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뚜렷하지 않은 형체 하나가 비틀대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손님이 뜸한 늦은 시간을 틈타 느슨하게 주저앉아있던 만화루의 문지기들은 일순 긴장하여 몸을 일으키면서 그것을 주시했다. 마침내 외원의 바깥 담에 걸린 등불의 범위 안에 그것이 들어왔을때, 사람의 형상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는 붉고 흰 갑옷을 걸친 괴상한 가면의 사내였다.
이미 초율을 몇 번 대면한 적이 있던 기존의 문지기들은 그나마 안도했지만, 갓 들어온 신참내기 문지기 한 명이 책임감에 불타 과용을 부리며 막아섰다. 고참 문지기들이 채 말리기도 전에 신참 문지기는 초율의 손에 목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곧 외원 정문이 부서지며 뼈가 바스라진 신참 문지기의 시체는 부서진 문의 나무조각들과 함께 외원 흙바닥에서 뒹굴었다. 하지만 초율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 시체를 다시 짓밟으며 술에 취한 사람처럼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면서 거침없이 걸어들어갔다. 그 상황을 지켜본 나머지 문지기들은 공포에 질렸다. 그들은 저절로 몸이 떨려왔다. 초율은 마치 미친 사람과 같은 기운을 뿜어대고 있었다. 그의 눈은 어둠을 뚫고 광기를 실은 눈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가면 뒤에서 그의 눈빛이 붉게 타 오르는 것을 그들은 똑똑히 보았다. 붉은 한 줄기 광선이 그의 눈에서부터 밤의 암흑 속으로 뻗어가고 있었다.
초율은 걸리적 거리는 것은 무엇이든지 제거하며 걸어나갔다. 취객 하나가 초율의 길목에서 어물쩡 거리다 오른팔의 단단한 갑주에 맞아 그대로 목숨을 잃었고 그를 부축하던 기생 하나도 무참히 내 팽겨져 석등에 부딪히는 바람에 크게 다쳤다.
그 시간 아화는 집무실에 앉아있었다. 꽤나 큰 소란이 벌어진 것을 알아차렸을 때, 유목이 들어서며 상황을 전했다.
" 아화님."
" 밖에 무슨 소란이 난 것 같구나. 무슨 일이냐?"
" 제 4황자께서 오셨습니다."
아화는 웃어넘기려했다.
" 소란이 날 만도 하구나.."
" 여러 명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오늘 황자께선....아주 위험해보였습니다. 누구도 나서서 말리지 못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아화님께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 피하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유목의 말을 통해 아화는 비로소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아화는 자기보다 묘영이 걱정이 되었다. 초율의 거친 행동이 어쩌면 묘영에게 화를 입힐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내 걱정은 말고 어서 가서 묘영을 숨겨라. 그리로 향하실지도 몰라. 나도 곧 가겠다."
유목이 서둘러 묘영을 찾아 떠났고 아화는 잠시 뛰는 가슴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녀는 스스로 사태를 파악해야겠다는 생각에 일어섰다.
하지만 아화가 여닫이 문을 열고 나서려는 찰나, 열린 문 앞에는 이미 초율이 와 버티어 서 있었다. 아화는 열린 문 사이로 초율의 넓은 가슴판이 보이자 짧게 비명을 질렀다.
" 허..헉"
초율은 그런 그녀의 손목을 잡아쥐고 집무실 안으로 거칠게 끌고 들어갔다. 아화는 속절잆이 초율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초율은 그녀를 집무실 한켠에 마련된 침구 위에 거칠게 내팽겨쳤고 아화는 초율의 거친 숨소리와 불안해보이는 기운에 더럭 겁이 났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초율이 자신을 해칠 것 같지는 않다는 확신이 들었다.
초율이 눈깜짝할 사이에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는 아화를 무자비하게 당겨 품에 안았다. 아화는 순식간에 벌어진 그 일로 아찔했다. 하지만 정신이 들면서 아화는 자기가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했다. 초율이 떨고 있었다. 마치 길 잃은 작은 짐승처럼 가여우리만치 온 몸을 미세하게 떨고 있는 것이었다. 아화는 어깨와 가슴이 그의 차갑고 딱딱한 갑주에 닿아 약간의 통증을 느꼈지만 조심스레 팔을 들어올려 초율의 등을 함께 감싸 안았다. 그녀는 자신이 초율에게 안긴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를 안아주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 오늘 밤은 내 곁에 있으라."
초율이 낮게 속삭였다. 아화는 초율의 현재 상태를 고려하여 그 말의 의미를 잠시였지만, 신중하게 판단했다. 그 날의 초율에게서는 기존의 압도적인 위협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화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왠지 이 사내는 지금 누군가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서 그를 내쳐서는 안될 것만 같았다.
" 그러하옵지요, 전하. 소녀 오늘 결코 전하 곁을 떠나지 않겠나이다. 곁에서 모시겠습니다."
아화의 말이 끝나는 즉시 초율의 떨림이 멈추는가 싶더니 그는 쓰러지듯 그녀의 품에 기대어 잠들어버렸다. 아화는 일꾼들의 도움을 받아 초율을 겨우 이부자리에 눕히고는 모두를 물렸다. 그리고 약속대로 그녀는 그의 곁에 남았다.
밤새 초율의 곁에서 그를 지키고 앉아있던 아화는 문득 초율의 장갑 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웅대한 갑옷에 비해 그날따라 그의 손마저 유난히 작고 약해보였다. 아화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살짜기 포개어 잡아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초율의 손은 실제로 아화의 손과 별반 크기가 다르지 않았다.
아화는 놀라움과 더불어 왠지 용기가 생겨 이번에는 조심스레 초율의 가면으로 손을 가져갔다. 가면 앞에서 그녀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초율의 얼굴은 언제나 그녀에게 호기심으로 남아있었다.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초율의 가면을 벗겨내 그 모습을 확인해도 지금 상태에서의 초율은 알아차리지 못할 것 같았고 결국 영원히 비밀에 부쳐진 채 자신만이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화는 손을 거두었다. 왠지 초율의 가면 뒤에는 침범해서는 안되는 신성이 자리잡고 있을 듯 했다. 아화는 자신감을 잃었다.
초율은 다음 날이 되어서도 깨어나지 않았다. 초율의 소식을 접한 묘영이 수시로 들락날락거리며 애타는 목소리로 그를 불러보기도 했지만 초율은 깨어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난 오후, 모두의 걱정이 극에 달해 아화가 조치를 취하려고 할 즈음 초율의 전속 의원이라는 자가 찾아왔다. 환휴는 초율이 이성을 잃고 움집을 뛰쳐나간 뒤 종적을 감추어버리자, 걱정하여 사방으로 그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초율을 찾아낸 것이었다.
아화의 안내로 집무실로 들어선 환휴는 예상외로 편안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초율을 보자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환휴는 초율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그에게 다가갔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방어적인 기운도 느껴지지 않자 자기가 제일 먼저 그를 찾아낸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알게 되었다. 초율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자기 안에 빠져있었다. 어린 아이의 어설픈 칼부림에도 목숨을 잃을 정도로 그는 그대로 노출된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초율의 신체상에서는 어떤 나쁜 증상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환휴는 초율이 오랜 시간 깨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초율은 지금 의도적으로, 혹은 본능적으로 신진대사를 멈춘 채 깊은 잠에 빠진 상태였다.
아화는 유목과 미옥에게 당분간 기루의 일을 맡긴 채, 초율에게 전념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초율의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걱정하는 것 뿐이었지만 그녀는 곁에 있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화는 왠지 환휴가 껄끄러웠다. 새하얀 바지와 푸른색 옷깃을 덧댄 흰 규의를 입은 그는 초율만큼이나 결벽적인 사람인 것 같았다. 말 없이 구석진 곳에 앉아 수시로 초율의 상태를 점검할 뿐이었지만 그에게서는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화는 등을 돌리고 있을 시면 그가 자신을 섬뜩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환휴는 아화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어느 새 아화도 그를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그 즈음 초율이 눈을 떴다. 잠든 지 열 흘이 지난 때였다.
==차가 밀릴 것을 생각하여 내일 새벽 일찍 고향에 가게 되었습니다. 시집 가면 질리도록 일할거라고 도울 필요없다던 숙모님들 말씀에도 불구하고 작년부터는 어머니 명에 못 이겨 제사상 차리는데 한 몫하고 있답니다.^^ 직장 다닌다고 이젠 세뱃돈도 못 받고 이래저래 손해가 많네요. 하지만 즐거운 명절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가사 평안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