 않은가.
레오는 말을 하고나서 습관처럼 담배를 물었다. 그러자 요한센이 일어났다.
-벌써 가려구?
-저는 한가한 몸이 아닙니다, 사장님.
-알겠네, 요한센. 아, 있다 어머님 오신댔는데.
-알겠습니다, 사장님.
요한센이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레오는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해.
레오는 중얼거렸다.
-기다리는 법을..
-공작부인 도착하셨습니다.
레오는 검토하던 서류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로스베너 공작부인은 나이에 맞지 않게 활달하고
쾌활한 웃음을 지으며 들어왔다.
-아들아.
-어머니 오셨어요?
그녀는 소파에 앉았다.
-그 아가씨가 자선 음악회에 온다더구나.
-누구한데 들으셨어요?
-요한센이 그러더구나.
요한센이 커피를 들고 들어왔다.
-그래요?
레오는 요한센을 노려봤다. 그러나 요한센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나가버렸다.
-올 거에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공작부인이 커피 잔을 들었다.
-너무 그녀에게만 주목하지는 말아주세요. 아직 그런 생활에 익숙하지 않아요. 더군다나 그녀가 한국
사람이라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는 어른들이 많잖아요. 특히 메리 고모라든지..
메리 이름이 나오자 공작부인이 얼굴을 찌뿌렸다.
-그 여자는 말만 많단다. 우리 가문이 이렇게 무역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보면 다른 나라의 귀족 가문과 결혼했기 때문이야. 할머니도 스페인 귀족이었고..
공작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 잔을 놓았다.
-메리, 그런 여자가 우리 가문에 둘만 더 있었다면 우리 가문은 망했을거다.
부인의 말에 레오는 웃음을 터트렸다. 솔직히 메리가 까먹은 재산만 해도 엄청난 것은 사실이었다.
-어머니는 효은이 왜 좋으세요?
-아, 그 아가씨 말이냐?
부인은 살짝 미소 지었다.
-솔직히 너한테 또박또박 말대꾸하는 게 귀엽더구나. 그러면서도 널 이해 시킬려고 하고.. 덮어두고 널 잡으려고 하는 게 아니었어.
-그래요?
레오는 앞에 놓은 주스를 한모금 마셨다.
-그래. 미란다는 널 이겨 먹으려고만 했지 널 이해시키려고 하지는 않았잖니. 이제야 말이지만, 미란다는 날 은근히 무시하더구나. 늙었다고. 그런데 그 아가씨는 그런게 없어 보이더구나. 날 존중해주고. 그게 맘에 들었다.
레오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
-난 그 아가씨가 마음에 든다. 아버지도 맘에 든다고 하셨다. 혈통이니 인종이니 하는 구닥다리 방식으로 어찌 살겠냐. 더군다나 우리는 사업하는 집안 아니니. 다만.. 걱정은..
레오가 몸을 일으켰다.
-왜요, 어머니?
-그 아이가 우리 가문을 너무 벅차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부인의 말에 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게 걱정이에요. 그래서 그냥 두고 볼려구요. 자신의 힘으로 성공하고 싶대요.
-뭐, 그 아가씨 정도면 무난하게 성공할 것 같더구나.
부인의 말에 레오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선 음악회에 온다면 그 아가씨 자리는 애 옆자리로 하고 싶구나. 나한테 한국 이야기를 해준다고 하지 않았었니.
-알겠어요, 어머니. 옆자리를 비워둘게요.
레오는 환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집으로 돌아온 효은은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옆에서 맛사지를 하고 있던 베스가 누운채로 물었다.
-너 스완씨 알아?
-헨리 스완?
-응. 그 스완씨.
-알지. 넌 어떻게 알아?
-그 사람 우리 잡지사에서 일한다. 말로는 능력도 있다던데.. 그런데 그 사람이 이코노믹스에서 왔다길
래 너 아느냐고 물었더니.. 안다 그러드라. 그래서 너두 아는지 궁금해서.
-잘 알아.
효은은 주춤주춤 일어나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래? 그 사람 잘 생겼드라.
베스의 말에 효은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왜? 왜 웃어?
-스완씨가 잘 생긴 건 아니지.
-야. 니가 레오만 보다 보니까 눈이 높아져서 그런가 본데, 그 정도면 잘 생긴거야. 왜 이러셔?
-그래? 스완씨한테 맘 있어? 내가 다리 놔줄까?
-오케이!
베스가 침대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좋아 좋아. 꼭 다리 놔줘야한다!
-알았어. 이 철없는 친구야.
효은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욕실로 향했다. 그때, 누군가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레오였다. 깜짝 놀란 효은은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문을 열었다.
-뭐에요?
-아직 안 잤나?
-아, 네.. 그렇긴 한데 너무 늦었어요.
효은이 중얼거리듯 말하며 레오를 방안으로 안내했다. 그러자 침대에서 뒹굴고 있던 베스가 벌떡 일어
나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제 방으로 도망갔다.
-방금 뭐가 지나간 것 같은데.
레오가 농담을 하자 효은이 웃었다.
-그러게. 나도 뭔지 모르겠는데.
-나와요, 베스. 치킨 사왔는데, 같이 먹어요.
레오가 말했다. 그러자 그때서야 재빨리 욕실로 뛰어가 얼굴을 씻은 베스는 씩 웃으며 테이블에 와서 앉았다.
-뭐야? 케이 에프 씨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베스의 말에 효은이 레오를 보고 웃었다.
-뭘 이렇게 많이 사왔어요?
-먹구 힘내라구.
레오가 주먹을 쥐고 흔들어 보였다.
-으이구. 무슨 폭력집단 같다. 어쨌든 잘 먹을게요. 그런데 집에 안가요? 벌써 11시가 넘었어.
-나 재워주면 안되나?
레오의 농담에 베스의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졌다.
-나보고 어떻게 자라구? 안돼요, 안돼! 절대 안돼.
-농담입니다, 베스.
레오는 베스가 너무 강력하게 반대하자 머쓱해져서 말했다.
-알아요, 레오. 큭.
베스가 웃다가 치킨이 목에 걸려 끅끅대는 바람에 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어쨌든 재밌는 아가씨들이야. 레오는 효은의 집을 나오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어? 아가씨 왠일이신가요?
-요한센! 오랜만이에요!
잡지사에 잠깐 들른 요한센은 거기서 효은을 보고 깜짝 놀랐다.
-혹시 여기로 옮기시려고 그러시는 거에요?
-아뇨. 설마요. 친구 좀 보러왔어요
-친구? 누구요? 혹시.. 스완 기자요?
-아, 네! 역시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효은이 살짝 웃어보였다. 더욱 매력적이었다.
-그럼 만나고 가시죠. 전 잠깐 일이 있어서..
-네, 그래요, 그럼.
효은이 지나가자 요한센은 묘한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레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라구?
레오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니까, 지금, 효은이, 잡지사에서, 그 희멀덕한 놈을 만나고 있다구!
-희멀덕 한 놈이 아니라.. 스완 기자입니다만.
요한센이 정정하자 레오는 더 크게 소리쳤다.
-그게 그거지 뭐야? 백조는 뭔 놈의 백조.. 생긴 건 거위더구만. 당장 효은이 데리고 와! 아니, 내가 가
야겠어!
-저, 사장님. 그러지마시고 오늘 저녁엔 아가씨와 두분이서 오붓한 저녁이라도 하시는 게..그러시면서
한번 여쭤보시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알겠네, 요한센.
전화를 끊은 레오는 너무 화가 나 몇 번이고 자리에서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했다. 그래도 마음이 안정이 안돼자 아예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래도 진정이 안됀 레오는 자켓을 들고 나왔다.
-어디야, 자기?
-여기? 여기 자기네 잡지사 앞인데?
레오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거기서 뭐해?
-응, 스완기자 만나요. 오랜만에. 당신은 어디에요?
-나? 나 지금 잡지가 가는데?
-어? 정말? 잘됐다. 나 좀 데려다 줘. 신문사까지.
-알았어. 금방갈게.
차선, 신호등, 하나도 지키지 않고 달려온 잡지사 앞에는 효은과 헨리가 나란히 서 있었다. 차 문이 부셔져라 닫은 레오는 약간 인상을 쓰고, 그러나 멋지게 보여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효은에게 다가갔다.
-왔어요?
-오랜만입니다.
헨리는 레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는 헨리의 손을 무시했다.
-네, 스완씨. 빨리 가지.
-그래요. 나중에 또 봐요.
차에 탄 효은은 헨리에게 손까지 흔들었다.
-나중에 또 보긴 뭘봐?
-왜 그래요, 아이처럼. 사실은.
효은이 망설이자 레오는 긴장하고 물었다.
-사실은 왜?
-베스가 스완씨가 좋대요. 그래서 다리 놔줄라고 온건데.. 어때? 당신이 보기에도 베스랑 스완씨랑 어
울려요?
순간, 레오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만큼 챙피했다.
-응? 응..
-어울리지? 둘이 잘 됬으면 좋겠다. 그죠?
-응.. 그래. 잘 되어야지! 암!!
레오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레오와 효은은 실은 차는 부드럽게 코너를 돌아 다른 차들과 함께 도로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스완! 항상 주목하겠어! 레오는 속으로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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