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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wi (키위) - 37. 엄마가 보고 싶어

나비 |2005.01.10 17:35
조회 1,473 |추천 0

kiwi - 37


“국민은행 사거리에서 우회전? 아저씨, 국민은행 사거리에서 우회전이래요. 우회전해서 이백 미터가면 문구점 있다고? 거기서 내리면 되는 거지? 지금 나올 거야?”


집도 가족도 다 버리고 선택한 남자가 자신을 버리고 도망을 가버렸는데 친구에게 길을 설명해주고 있다니.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을 하고 있을 때는 그 남자가 없으면 마치 죽을 것처럼 굴게 된다. 하지만 이처럼 그가 떠났을 땐 절대 죽지 않는다. 급하게 친구의 위로를 찾는다. 떠나간 남자 없이 다시 살아보겠다는 의지가 생기는 것일 거다.


날 마중 마온 병진이는 생각보다 충격이 심했던지 눈동자가 불안해보이고, 전체적으로 산만해 보였다.


“이 쪽이야.”


모습과는 달리 꽤나 담담히 말했다. 그 모습이 더 슬퍼보여서 와락 끌어안고 괜찮아, 울어도 돼,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빈손으로 온 거야, 남의 집 오면서?”


끝까지 괜찮은 척 할 거니?


“미안해. 빨리 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싶어서.”

“괜찮아. 닭이나 한 마리 시켜먹게. 네가 돈 내면 되지, 뭐.”

“아직 아침도 안 먹은 거지? 치킨으로 되겠어?”

“닭 먹고 싶어. 옛 생각이 나서 그래. 닭 가슴이나 뜯게. 닭 가슴으로 불렸던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


우스운 이야기였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여기야.”


진한 남색 대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키가 큰 남자라면 허리를 조금 숙여야 할 정도의 작은 대문이었다.


“문이 작네. 가구들 넣을 때 힘들었겠다.”

“들어가서 직접 봐라. 가구라고 할만한 건 하나도 없어. 화장실은 이거야. 세 집이 같이 써. 오래 살았어도 화장실만큼은 절대 정 안 든다. 쌀 정도로 급하지 않으면 찜질방까지 참고 간다니까.”


병진이는 열쇠를 주머니에서 꺼내 현관에 달린 자물쇠를 열고,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소개 받을 때는 반 지하라고 들었는데 햇빛이 전혀 들어오질 않아. 잘 때는 좋더라. 밤인지 낮인지 알 수 없으니까 눈부셔서 깰 일은 없어.” 


깜깜했던 방안이 갑작스런 하얀 빛으로 가득 찼다.


“뭐야, 이게? 완전 난장판이잖아.”


방안은 옷가지와 잡스런 물건들이 뒤엉켜 앉을 공간조차 없었다. 병진이는 옷을 밟고 들어가 물건 위에 되는 대로 앉아버렸고, 나도 앉아야겠기에 물건들을 대충 밀어 놓고 있었다. 그런데 병진이가 앉자마자 울음을 펑펑 터트려버리고 말았다.


“어, 엉.”

“왜 울어? 아까는 담담해 보이더니.”

“길거리에서 쪽 팔리게 어떻게 우냐? 지금도 남자 때문에 우는 거 쪽팔린단 말야.”


연신 훌쩍거리며 간신히 말을 했다. 울지 말라고 해서 울음을 그칠 병진이도 아니었고, 마음껏 울게 내버려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잠시 곁에 조용히 있기로 했다. 시간이 길어질 수록 할 일도 없어져서 방안 구석구석을 살펴보게 되었다. 옷을 거는 행거 하나, 침대도 없는 매트리스 하나, 앉아서 쓰는 책상을 탁자 대신 쓰는 듯 했고, 병진이의 말대로 가구라고 부를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생각보다 더 훨씬 초라한 살림살이였다. 하지만 내가 놀란 것은 그 것이 아니라 행복한 기운을 전혀 느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분명 싸우기 전 두 사람이 알콩달콩 사랑을 나누던 공간이었을 텐데 그 기운은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다. 지금 울고 있는 처량한 저 여자와 딱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엄마! 나 엄마······ 보고 싶어.”


병진이의 울음소리는 점점 더 서글프게 변해갔다.


“와 보니 진짜 별거 없지? 완전 장난감 집 같지 않냐? 장난감 집에서 살아도 공주처럼 살게 해 준다고 해놓고. 지겹다고 지 혼자 도망을 가? 나쁜 자식.”

“······.”

“엄마!”


맥없이 우는 그녀를 도와줄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 민성 오빠와 영규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치사한 인간들은 전원도 꺼놓지 않은 상태였다. 전화가 오는지 안 오는지 간질간질 궁금하니까 전화를 꺼놓을 용기도 없는 거다. 그러다 지 친구들 전화는 잘도 받겠지. 순간 화가 확 치밀었다.


“어떻게 할 거야? 계속 울고만 있을 거야?”

“아니, 나갈 거야. 여기 더 있기도 싫어.”

“잘 생각했다. 빨리 짐 싸자.”


우린 정말 열심히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 인간 전화도 안받지?”

“응.”

“비겁한 인간.”


방안에 있는 잡동사니를 모두 가방에 넣고 보니 영규 오빠가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내가 괜히 둘의 이별을 부추기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집에서 나가는 순간 너희는 정말 끝일지도 몰라.”


짐을 싸던 병진이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먼저 짐 싸서 나간 게 누군데. 우린 벌써 끝장난 거라고. 내가 끝낸 게 아니야. 그리고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내가 먼저 나갈 거야. 나갈 거라구.”

“그래도 차분히 생각을 해보자.”

“잔말 말구 빨리 짐이나 싸.”

“집으로 들어가려고?”

“그럼, 어떻게 해?”


병진이가 집으로 가면 둘은 정말 헤어지게 될 텐데. 어쩌나?


“병진아,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 부모님도 너라면 괜찮다고 하실 거야.”

“그래도 될까?”


아직 집에 들어갈 자신은 없는지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럼. 우리는 괜찮지. 일단 우리 집 가서 천천히 생각해 보도록 하자.”

“고마워, 혜림아.”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그 날 밤 밤새 민성오빠와 영규 오빠가 제외된 수다를 떨다 밤늦게 잠이 들었다. 병진이는 오후에 출근하자고 해도 부모님께 죄송하다고 제 시간에 출근을 했고, 나는 두어 시간 모자란 잠을 보충했다. 그 잠이 깬 것은 핸드폰의 진동 소리 때문이었다. 신경 쓰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온 신경이 핸드폰에 쏠려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 제이 오빠잖아?’


“오빠!”

- 자다 깬 거야?

“아니에요. 일어나야 돼요. 무슨 일 있어요? 언니가 어제도 만났다고 하던데.”

- 만나긴 했지. 그런데 그냥 밥만 먹고 헤어졌어. 내가 시간이 없어서. 그래도 앞으로의 문제를 얘기하고 싶었는데 말 꺼내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 분위기더라고. 괜히 만났나봐. 차라리 오래 있을 수 있을 때 만날 걸 그랬나봐.

“오빠가 속고 있네요. 어제도 엄청 자랑하던데요. 바쁜데도 시간 내서 자기 만나러 왔다구요. 오빠 한 번 만날 때마다 자랑을 얼마나 하는지 피곤해 죽겠어요.”

- 진짜?

“그러면서 어떤 생각으로 만나는 건지 얘기 안 해서 짜증난다고 했어요.”

- 내가 또 잘 못한 건가? 마음 상했으면 어떻게 하지?

“언니 오빠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같은 여자로서 느껴져요. 걱정 안하셔도 되요. 일 때문에 당장 결혼은 힘들죠? 언니가 나이가 있어서 그 점도 마음에 걸려 하던데.”

- 나야 누나가 원하면 당장 결혼도 할 수 있어.

“일에 지장 있지 않아요?”

- 일이 문제가 아니지. 이번엔 절대 놓치지 않을 거라고 말했잖아.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세요. 언니도 좋아할 거에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셋째 언니가 부러웠다. 셋째 언니의 지령을 완수하고 전화를 끊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 것이니까 제이 오빠에게 전화가 오면 결혼 문제를 은근히 물어달라는 언니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었다. 이제 셋째 언니는 걱정 할 것이 없구나. 좋겠다. 부러워.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급하게 욕실로 향했다. 오늘은 어제보다 나은 날이 될 것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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