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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wi (키위) - 20. 삼돌이의 죽음

나비 |2004.12.23 17:36
조회 1,619 |추천 0

kiwi - 20


“너 눈 부었다. 어제 늦게 들어갔냐?”

“아니. 너 데려다 주고 바로 집으로 갔지.”

“근데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상태 안 좋은데.”


병진이의 말대로 상태가 좋을 리가 없었다. 이틀 내내 잠이 부족했기에 아침에 눈조차 뜨기 힘들 정도로 눈은 부어있었고, 피부도 하얗게 일어난 데다가 입술도 다 갈라져 있었다.


“이리와 봐.”


병진이가 다가와 손에 꼭 쥐어 준 것은 십 원짜리 동전이었다.


“맛난 것 좀 사먹어라.”

“에이, 이게 뭐야?”

“말로만 하면 성의가 없잖아.”

“십 원으로 뭘 사먹냐?”

“넌 나한테 돈 줘 봤어? 이게 사람 성의를 무시하고.”

“내가 백 원 줄게. 흥분을 가라 앉혀봐.”

“그래. 알았다.”


병진이에게 함부로 할 형편이 아니었다. 병진이가 돕지 않으면 민성 오빠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해지는 것이다. 병진이의 더운 콧김이 차가워질 때를 기다려 민성 오빠의 지갑 이야기를 꺼냈다.


“민성 오빠 지갑 말이야 집에 가보니까 있더라. 그래서 갖고 왔어.”

“지갑? 찾았다고 하던데. 너 뭐야, 지금?”


정말 지갑을 잃어버렸던 거구나. 나에게 연락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적지 않은 실망감이 몰려왔다.


“잃어버리지도 않은 지갑을 왜 니가 갖고 있어?”

“······.”


거짓말이 들켜버린 것쯤은 별로 당황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그저 나 혼자의 착각에 빠져 있었단 것이 너무 창피했다.


“나 민성 오빠 좋아하나봐.”

“남자 친구도 있는 얘가 그러면 안 되지. 어제 서루 오빠 보니까 사람 정말 좋던데 왜 그러니?”

“몰라. 나도 모르겠어. 근데 거짓말을 해서라도 다시 보고 싶었어.”

“이제 곧 결혼할 얘가, 너 정신 한참 나갔구나.”

“병진아! 부탁이다. 나 오빠 연락처 좀 가르쳐주라.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싫어.”


병진이는 단호하게 거절을 해버렸다.


“그러지 말고. 너 어제 내가 산 니트 마음에 든다고 했지? 그거 줄게. 가르쳐 줘라.”

“싫다니까 왜 그래?”


냉정히 거절을 하는 병진이에게 다시 말을 꺼낸다는 것은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좀 가르쳐줘라. 오빠가 싫다고 하면 안 만나면 되잖아. 니가 중간에서 왜 그러는 건데.”

“너랑 그 오빠 안 어울려.”


‘안 어울린다고?’


병진이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란 것을 대체 어떻게 안다고.


“무슨 소리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내가 부족하다는 거야?”

“둘은 아무 문제없어. 각각으로 보면 아무 문제도 없다구. 너 어제 내 자주색 원피스 기억나?”

“응.”

“너랑 그 오빠가 그래. 나도 문제없고, 옷도 문제없는데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너랑 오빠도 어울리지 않아. 오히려 한 쪽이 깍여 내려가는 거야.”

“네가 보기에 왜 안 어울리는데? 뭐가 문제야?”

“그냥 그래. 둘은 안 어울려.”


병진이는 그 후로는 아예 입을 닫아 버렸다. 몇 번 질문을 더 해 보았지만 그 입은 다시 열릴 생각이 없는 듯 했다.


“너 월급 때문에 그러는 거지? 내가 서루 오빠랑 결혼해야 월급이 올라가니까.”

“너다운 발상이다. 사람 좀 그만 좀 괴롭혀. 넌 할 일도 없어?”

“이유라도 말해 달라고. 너 진짜 월급 때문에 그러는 거면 엄마한테 잘 말해 줄게.”

“너 지금 내가 어렵다고 사람 우습게 보는데, 나 돈 몇 푼 때문에 친구 마음 뭉개는 그런 사람 아니다. 네 그런 발상 때문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야. 너한테는 서루 오빠가 딱이야. 그런 오빠한테 고맙게나 생각해.”


‘돈 때문이 아니면 뭐라는 거야? 다른 이유가 어디 있다고. 민성 오빠를 아직 좋아라도 하는 건가?’


병진이의 속마음을 끝내 알 수 없었고, 연락처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일요일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내 마음이 요동치는 것과 반대로 정말 아무 사건도 없이 시간은 잠잠히 흘러가고 있었다. 당장 목소리라도 듣지 못하면 숨이라도 헐떡 넘어갈 것만 같았는데 아직 민성 오빠는 내게 목숨줄인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절벽에 줄 하나를 의지하고 대롱대롱 매달린 나를 지탱해주는 든든한 밧줄은 아니었던 것이다. 내심 그 사실에 안도하면서 나는 그 절벽에서 서서히 탈출하고 있었다.


“혜림아, 니 셋째 언니 남자 생겼나봐.”

“누구? 봤어?”


언니들의 동향을 살펴 매일 내게 말해주던 병진이가 목요일 점심시간에 호들갑을 떨며 다가왔다.


“요즘에 자주 오더라구. 거의 매일 오는 것 같았어. 니 언니도 그 사람 보며 요렇게 웃는 게 심상치 않더니 점심 먹으러 밖으로 같이 나간 거 같애.”   


그 말을 하며 셋째 언니를 흉내내듯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누구지? 길 건너편 안경집 사장인가?”

“그건 내가 저녁때까지 알아봐줄게. 니 셋째 언니는 물어보면 대답은 잘 해주더라구.”


결혼 경쟁자가 나타났다는 것에 약간은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찜질방을 하며 평생 여유롭게 생활을 한다는 것은 미래 생활 계획이었고, 든든한 서루 오빠덕에 그 일이 틀어지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는 내게는 놓칠 수 없는 밥줄이었다.


“알았어. 고마워.”

“점심부터 먹자. 먹고 발 맛사지 가르쳐줘.”

“진짜 열심히네. 배워서 어디다가 쓰게?”

“울 자기 발맛사지 해주려고 그런다. 서서 일하는 걸해서 그런지 맨날 발이 부어서 얼마나 불쌍한데.”

“그 놈의 자기 타령은. 알았어. 오늘은 뭘 먹을까?”

“햄버거 먹자. 정보 물어왔으니 니가 사.”

“알았다. 알았어.”



‘이를 어쩐다. 빨리 상견례 날짜를 잡아야지. 엄마한테 지금 바로 말해야겠다.’


햄버거를 먹으면서 결혼에 대한 내 의지를 더욱 굳세게 다지고 있었다.


부족한 잠이 오후를 아주 힘겹게 하고 있었다. 퇴근시간 두시간전부터는 거의 몽롱함속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민성 오빠와 결혼에 대해 조급해지는 마음, 그리고 부족한 잠이 몸과 마음을 아주 축 처지게 했다.


“어머!”


바로 잠을 청할 생각으로 집에 들어갔을 때 둘째 언니의 방에서 외마디 외침 소리가 들렸다.


“언니, 왜 그래?”

“삼돌이가 죽었나봐. 전혀 움직이질 않네.”


언니의 애완용 해삼 삼돌이는 정말 축 처지다 못해 푹 퍼져있었다. 잘라놓은 지 오래된 해삼처럼 전체가 흐물흐물해진 것이 죽은 것이 분명했다.


“에구. 불쌍한 것.”


둘째 언니는 삼돌이를 애처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삼돌이의 죽음은 늘어진 내 오후를 더욱 우울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그렇게 왜 해삼 같은 걸 키워. 줘. 내가 버릴께.”


언니는 손을 가로젓더니 나를 앉히는 것이 또 푸념을 늘어놓을 생각인 것 같았다.


“삼돌이를 처음 본 건 늦은 밤 혼자 집으로 올 때였어. 그러다 실내 포장마차에 있는 파란 페인트칠 한 어항에서 이 놈이 꿈틀대고 있는 걸 봤지. 배도 출출하고 내가 워낙에 해삼을 좋아하잖아. 그래서 한참을 들여다보며 살까말까 고민을 했다. 혼자 먹을 수는 없고, 집에 입이 몇 개냐? 그거 다 채우려면 지갑도 텅 빌 것 같아서 그냥 집에 왔어.”

“그럼 언제 산 건데?”

“들어봐. 그 다음날 출근을 하는데 삼돌이를 또 본 거야. 가게 문은 닫았는데 어항은 보이더라구. 이 삼돌이가 아주 씩씩하게 꿈틀대고 있더라. 내가 사갔으면 어제 내 입으로 들어갔을 놈이 생기 있게 움직이고 있더라구. 나 말구도 또 몇 명이 이 놈을 먹을까 말까 했겠지. 삼돌이는 죽음의 경계에서 벗어났던 거야. 그러면 뭐하니? 또 밤이 찾아올 건데. 그 때 내가 살려줘야겠다 그런 생각이 든 거야. 꼭 나 같더라구. 살려고 바둥바둥 대는 꼴이. 이제 맘 편히 갔겠지?”

“내가 좋은 곳으로 보내줄 테니까 이리 줘.”


난 삼돌이가 들어있는 냄비를 들고 방 밖으로 나왔다. 둘째 언니의 ‘맘대로 안 되는 것이 인생’ 시리즈의 하나일 뿐이었지만 그날따라 내 마음을 싸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사실 해삼들이 먹어달라고 꿈틀대는 것도 아닐텐데 나도 맛있겠다 입맛 다시며 바라보곤 했으니까. 살려고 바둥대는 것이 어떤 것이 알 것 같았다. 지금의 심정이라면 나도 꿈틀대는 해삼이 있다면 사오고 싶을 것만 같았다.


‘이건 아니지. 노처녀 히스테리에 말리면 안돼. 내가 그래서 결혼을 일찍 하려고 한다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민성 오빠를 보기위해 바둥대는 나에게 병진이가 자비를 베풀었으면 하는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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