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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wi (키위) - 32. 오공주 뭉치다

나비 |2005.01.06 14:08
조회 1,563 |추천 0

kiwi - 32


“언니, 눈썹 짝짝이 같은데. 왜 이리 긴장해? 관심 없다면서?”


어제 늦은 밤 제이 오빠의 선물을 건네주며 아침 출근시간에 집 앞에서 만나자는 메시지를 전달했을 때만 해도 관심 없다고 했던 언니였다. 선물은 한 번 뜯어보고 서랍에 넣어버린 채 꺼내 보지도 않던 언니도 내심 긴장은 되었는지 화장을 하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니가 봐도 그러니?”

“오늘 따라 너무 진해서 촌스럽잖아.”


나도 민성 오빠를 만나러 아이스하키장에 갔던 그날 유독 눈썹 화장만은 하기가 어려웠었다. 마음은 급하기만 하고, 그를 만날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차라리 드러내놓고 예쁘게 보여야 돼, 하며 호들갑을 떨어야 어울 릴 것 같은 언니는 설레는 것이 보이는 데도 일부러 태연해 보이려고 애썼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보여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나는 언니 몰래 화장실에서 제이 오빠에게 문자를 보냈다


[집 앞에 왔어요? 언니 지금 화장 하면서 막 떨고 있어요. 정말 귀여워요.]

[집 앞이에요. 정말 귀엽겠다. 근데 저도 떨고 있어요 ^^*]


나이 값 못하게 귀여운 커플이군.


“언니, 아직 멀었어?”

“잠깐만. 너 먼저 가던가.”

“무슨 면접 보러 가? 대충하고 나가자.”

“다했어. 이젠 짝짝이 아니지?”

“제이 오빠 때문에 긴장돼?”

“내가 왜 걔 때문에 긴장을 하니? 니가 짝짝이라고 하니까 고치느라 그런 거지.”


말은 아니라고 했지만 언니의 얼굴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단 몇 시간 만에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비록 싹이 움트고 있는 작은 화분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많지 않았지만 살아있는 에너지는 무한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머리는 복잡했던지 눈동자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마도 머릿속은 여러 시나리오로 엉켜있을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의 표정은 어떻게 지을까, 선물에 관해서는 뭐라고 해야 할까. 지겨웠던 일상을 벗어나 이제 그녀의 자기 인생의 감독이었고, 여주인공이었다. 그것도 이야기의 가장 절정에 다다른. 


묘향 언니가 제이 오빠를 만나는 것을 보고 찜질방에 온 나는 언니가 돌아오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비단 나뿐이 아니라 네 여자 모두 초조한 기다림 속에서 묘향 언니가 가져올 이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혜림아! 니네 언니왔어.”

“청옥 언니, 묘향 언니 왔대.”

“큰 언니! 묘향이 왔대. 빨리 나와봐.”


순식간에 네 여자는 묘향 언니를 중심으로 모여 앉았다.


“어떻게 됐어? 만나재? 만나기로 했어?”

“나 목타. 음료수 좀 줘.”


표정은 나쁘지 않았는데 만나는 동안 에너지를 쏟고 온 모양이었다. 솔직함보다는 감정을 숨기는 것이 더 큰 에너지를 소비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약간은 불안하다, 생각을 하며 음료수를 가져다주었다.


“걔가 그러는 거야. 다시 사궈 보자. 못 보는 동안 그리워서 혼났다.”

“웬일이니, 웬일이니. 멋있다. 그래서?”


둘째언니가 호들갑스럽게 물었다.


“내가 딱 그랬지. 넌 나한테 옛 남자다. 옛 남자가 이렇게 나타나는 건 참 당황스러운 일이다.”

“오호, 세게 나갔네. 왜 그랬어?”

“부드럽게 대할 이유가 없지. 나도 자존심이 있는데.”


언니는 음료수를 들이키며 자신이 한 말에 꽤 흡족해하는 듯 했다.


“맞아. 잘했다. 여자는 튕겨야 돼. 넙죽 받아주면 고마운 줄을 몰라요. 계속 자기만 기다렸겠 거니 한다니까.”

“언니는 가만히 있어봐. 그래서?”


평소 튕겨야 산다는 지론을 펼친 큰 언니의 말을 둘째 언니가 잘랐다.


“그랬더니 아무 말도 안하고 눈만 부릅뜨고 쳐다보는 거야. 그러고 한참을 가만히 있어. 아차 싶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아쉬운 소리를 할 수도 없잖아. 그래서 ‘비켜줘. 나 출근 해야돼.’ 말하고는 혼자 걸어갔지. 근데 뒤쫓아 오더니 내 어깨를 딱 잡는 거야. ‘누나! 나 누나 아니면 죽어버릴 거야. 일도 내 이름도 이젠 누나가 없으면 의미가 없어. 진짜 죽을 거야. 그래도 갈 거야?’ 너무 세게 나오니까 할 말이 없더라구. 좀 더 튕겨야 하는데 ‘그냥 죽어라’ 할 수는 없잖아.”


네 여자들은 숨이 꼴까닥 넘어갈 지경이었다. 내 충고를 따른 것이라고 해도 그 말을 하고 있는 제이 오빠를 상상하고 있노라니 나까지 가슴이 뛸 정도였다.


“진짜 죽겠대? 그렇게 말했어?”

“설마 진짜 죽겠어. 다 말이지. 그랬으면 남자들 절반은 죽었겠다.”

“아, 그냥 가만히 좀 들어. 나이 들면 다 언니처럼 돼?”

“네가 할 말이냐?”


큰 언니는 샘이 났던 건지 계속 삐딱선을 타고 있었고, 둘째 언니는 묘향 언니의 이야기에 심취되어 큰 언니의 말을 나쁜 심보에서 나온 말로 재껴두고 있었다.

묘향 언니는 자신에게 닥친 꿈같은 일을 흥분하며 경청하는 우리들 때문에 더 흥이 나는지 상황을 액션까지 취하면서 설명해주었다.


“내가 이렇게 서있고, 제이가 오른쪽 어깨를 잡은 거지.

몸을 틀었는데도 어깨를 잡은 손을 놓지를 않는 거야.

일단 ‘이거 놔’하고 냉정하게 말했어. 그래두 안 놓더라.

‘넌 나한테 옛 남자라고 말했지. 네가 연락을 끊은 그 날부터 넌 내게 옛 남자였다구. 내게 손 댈 자격 너한테는 없어.’

냉정하게 하려고 했는데도 소리가 버럭 나오더라.

가까이서 보니 옛날 생각이 갑자기 더 나더라구.

지 멋대로 연락 끊은 건 걔잖아. 그리고 지난 세월이 얼마야.

무슨 자격으로 날 잡나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 그런데도 안 놔주는 거야.

‘이거 놓으라고.’ 하니까

윤기가 ‘이거 놔주면 가버릴 거잖아. 이젠 다시 누나 놔주지 않을 거야.’ 그러는 거 있지.”


“까악!”

“웬일이니, 웬일이니.”

“너무 멋진 거 아냐?”


둘째 언니는 혼자 손뼉을 치고, 병진이는 내 등짝을 마구 내려치고. 큰 언니는 얼굴이 달아오르는지 자기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난리였다.

한 남자를 두고 여러 여자가 자신과는 상관도 없는 일에 기뻐하는 풍경은 아주 이상한 것이었지만 우리는 축제의 밤 길 한복판을 달리며 괴성을 질러대는 사람들과 같은 기분이었다. 분명 부러움이 섞여 있었지만 그보다는 모두들 묘향 언니를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있었다.


“형부 진짜 멋진데.”

“누가 형부야?”


내 말을 셋째 언니가 잘랐다.


“그 손을 뿌리치면서 내가 말했지.

‘넌 쉽게 오고, 쉽게 가는 그런 애야. 내가 뭘 믿고 널 받아줘야 하는 건데?

니가 정말 찾고 싶었다면 여태껏 날 찾지 못했던 이유가 뭐야?

아직도 날 우습게 보는 거지? 너 같은 어린 애한테 다시 말릴 생각 없어.

난 이제 여우를 열두 마리는 삶아 먹은 삼십대라고.’

그렇게 말하니까 아무 말도 못 하더라구.

그래서 그냥 왔는데. 잡지도 않더라.“


“아악! 그게 뭐야?”

“너 제 정신이냐? 삼십대라는 것을 자랑하고 싶든?”

“여우를 삶아먹은 게 아니라 살쾡이를 삶아먹은 것이야? 그렇게 사납게 말을 하면 어쩌니? 여지는 주고 왔어야지.”


묘향 언니가 졸지에 역적이 되는 분위기였다. 놀람, 절망, 분노에 휩싸인 네 여자들을 당장 언니를 삶아먹을 기세였다.


“아니, 나도 말하면서도 좀 심했다 하긴 했어. 그래도 지금 마음은 그래. 다시 시작하기는 힘들 것 같아. 연예인 만나다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구. 나이가 어린 것도 감당이 안돼.”


제이 오빠는 여자들의 수다에서 하나의 자랑거리로 끝나고 마는 것인가? 지난 일에 대한 벌은 받아야하지만 묘향 언니와 잘 되길 빌었는데.

누구의 편을 들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언니의 말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기에.

둘째 언니의 쿠사리로 이야기는 마무리가 되어 가는 듯 했다. 모두들 생각에 잠긴 가운데 병진이가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언니들, 저 고민이 있는데.”

“뭔데? 남자 문제?”

“예.”

“언니들이 아무래도 남자에 대해 잘 아실 것 같아서요.”


아까부터 평소보다 어두운 표정이라고 생각은 들었었는데 영규 오빠와 문제가 있는 모양이었다. 얼마나 심각한 이야기길래 내게 얘길 안하고 언니들에게 상담을 받으려는 걸까?


“말해봐. 뭔데?”

“왜 남자가 바람피든?”

“노름하니?”

“그런 건 아니고.”


병진이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술버릇이 안 좋아? 술 먹고 때리든?”

“말 못하는 거 보니 밤에 문제 있는 것 아니야?”

“얘는 젊은 남자가 밤에 문제가 있을라고.”


내겐 익숙한 대화였지만 병진이 앞에서 호들갑스러운 것은 조금, 아주 조금 창피했다. 진지하게 상담을 요청한 건데 점잖게 들어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각자 짧은 상상력을 발휘하며 시끄럽게 떠들어대니 더 이야기하기가 곤란한 모양이었다.


“남자 친구가······.”


병진이는 손으로 입을 막는가 싶더니 눈물을 참고 있었다.


“뭔데? 말해봐. 우리 다 너 친동생처럼 생각해. 편하게 말해.”

“친동생보다 더 아끼지. 혜림이가 고민 있다고 하면 돈 받고 상담해주는데 공짜로 해줄게. 왜 헤어지재?”

“그건 아니구요. 저한테 싫증났나봐요.”


끝내 울음을 터트려버린 병진이.

싫증난 여자는 잊혀진 여자만큼이나 비참한 것인데. 언니들은 그 기분을 잘 알고 있는지 금방 병진이의 슬픔에 전염이 되어버린 듯 보였다.


“울지 마. 바보처럼 왜 울어?”


셋째 언니는 병진이의 등을 쓸어주었고, 병진이는 더욱 슬픔에 받치는지 언니의 품안에서 눈물을 흘렸다.


“남자란 것들은 왜 그런지 몰라. 지들 생각은 안하고 새 거만 좋아해요.”

“잠깐 얘기를 들어봐야지. 아직 싫증이 난 건지 아닌지도 모르잖아. 그냥 지나가는 권태기일수도 있고.”


언니들 모두 자신의 편이라는 것에 안정을 찾았는지 병진이는 눈물을 닦더니 말을 시작했다.


“지나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어제는 저보고 지겹다고 말했어요.”

“그런 말을 대놓고 했단 말이야. 나쁜 놈.”

“호박이 넝쿨 채 들어온 걸 몰라보고 발로 차내고 있네.”


흥겨웠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다섯 여자는 모두 병진이가 되어 그녀의 슬픔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키위는 피자를 시켜라.”


전의에 불타오르는 언니들은 식량까지 챙겨가며 병진이의 아픔을 함께 나눌 채비까지 했고, 셋째 언니는 병진이의 등을 계속 쓸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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