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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까요...

손경훈 |2005.02.03 05:09
조회 706 |추천 0

BODY {FONT-FAMILY: 굴림;FONT-SIZE: 10pt;} P {margin-top:2px;margin-bottom:2px;} 이 곳 서울은 2월3일입니다.
별스럽게 올 겨울은 유난히 이렇게 추운지 거리엔 인적이 거의 없습니다.
곧 있을 설 명절도 얼마 안 남았군요.
마음 따듯한 날이기도 하지요.
가족 이라는 말이 더욱 생각나는 날이구요
제 엄마와 연락이 됐으면 합니다.

제가 세살 못 됄 무렵 이니까 34-5년 전에 혼자스웨덴 가서 그 곳 에서 12-14살 정도 위인분과 지금껏 4명의자식들과 살고 있는 걸로 압니다.지금 제 엄마는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겁니다.저는 중 고교 다닐 때 외가 쪽 친척분 한테 들은 예기로는 외할아버지 앞으로 돈을 보내고 있고.내 앞으로 집도 사 놨다 고 걱정 하지 말라 하더군요. 그건 제게 아니니까 미련은 두지 않았습니다. 대학을 입학했고 그 해 1990년 일본 유학을 가서 돈이 없어서 1년 반만에 와서도 내 자신 을 알고 내 형편을 안 뒤부터 는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습니다.지금껏 핏덩이부터 저를 거두어 주신 친할머니와 단둘이 살아 오는 동안 생활은 너무 어려웠죠. 일본에서 돌아온 다음해에 돌아가시고, 저는 혼자가 됐습니다.34년 동안 부재나 다름없는 아버지(57세)도 작년2004년11월에 돌아가셨습니다.백혈병에 걸린 자식 에게 도움도 전혀 못 준 게 아마 한이 됐을 겁니다.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아버지 얼굴 본지가 사는동안 얼마 안 돼 는 평범치 못한 환경 이 었 습니다.저는 부모님들에겐 잊혀진 존재고 자신 들에게 원망도 하지 못하게 하며 사는 거 보면 두분 평범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두분 에게 누가 돼지 않 으 려 노력했고 원망도 없습니다.어릴 적 부 터 힘든 여정의 연속이었지만 지금까지 지난 일은 모두 소중한 추억이며 항상 긍정적인 삶으로 살아왔습니다.앞으로도 지금처럼 떳떳하게 살아갈 겁니다.
저는 제 형편과 마음으로 광주 5 18 국립묘지에 고인이 원하는 곳으로 모셔 드렸습니다.철저히 혼자였기 때문에 반듯하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착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했습니다.일본에서 나와 돈을 벌어야 겠다는 생각에 일본을 포기하고 건축기술자들을 2년 정도 따라다녔습니다.기초부터 착실하게 배워서 전문건설업 단종면허로 시작 했습니다.작고 초라했지만,돈 욕심 보다는 무엇인가를 빨리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밑바닥부터 열심히 배웠습니다.그리곤 서울 강북 쪽 에서 작게 시작해서 3년 동안 돈은 못 모으고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지만 나중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했습니다.4년만에 자리가 완전히 잡히고,난 관공서 공사입찰이며 전국을 일거리 찾고 일을 맡고 열심히 했습니다.동료들과 직원들과 열심히 했습니다.어느 정도 기반은 잡혀 갈쯤 부친이 더 키워 보겠다고 경험도 없는 사업에 동참하더니 그 다음해인 5년 반 만에 회사가 현찰 9억 어음 20억 정도 부도를 내고 말았습니다.일은 개처럼 해서 일궈 논 걸 잠시 다른 일 더 배운다고 1년 두고 본 결과가 엉망이라 후에 다시 8개월 수습 하려는 게 복구가 않 돼 고 결국 문을 닫았습니다. 물론 저는 젊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수습했습니다.욕먹지 않을 만큼.70-80%정도에서 타결하고 마무리 하고, 아픔과 어려움에서도 긍정적인 나도 단돈 한푼 없이 폐차직전인 고물차를 몰고 무심코 고속도로를 달리다 3일 동안 처리 하는 동안 잠 한숨 못 잔 탓에 졸음운전으로 반대편으로 들어갔다가 가까스로 살아났습니다. 낙동강 부근에서 약 한 달간 있다가 지금의 아내 에게 전화했더니 비행기타고 김해공항으로 와 줘서 그 길로 나는 서울로 차를 몰아 서울 종로 금은방에서 가짜 목걸이 하나 걸어주고 또 그렇게 무일푼에서 2년 동안 열심히 모아 전셋집 마련하고 결혼식 올리고 둥지를 틀어 잘 살고 있었습니다.그러던 중 장모님 뇌출혈로 쓰러져 아내가 친정 오고 가는 게 안쓰러워 아파트하나 분양받고 처가근처로 이사를 갔는데 그만 집을 잘 못 얻어 포괄적 근저당 잡혀 결국 나중에 입주 잔금으로 할 전세금 한푼도 못 건 졌습니다.사업을 하고싶어도 내 가족이 머물 수 있는 아파트를 하나 장만하고 후에 하려고 한푼 못 써보고 분양받았더니,이 무렵 부도와 믿었던 친구가 일주일만 쓴다며 빌려 가더니 미국으로 도망가면서 빌려 준 중도금 마저 이래저래 어려워 졌습니다.한마디로 많은 돈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도 한번 알몸이 됐습니다.또 큰딸 어렵게 태어나서 지금껏 건강하게 자라주고 있습니다만.임신 6개월 때 자궁이 열려 유산 하자던 걸 반 병신이 돼도 낳겠다고 서약하고 병원에서 조심스럽게 낳지만 미숙아로 태어나서 근 2달 인큐베이터 생활해서 제 어미 품에도 못 안겨 본 내 딸 에게도 너무나 많은 비용이 들었습니다.저는 외아들이며 3대 독자입니다. 누나도 형도.동생도 없습니다. 나에겐 각기 배다른 동생이 둘 있습니다. 남동생은 2살 때 자기엄마 따라 미국에서 산다는 것만 알지 연락은 전혀 안 돼 구요.여동생도 자기엄마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도 모릅니다.
살아서 형편 됄 때 제 자리도 못 찾아 주고 심장마비로 돌아 가시기까지..전 고아 혼자였고 결혼 후엔 내 가족이 전부입니다.
2005년"월간 조선"1월호에 기자가 "김대중 출생비밀 파헤치다 죽어가다"라는 기사를 올려 놨습니다.본인 생활하기도 바쁘셨고 부족 하신 분 이라 가정 신경 안 쓰고 책임감도없이 불쌍하게 돌아가셨습니다.
2000년12월 겨울

몇 가지의 힘든 스트레스가 너무 많았나 봅니다.전 백혈병이라는 고약스런 판정을 받았습니다.약물로도 생명유지가 가능한 만성 백혈병 도 아닌, 미국의 '성덕 바 우만' 이가 걸린 '급성 골수성 백혈병'

치료하지 않으면 3개월 못산다는 무서운 병.

진단 받고 처음 치료 들어가기 7주일 동안 참 많이 힘들고 어려웠습니다.머리를 밀고 침상에 앉아.....
정리, 정리를 해야겠고... 사랑하는 내 아내와 갓2살 됀 작은애 와 4살 됀 큰애... 많은 아픔을 줄 것을 생각하면 가장 고통이었습니다.감당 못할 어려움은 주지 않는가 봅니다.
내 아내와 난 최선을 다해 치료를 했습니다.베스트치료,좋은 생각 감사와 희망을 가지고 약물치료와병상생활을 최선을 다해 무수한 고비를 넘어 결국 골수이식을 했습니다.도와주는 친척친지없이 많은 친구들이 너무나 많은 친구들이 힘이 돼 주었습니다.이식 후 10개월만에 재발했습니다.형편이 어려워져 조금 움직일 만 할 때 무리해서 일한 것이 혹 잘못 됀 것도 있고 치료가 안돼서 일수 도 있지만 그 기간 만큼은 아주 좋았습니다. 욕심이 과 했나 봅니다.
지금까지 눈물한번 보이지 않던 내 아내가 재발이란 말에 굵은 눈물을 소리없이 흘러내립니다.
이렇게 운명은 마무리 돼 나 했습니다.

재발......
난 너무 멀쩡했고 이대로 치료 안 하면 6개월 안에 죽음을 선고받았습니다.
그 동안 처음이식하고 치료까지 생활비하고 병원비로 너무나 큰 돈을 써서 엄두도 못내는 상황이라 포기를 했습니다.암세포가 11%보이니까 처음이라 생각하고 다시 시작 한다고 생각하고 4살 백이 큰딸과 골수가 75%맞는다며 시간 싸움이니까 하자고해서 성인은 한번이면 돼 는 골수 량을 너무 어려서 4번 에 걸쳐 뽑는다 하니 한번 할 때마다 1000만 원 이면 4천만 원,거기다 재발하면 우리 나라는 의료보험이 적용 않 돼서 8000만 원 병원예치, 그도 모자라 보증인 2명 공증세우고,생활비며 병원잡비 등등....또 몇천,성인으로 해도 1억이 넘는데 애랑 하면 1억3천 정도 이정도면 애들 대학 때 까지 교육비는 충분 할 탠데 굳이 한번 한걸 또 해야 하는 뻔 뻔 스 런 마음이 앞서 전 너무 괴롭고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전 저번보다 더 센 치사량의 약물로 약해진 체력, 몸 속의 모든 장기 중 어느 하나가 합병증 이어져 자연스럽게 유도 하려 했는데 왜 날 이렇게 살려 놨는지 전 어떻게 앞으로 이 엄청난 앞에 조심스레 새로운 생명으로 다가서 있습니다.기적 아니 고서는 기적이 아니고 불가능 한일 이 나에게 주어진 게 내가 지금껏 누구 에게도 남 마음 상하게 해서 나 펀 할 려 고 못 됀 짓 안 했고 착하고 열심히 산, 내 지난 짦 은 삶이 너무나 소중합니다. 내 짧은 지난날을 굳이 소중하고 행복하다 할 수 있던 거는 남 도움 없이 돈도 많이 벌어봤고 자식도 있고 여행도 남 부럽지 않게 다니고 친구 많고 무엇보다 나에겐 나를 다 키우시고 눈을 감으신 내 할머니, 날 강하며 사람답게 살게 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주신 할머니에게도 전 부끄럽지 않게 살았습니다.앞으로도 지금처럼 살 것이며 남을 위해,남들과 나누며 살고 싶습니다.그렇게 살아 봤고 아직 젊고 처 자식에게 빗은 안 남기고 가고 싶고 애들에게 또 나같은 부모의 부재를 ,아픔을 주지 말 아야 겠다고 전 모든 운명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과 다른 어떤 신들에게도 매달리지 않고 다시 태어나서 다시 살게 돼 면 내 엄마 내 형편에 맞게 오며 가며 아니 살아 보고 싶다고 죽음과 고통과 아픔 속 에서도 난 마음만은 놓지 않았습니다.비닐 병실과 독방생활 도 나에겐 오히려 고통 이라 않고 감사하며 그렇게 하루하루 병상생활을 했습니다.많은 친구들의 3,4개월씩 연습해서 돕겠다고 음악 콘서트 도 열어 주고 수도 헤 아 릴 수 없는 헌혈과 혈소판수혈 그리고 방송국 자선단체 이 모든 게 나하고는 내가 그렇게 크고 많이 베푼 것 없는 제게 내린 축복으로 이렇게 오늘도 애들 앞에 살아 있습니다.그것도 믿기 어렵겠지만 정상적인 생활합니다.그치 만 앞으로 2년은 더 지켜 봐야 돼 구요. 이정도면 잘 됄 것도 같습니다. .다만 살이 좀 많이 빠져 옛 모습은 조금 없지만 그 동안 힘 든 거에 비하면 이도 감사하지요.
결혼 한지 얼마 안 됀 친구가 한번,고교동창신랑이 직장 휴가내고 한번......그 외 몇몇 친구 들이 동해안 이며,휴양님같은 조용 한데 를 며칠씩 대리고 가면서 절 설득하고 용기를 주며 날 안아 주었습니다.감사한 일들 기적같은 일들이 이때부터 너무나 많이 일어났습니다. 파란 만장한 나의 히스토리는 자칫 한만은 삶이 됄 듯 했지요. 그러나 이젠 누구보다 행복하고 마음 편하고 감사해서 마지막에도 정말 웃으며 눈을 감 을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저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삽니다.버리고 버린, 마음만은 부자인 거죠.
병원 들어가기 전날까지 돈이 다 안돼서 바다엘 갔습니다. 마음을 비우러...... 한 통의 전화가 왔습니다.내용은 k b s방송국 "사랑의 리 퀘 스 트"에서 방송을 하 겠 냐 는 (이 내용은 나와 맞는 골수기증자가 자 그 만치 72명이나 나와 내가 있던 여의도 성모병원에 확인) 내 아내전화였습니다.살라는 팔자라며 병원에서도 감사 해하며 저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2천만 원 도와 준다고 했고, 지금껏 천사같은 소아들만 나오던 방송이 처음으로 성인이 나오면서 이처럼 골수기증을 많이 하면 또 다른 생명을 살리자는 홍보 내용 인 것을 전 그 때 너무 부작용이 심해 기억이 없습니다.1천만 원 받고 나머지는 우리보다 못한 어려운 애들에게 돌렸습니다.항상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긍정 적인 것도 많은 도움이 돼
구요.나쁜 것도 좋게 좋은 생각으로 바꾸면 무한히 편하답니다.낙천적이라는 말 보단 긍정적 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긍정적인 면은 본인의 의지가 담겨 있지 만 전자는 됄 대로 돼 라는 똥배장도 있어 다릅니다.
전화를 끊고
바다에서 서울까지 차로만7시간 거리입니다.난 쉬지 않고 직접 운전하고 달려 땅 긑 완도에서 서울까지 달려 다음날 다시 병원엘 들어갔습니다.기적적인 많은 도움이 있어서 내 아내도 빗을 냈고 지금은 신용 불량자가 됀 지 오래 입니다.그래도 은행에선 놀랍니다.많은 액수가 아닌 것에 아내를 칭찬합니다. 어차피 신용 불량자 가 돼 는 마당에 헛 돼 이 쓰지 않는 그녀의 현명한생각이 나는 신용불량자는 만들지 않았습니다. 받아도 됄 일 을 ...... 남 같으면,

재발 후 1차 치료

이젠 치사량이라 체력이나 장기들이 견뎌 내야하고 다른 무엇 하나도 궤도를 이탈하면 바로 생명과 직결 돼 는 상황에서 치료 후 1달 반만 에 나온 결과는 "완전 관해 상태"깨끗해진 겁니다.또 큰애랑 하자 더 군 요. 저는 거부했고 두 번째 치료를 하자고 했고 또 이겨냈습니다.또 딸게 깨끗 하고 건강하니까 빨리빨리 시간 싸움이라며 이식 하자는 걸 이젠 골수기증자도 있으니까 완전히 치료를 한 다음 하자며 난 3번째 치료를 선택했습니다. 난 사실 재발 후 두 번의 자살도 시도했지만 하루에 150만 원 하는 icu(집중치료실)에서 3,4일 만에 살아 나오는 전설적인 인간이 돼서 남들은 한 교수가 전담하지만 전 전 병원 관계자들이 힘써 주는 상황이 됐습니다.4년 동안 13층 백혈병 동 안가본데 없고 내 아내 가 백혈구수혈은 병원이래 처음이며 (전 백혈구 수혈 공여자가 내 아내 란 걸 알고 의식 이없던 난 이틀동안 베게 3개를 적셨습니다.병원에는 자체 성분 헌혈실이 있어서 젊고 건강한 사람들을 몇 십 명씩 준비했다가 필요 할 때마다 그날그날 바로 채취해서 수혈받게합니다. 빨간 피는 공급이 돼지만 혈소판이며 백혈구는 보호자가직접 준비해야하니까 경비며 군부대,경찰서,각 학교, 길거리,각종단체에 도움을 요청합니다.이도 다 아내의 몫입니다.내 아낸 교대해줄 사람없이 답답한 무 균 실 에서 힘든 병간호를 무슨 생각으로 했겠으며 죽지 않을 만큼 날 위해 희생했겠습니까...... 애들은 몸도 불편한 외할머니 옆에다 두고 정신없이 혼이 나간 채로 견뎌 내고 말입니다.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나 하나 건강해서 우리가 전처럼 잘 살아 보겠다고...... 재발 후 이식성공확률14%안 밖 에다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가며 이겨 내준 게 보통여자는 아닙니다.부모 복은 없어도 처 복은 있나 봅니다. 아내의 보살핌에 감동을 했는지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다고 한 것이 믿어집니다. 마음 따뜻한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치료 후 이식까지 기적에 기적으로 이렇게 두 번째 이식도 성공해서 2002년 10월22일부터 지금까지 이식 후 많은 고비와 숙주.편대 반응으로 고생은 했지만 결과적으론 이렇게 감사하며 매일매일 지내고 있습니다.
2년 후엔 다시 정상인 완치 도장을 받고 이웃을 도와 가며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그렇게 지내다가 강제경매로 우린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됏 습니다. 1년 후 비 울려 했던 일이 강제 경매로 우린 매정하게 거리로 내 팽개쳐 졋 습니다.준비도 생각도 못한 일이 었 습니다.
작년 9월29일 일입니다.우린 법원경매로 오갈 데 없이 길바닥에 나 앉게 됀 걸 주변의 도움으로 동사무소에서 불교방송국에 도움을 받아 보증금 500에 월 25만 원짜리 사글세에서 생활해 오고있습니다.
20일정도 방도없어서 아내와 애들은 이웃집에서.... 세간 살이 는 보관소에 쳐 박혀 있고... 전 찜질방과 목욕탕에서 지내고 낯엔 동료들과 일하고 밤에는 그렇게 지냈습니다.우리 형편을 알고는 대순 진리 교 라는 전혀 모 르 는 단체에서 매달 10만 원씩 보내 주구요.
주변에서 기초 수급대상자로 도와줘서 2년 전부터는 조금씩 보조는 해주지만 아내가 젊다는 이유로 돈은 지원이 않 됀 답니다.애들 유치원 비며 다달이 쌀 한 봉지 정도와 생활비 조금이 전부 구요. 그래서 우린 저도 한 달에 15일 정도는 몰래 일 하구요(치료 과정 에 두....일은 했어요...진짜로..용기가 따랐죠).운동 삼아서 일은 한다고 하지만 불안한 일이었죠. 정신력으로 견디며 일하고 있습니다.도움은 많이 받고 있습니다.우리 큰애가 작년 2004년12월24일날 국립의료원에서 구세군도움으로 심장수술을 했습니다.심장 수술 중 에서도 제일 쉬운 구멍을 닫는 수술이지만 5시간 걸린 큰 수술 이라 내심 걱정 많이 했는데....
내가 아파서 3.4살 때 해줬어야 하는걸 뒤쳐져서 걱정이었는데 이렇게 도와준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지금은 퇴원하구20일 됐고 아주 좋습니다. 처음 태어날 때 힘들었지만 잘 이겨낸 이후론 아픈 곳 없이 잘 자라주었습니다.둘째 아이는 아주 건강하구요.
내가 아직 건강 하질 못해 일도 걱정이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게 조금만 한 2년만 좀 애들 추 스 리고 아내가 일을 해야 돼 는 데 아내는 반듯한 세금 때는 직장엘 못 갑니다.그나마 기초 대상자 마저 못받으면 우린 방법이 없습니다.힘든 일이라도 하고싶어도 요즘 우리 경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조금만 도움을 받으려 하는데 저도 사정을 모르지만 제 사정도 모를 것 같아 이렇게 한인회에 올려 봅니다.만약 그분들 사정이 어렵다면 도움을 못받아도 저는 그분들 게 원망은 하지 않겠습니다.
부끄럽지만 병원비 1억6천에 그간 생활비로 한 6천은 됀 듯 합니다.
너무나 없어서 조금만 힘이 돼 주면 어렵겠습니까? 살아 보겠다고 이렇게 올립니다.그분 들게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에겐 이제 나를 낳아 준 엄마가 조금만 도와주길 부탁 드립니다.
그분들 성함은 김 , 이 용자(58)입니다.
자식 입장이라기보다 자식을 둔 부모 입장에서 이 글을 올려 봅니다.
자식이 수술 후 중환자 실에서 힘들어 하는 모습에 저도 어쩔 수 없이 내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지더군요.내 모든 걸 다 줘도 하나도 아까울 게 없고 사랑스러운 내 작은 천사이기에......

사랑하는 나의 딸 지은 이랑 예은이 존경하는 내 아내가 함께 있어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아이들은 행복한 사람이 돼 기 위해서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유치원이랑 학교에 갑니다.무엇보다 아침은 꼭 아침밥을 먹는 게 신기하구요.애들도 이러한데 어른이라는 사람들이 더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스스로 잘해서 엄마도 도와주고 착실하게 착하게 스스로 잘 한답니다. 감사하지요
끝까지 연락 않고 잊고 살라 시면 이 글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선생님을 언젠가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게 부는 바람 처 럼 서로 연이 닿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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