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가 뵈이는 것이 없으렷다!"
초율은 분노하여 소리쳤다. 아화는 밀고 당기기가 끝이나고 결판을 지어야 하는 막다른 길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이제 더이상 물러설 수조차 없었고 물러서기도 싫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올려 렌즈를 빼내었다. 렌즈가 빠지자, 그녀의 초록색이었던 눈동자는 보랏빛으로 바뀌어 드러났다. 초율과 같은 보라색의 눈동자였다.
아화의 돌발적인 행동은 초율을 약간의 호기심으로 끌어당긴 것이 분명했다. 초율의 분노가 약간 사그라들면서 아화에게 다시 한 번 상황을 바꿀 기회가 생겼다.
" 놀라셨습니까? 보시다시피 전하와 같은 보라색 눈동자입니다. 황족과 왕족의 정통 혈족에게서만 전해지는 자주빛이지요. 마치 특권인 마냥, 이 빛깔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은 더더욱 그들끼리의 혼인에 집착을 하고 있지요. 아름답고 신비한 보라색이긴 합니다."
" 어째서 네가 그러한 눈을 가지고 있느냐?"
초율은 마침내 아화에게 처음으로 질문을 하였다.
" 제 아비는.....왕족이었습니다, 전하. 그리고 제 어머니는 귀족이었지요."
초율은 그 말에 약간의 모순을 느꼈고 아화도 초율이 그러한 생각을 하리란 걸 알고 있었다.
" 물론 보라색의 눈동자는 왕족이나 황족의 순수한 혈통에서만 생깁니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혼혈에서도 한 쪽의 강한 흔적이 나타나곤 합니다. 그래서 저 역시 비록 어머니께선 귀족이셨지만 보라색의 눈을 가지게 되었나봅니다."
초율은 그 말을 공감했다. 이미 있을 수 없는 일을 겪은 초율이었다. 아미산의 신성한 호수에 가지 않고서도 그는 성인식을 치루었지 않는가. 불가사의한 일을 몸소 경험한 그에게 아화의 보라색 눈동자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초율의 성인식-있어서는 안될 일의 실현이었다.
관지와 나이가 같은 초율은 마땅히 그 해 성인식을 치뤄야할 순서였다. 500살이 된 황족과 왕족은 반드시 성인식을 치루어 그 자격을 검증받아야했고 인정받지 못하면 죽거나 숨어살아야만 했다. 그만큼 그 의식은 중요했고 통과하지 못하면 죽음과 같은 수치스러움만이 남았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초율은 성인식을 치르지 못했다. 아예 의식에 임할 기회조차 없었던 것이다. 초율의 탄생을 알고 있던 비류천과 몇 명의 황비들, 제 1황자 후강과 제1 황녀 지우는 초율이 성인식을 치르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의도적이었든 의도하지 않은 바이든간에 어쨌든 그는 성인식을 치르지 못했고 진정한 성인이 되지 못한 것이다. 철저하게 자신을 가린 초율의 가면과 갑옷으로 인해 그가 어떤 신체적 변화를 겪었고 천계의 문양을 어디에 얻었는지 알 수도 없었기에 모두 그가 성인식의 낙오자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수치스러운 황자인데도 비류천은 무슨 일인지 함구하고 초율이 황궁에서 생활하도록 놓아두고 있었고 그의 자녀들도 비류천의 뜻을 따라 침묵하고 있었다. 다행히 초율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비류천에게서 버려졌고 모두의 눈을 피해 유모의 손에서 키워진 탓에 비류천과 몇 황비들, 후강, 지우를 제외한 그 누구도 초율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니 다른 지배계급들 중에서는 초율의 성인식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초율의 나이에 대해 애초에 관심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일터였고, 혹은 제 4황자로 불리는 탓에 관지보다 연배가 어리다고 생각하여 성인식이 수 년 후에나 이루어질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몇몇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초율의 성인식은 묻혀있었고 결국 비류천의 눈에 초율은 이단이었다.
초율은 아화가 렌즈를 끼고 살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그녀의 생존과 관련된 일이었다.
" 보랏빛의 눈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제게는 저주였답니다."
아화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처음부터 웃는 얼굴로 만들어진 밀랍인형같았다.
" 황족이었던 아버지는 좀더 높은 권세를 위해서 어머니를 버렸습니다. 황녀와 혼인하여 황가의 일가로 높은 권세를 얻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어머니와 뱃 속에 있던 저를 죽이려하셨습니다. 도망쳐 나와 갈 데 없던 어머니를 받아주고, 제가 세상에 나오도록 도와 준 그들은 귀족도 왕족도 아닌 이름없는 천민들이었답니다."
초율은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아까의 분노는 기미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그는 모처럼 진지하게 남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 제 눈동자의 빛깔이 제 목숨을 위협하는 것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눈동자의 색을 숨기고 살았지요. 그리고....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아화는 잠시 말을 쉬었다.
" 오갈데 없던 방랑자였던 남자를 그 착한 천민부락의 사람들은 또 다시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그를 위해 집을 지어주었습니다.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어 그를 받아주었지요. 저 역시 그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 배신을...당했군."
초율은 아화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떨리는 것을 감지하고 말했다. 아화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는 슬퍼보였다.
" 행복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곳을 보는 행복이 어떤 건지 전하도 아시겠지요? 그대로 세상이 끝나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비에게 버려졌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다 잊을 수 있을만큼 그 사랑에 취했습니다. 하지만....."
".........."
" 헛된 소문이 돌았고 그는 그 소문에 미쳐 제 사랑을 믿지 않더군요.질투의 화신이 되어...그는 군대를 몰고 왔습니다. 그는....그는...황족이었던 거에요. 여태 자신을 위해 아낌없이 마음을 열었던 천민들을 망설임없이 죽여버렸습니다."
아화는 젖은 눈으로 초율을 바라보며 절규하듯 말했다.
" 전하...누가 쓰레기인가요? 누가 버러지만도 못한가요? 태생이 나쁘다는 이유 말고 무슨 근거로 천민들이 쓸모없는 존재인가요?"
아화의 목소리는 절실하게 떨렸다.
" 손발이 부르트도록 논밭을 갈아 먹을거리를 생산하고 실을 자아 비단옷을 짓지 않습니까? 산천을 가꾸어 모든 필요한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모두 천민들이 하는 노릇 아니더이까? 어째서 전하께오선 우리를 쓸모없다 하시나이까?"
초율은 동요하고 있었다. 아화의 애절함이 가슴에 와닿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초율은 이미 들은 바가 있었다. 초율은 아화의 말 속에서 슬프도록 사랑했던 한 여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 하늘은 사람을 낼 때, 구분하여 내놓지 않아요. 모두가 나름의 쓸모를 가지고 태어나는..."
아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초율이 갑자기 달려들어 양 손으로 아화의 어깨를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초율의 마음 속에서 일어난 거대한 감정의 파도가 전달되어 오고 있었다.
초율은 지금 아화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모든 걸 주어 사랑한 묘아(가교)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항상 하던 말이었다. 그녀는 바람이 포근하게 불어오는 촉룡산의 언덕에서 제휴수에 등을 기댄 초율에게 안겨 그렇게 말하곤 했다.
' 보세요,전하. 바람 한 줄기에도 온 몸으로 반응하고 있는 초목과 곤충들을요. 모두가 살아 움직이고 있고 느끼고 있어요. 서로 다르지만 다같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답니다. 전하와 저도 그래요. 우린 서로 다르지만...이렇게 살아가고 사랑하고 있잖아요? "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초율을 돌아보면서 그렇게 말하곤 했다.
" 황족과 천민..그게 무슨 소용인가요? 우린 똑같이 알몸으로 이 땅에 태어난 걸요. 살아있는 것은 공평하게 소중한 거에요. 하늘은 그렇게 모든 생명을 낳았답니다."
입버릇처럼 황족이든 천민이든 날 때는 다 같은 사람일 뿐이라던 묘아였다. 다시 그런 말을 듣게 될 거라고 초율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초율은 놀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아화는 거칠게 놓아주면서 명령했다.
" 묘영을 만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