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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학대받고 버림받는 비극의 연속인 여자의 이야기

무명씨 |2005.01.13 19:37
조회 685 |추천 0

일상생활에 감춰진 새도매저키즘의 심리학을 다룬 책을 보다가 일부 발췌한 내용입니다.

앞부분은 빌이라는 흔히 볼 수 있는 비열하고 나쁜 놈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남자와 그 남자에게 당하고 지인에게 하소연하는 주디라는 여자의 일상적인 이야기가 전개되고 그 가운데에 주디의 친구인 에이미라는 여자가 객관적으로 상황을 보고 주디에게 충고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에이미는 주디에게 “넌 왜 항상 그런 남자들만 사귀는지 모르겠다” 푸념하고 그런 에이미에게 주디는 자기에게 그런 남자들을 끌어들이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라고 치부하고 에이미의 충고는 귀담아 듣지않고 자신이 짓밟힌 얘기만을 털어놓으며 모든 남자는 다 그렇다는 결론을 지으며 혼자 납득합니다. 그런 주디에게 에이미는 자신의 말이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고 포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대한 정신분석의인 지은이의 해석을 밑에 발췌하여 옮겨놓았습니다.


<스스로 진흙탕으로 빠져 드는 악순환>


이와 같은 관계는 한 마디로 불행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속박은 단순한 습관도 아니고,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주디와 빌 사이에서 보여지는 악순환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고착된 행동 패턴이 있다.

2. 파괴적 행위는 반사적이라기보다는 의식적인 것이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타산적 도발과 파워 플레이의 표현이다.

3. 학대와 굴욕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공범관계에 있기 때문에 지속되는 것이다.

4. 학대의 공범관계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할이 명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역할이 바뀔 수도 있다.

5.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행위의 동기를 은폐하고 이를 지속시키기 위해, 당사자들은 자기방어적인 정당화에 몰두하고 현실을 부인하려 한다.

6. 이러한 행위는 무의식적 갈등의 징후다.


 이상의 여섯 가지 중요한 특징을 보면, 문제가 되는 학대 행위가 강박적인 성질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이와 같은 행위를 그만두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좀더 자세히 설명해 보기로 하겠다.

 주디와 빌은 고착된 행동 패턴에 빠져 있는 바람에, 반복하여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이와 같은 관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느 한쪽이 화를 잘 낸다든지 이따금 폭력을 휘두른다던지 늘 신경질을 부린다든지 하는 게 아니다. 이들은 양쪽 모두 공격성과 파괴성을 갖추고 있다. 더구나 그것은 폭발적인 것도, 예외적인 것도, 돌발적인 감정의 분출도 아니다. 학대 그 자체는 간단히 예상할 수 있는 진부한 행위의 반복이며, 일종의 의식과도 같다. 오래도록 지속되는 이명(耳鳴)처럼, 실망과 불망이 ‘윙~’하는 단조로운 잡음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주디는 언제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고, 빌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힌다. 에이미가 알고 있듯이(주디 자신도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주디는 언제나 여자에게 관심없고 지배적인 남자를 선택하고, 상처입고 실망하고 굴욕을 당하면서도 여전히 헤어지지 못한다.

 한편, 빌은 항상 주디와 같은 ‘패배자’를 찾아내서 학대하고 무시한다. 어느 쪽인가 한쪽이 이 악순환을 파괴하려고 하면, 예를 들어 주디가 자기 변호를 한다든가 빌이 그녀의 주장을 인정하려 들면, 다른 한쪽(혹은 쌍방)은 긴장과 불안을 느껴 다시 익숙한 패턴을 유지하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주디는, 빌이 자신을 무시하지 않을 수 없게 유도한다. 또한 빌은 화해를 원하면서도 결국 주디를 무시하고 얕잡아 보게 된다.

 이처럼 당사자들은 같은 드라마를 여러 차례 재연한다. 즉, 가해자와 피해자는 예측하지 못한 외부 사건에 반응하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 쪽이 의도적으로 가해자를 도발해서 학대하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 가해자 쪽에서도 이 도발은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에 계산된 행동으로 응수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되풀이되는 고통이나 잔학함에는 부자연스럽고 기묘한 점이 있다. 당사자가 자신의 불행을 운명의 장난이나 누군가의 잘못 탓으로 돌리려고 해도, 에이미와 같은 방관자에게는 그러한 패턴이 눈에 똑똑히 보이는 것이다.

 주디는 자신은 결백하다고 주장하며 빌을 책망한다. 잘못은 빌에게만 있다. 반성하기를 회피하는 주디에게 “빌어먹을 새디스트”는 어디까지나 빌이다. 그러나 빌이 멀어지고 화를 내고 혐오하고 성질을 내도록 유도하는 것은 주디 자신이다. 그런데도 주디는 자기의 그런 모습을 직시하려 하지 않고, 빌에게 끈덕지게 달라붙는다. 빌이 자기 생각대로 반응하지 않아도 상관없이 계속한다.

 한편 빌은 자신은 정직하다고 주장하며 주디를 욕보이고, 다른 여자가 있음을 과시하면서 주디를 비웃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관계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 양쪽 모두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취하고 있는 셈인데,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조작이 가능한 것은 당사자 양쪽이 공범인 경우뿐이다. 즉, 관계가 진흙탕에 빠지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발걸음이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은 경우 가해자와 피해자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통속적인 심리학자는 언뜻 보기에 순수한 피해자로 보이는 측과 가해자와의 공범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이러한 상호 작용을 ‘상호 의존’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피해자와 가해자 양쪽 모두의 동기를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고 말하긴 어렵다. 사실 피해자와 가해자 양쪽이 모두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는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상대를 구하고 있는 셈이다. 이용당하는 인간의 동기가 이용하고 있는 상대에 대한 애착이라는 통속적인 심리학적 해석으로는 그 점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결합은 본질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보통 여자(예를 들어, ‘베티’라고 하자)는 남자(‘잭’이라고 하자)가 데이트 약속을 해놓고 두 번이나 바람을 맞히면, 관계는 끝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주디와 다른 점이다. 베티는 빌과 같은 비상식적이고 요구하는 것이 많은 상대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 한 사람, ‘에이브’라는 남자가 있다고 하자. 그는 빌과는 달리, 파트너에게 굴육을 주는 건 꿈에도 생각지 못한다. 그러나 주디는 에이브와 같은 유형의 남자에게는 금세 싫증을 느낄 것이다. 불안과 고통에 시달려도 주디는 ‘못된 녀석’을 찾아 헤매든가 아니면 ‘좋은 녀석’을 도발해서 학대하도록 유도할 것이다.

 남자는 얼마 동안은 주디의 도발을 꾹 참겠지만, 차츰 도발에 응하게 되고 이윽고 무엇에 홀린 듯 학대에 전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긴장과 불쾌감이 높아지고 양심의 가책을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어떻게 될까? 에이브 같은 남자라면 가능한 한 깨끗하고도 신속하게 관계를 끝낼 것이다.

 그러나 빌과 주디 같은 유형은 이와는 반대로, 스스로 자진해서 진흙탕 같은 관계로 빠져 들어가 서로에게 분노를 퍼붓고 서로를 헐뜯고, 가장 나쁜 모습을 서로에게 보여 주게 된다.

 여기서 자신과 상대에 대한 파괴적 상호작용의 가장 놀라운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양쪽이 서로 아주 애매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역할의 교환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피해자 자신이 일견 가해자로 보이는 상대만큼이나 파워 플레이를 조절하고 있는 셈이다. 양쪽 모두 고통을 견뎌 내고, 서로를 공격함으로써 상대의 감정을 긁으며, 상대와 자기 자신에 대한 행위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왜 일상생활에서 매저키즘과 새디즘은 항상 ‘새도매저키즘’의 관계가 되는가? 그것을 알기 위해 이와 같은 파괴적인 2인조로부터 볼 수 있는 ‘스스로를 벌하는 성격과 무의식적으로 도착된 동기에 관해 한층 더 깊이 파고 들어가서 고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주디가 빌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주디가 늘 계기를 만들어서 빌의 반응을 유도하고 있기 때문에, 빌의 나쁜 면이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한편, 직장에서는 빌이 주디와 같은 역할을 맡고 있어서, 속 좁고 남의 결점을 찾아내는 것이 특기인 상사에게 아부한다. 권위 있는 남성을 대할 때 빌은 주디가 당하고 있는 것과 같은 학대를 감수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긴 하지만, 주디와 빌의 상호관게에서는 “빌이 주디를 항상 문 앞의 매트처럼 취급하여 흙 묻은 발로 짓밟는다”는 기본적(외적) 역할이 고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좋아하든 싫어하든 상관없이, 완벽한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쨌든 커플의 관계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서로가 상대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면, 경계선과 역할 분담이 무너져 버린다. 어느 쪽이 더 많이 괴로워하고 어느 쪽이 학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점점 더 단정하기 어렵게 된다.

 또 한 가지, 시간이라는 요소가 있다. 빌과 주디의 경우 동거한 기간이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아직 쓸데없는 말다툼으로 시간을 보내는 정도까지는 아니다. 이 말다툼이라는 것은 꽤나 골치 아픈 것이라서, 대다수 커플의 고민거리가 되고 있다. 말다툼이란 서로가 상대를 비난하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어느 쪽이 더 나쁘다고 판단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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