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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라는 영화..... 보라고 한 사람..

보고 느낀거...

여자와 남자의 시차가 안맞았다는 생각..

둘다 사랑하고 있다는게 느껴지는데...

여자는 병적인 새디즘과 왜곡된 성에대한 인식으로

남자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도 그렇게 원할거라고 생각하고 , 제안을 하지만,

남자는 여자의 상태를 알아보고,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고,

여자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제서야 여자는 자신을 바로 보게되고, 그 원인을 알게된다.

그 원인은 엄마의 감시와 통제, 권위, 폭력

거기서 새디즘이 내재되고, 너무 괴로운 규제이고 견디기 힘들지만, 엄마를 사랑하기에 매조히즘으로 대응한다.  여자는 그것이 엄마의 사랑의 표현임으로 받아들이며, 

그런 상호관계에서 일어나는 해프닝은 바로 서로가 사랑을 표현하고 확인하는 매개가 된다.

남자가 불쾌함을 표현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때,

여자는 맞는것보다 더한 아픔을 느끼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꼈을것이다.

더불어 자신이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는것을 깨닫는다.

그 사랑은 곧 거절할 수 없는 엄마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며,

줄곧 보호받지 못했으나 한 남자로 부터 보호받은 자아에 대한 사랑이다.

자아는 그런 왜곡된 사랑으로 상처받고, 그때문에 일그러졌으며,

자신을 자학하고, 자위(위로)할 수 밖에 없기때문이었다.

여자는 자신을 바로 보고 - 남자가 자신을 일컬었던 말)동시에 그런 모습에서 엄마를 보게된다.

그러나 ...

여자의 매조히즘적인 대응은 변하지 않는다.

여자는 그것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었으나, 남자는 전혀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는것이다.

남자는 결심을 하고, 여자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다짐한다.

그렇게 하면, 여자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인것같다..

남자는 그것을 여자의 '권위' ,'명령'따위로 받아들인것같다.

그런데, 사실 여자는 사랑받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사랑받고 싶었기때문에 엄마에게도 순종했을뿐이고,

남자의 욕망에 대해 알려고  했을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성에대한 욕구는 사랑을 얻어내려는 욕망에서 부터 시작된것같다.

남자를 경험해 보지 못한 여자는 정신병력이 있는 아버지를 지켜보며

최초의 남자를 록인하게 되었을 것이다.

포르노를 보며 , 변태적인 성과 도착, 새디즘이 생겨난것.

새디즘은 이미 부모로 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매조히즘적으로 대응을 하면서 이미 내재화 되어있던 것이므로 포르노에서 보는 새디즘은 여자에게 더욱 끌림을 유발 할 수 있다.

여튼 , 남자는 또한 사랑을 얻기위해 여자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여자는 그로인해 증오심과 복수심을 갖게 된다.

여자는 '버림받았다'라고 생각했을것같다.

남자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처음부터 그랬듯이 관심을 끌기위해

사랑을 얻기위해 그렇게 자신을 변화시키며, 악행을 자행하지만,

그럴필요까지는 없었다. 왜냐하면, 여자가 그런 요구를 한것자체가 그를 사랑해서이기때문이다.

여자는 남에게 자신을 한번도 오픈한적이 없는 여자였다. - 적어도 영화 안에서는)

모든것이 타인과의 상호관계가 아닌 수직적인 관계이며,

여자는 교수로서만 사람을 대하며, 대우받는다.

그때문에 여자는 항상 외로웠고,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모든것을 할애한다.

'위치'라는 것마저 잃으면, 자신의 '존재' 마저 사라지기 때문인듯하다.

어머니 마저 사랑받고 보호해주어야할 대상이 아닌 자신이 키워낸 '교수'로 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재능'과'명예'가 바로 여자에게는 '생계'가 되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유일한 '매계'가 된다.

남자는 오픈한 여자를 바로 보고 , 여자의 요구에 따르는 대신,

그대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주면 되었다.

그걸로 여자는 상당부분 치료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더이상 포르노 샵을 찾아가지 않았고,

오히려 남자가 자신에게 한말을 담고 자신이라고 느끼며, 자신을 질책하게 된다. -'역겹다'는 표현을 자신이 쓴다. 자신에 대해 후회하며 사과한다.)

'화해 할 수 있는 걸 왜 깨버려야 하죠....

라는 학생의 말에 화난 모습을 일관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모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위한

본능이었다. 여자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며, 엄마에게 순종할 수 있었고, 그 위치에도 오를 수 있었기때문이다. 순간순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긴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실수'에 불과하고,

여자는 다시 그것을 취소해버린다. 즉 , 자아의 관점에 대한 일관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에 대해 누군가 환영하는 사람이 없었고, 여자는 자신을 소중하게 여길 수 없게된다.

고로, 여자는 자신을 마지막까지 자학할 수 밖에 없는것이다.

 남자는 자신이 여자의 요구를 멋지게 들어주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사랑받을 수 있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그다음날 , 사랑에 가득찬 눈빛과 미소에서 그런것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여자는 증오심에 가득찬 눈빛으로 칼을 들고, 죽일 수 없는 '남자'-  사실 , 증오심에 대한 대상은 '엄마'이다)를 겨누지 못한채 자신을 찌른다.

여자가 처음에 학생을 거절했던 이유는,

그가 너무 핸섬하고, 순수하며, 매력적인 남자였다는데 있다.

거절한 사람은 그녀가 아니고, 사실은 '초자아'- 어머니) 이고 , 그녀는 엄마가 시키는대로 했을 뿐이다. 어머니는 제자라도 딸보다 성공하길 원한다면, 꺽어야한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위치와 지성이 감성에 의해 흔들리는것을 두려워하는것이다.

자신이 제일 두려워하는 상황은 원피스- '이드'-자아의 욕망)가 '초자아'에게 들키며 통제받는 상황일것이다. 여자는 그 '초자아'를 무너뜨리고 싶었을것이다. 성벽에 갖힌 라푼젤처럼...

그래서 여자는 '기다렸다'고 말한다. 여자는 '이드'를 실현하고 싶은 욕망보다도

자신의 병폐를 알아주며 , 만져주길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왜 엄마가 때리는데 울지않느냐... '라는 식으로 물어주길 바라는 여자에게서 .....

'맞고싶은 충동'은 '사랑받고 싶다'라는 무의식의 다른 의미로 보여진다.. -그러나 여자는 실제로 맞는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또, 자신과 똑같이 딸을 때리는 타인을 보며 엄마가 깨닫길 바라는 소망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느새 생겨버린 왜곡된 욕망 '이드'는 '초자아'에게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고, 심지어는 탄압받기까지다. 그렇게 되면 자아 역시 그 욕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직접 대면하면서 인정하기가 어렵게된다.

클레머는 그 사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간순간 알아차리지만, 역시 자신의 '사랑받고 싶은 욕망'

까지 이기지는 못한다.

마지막, 클레머의 해맑은 미소는 자신에게 겨누어져있는 증오- 엄마에게서 클레머에게 전이됨)를 애상으로 바뀌게 하였다. 애상에의해 흐려진 표출되지 못한 증오는  자신에게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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