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연예계와 연기자들에게 보약이 되고 우리 연예계와 대중문화의 원동력 역할을 하는 건강한 비판을 줄기차게 제기한 중견 연기자가 있다. 바로 올해로 연예계 데뷔한 지 45년에 이르지만 여전히 연기가 어렵다고 말하는 중견 연기자 이순재다. 그는 요즘 MBC 일일 시트콤‘거침없이 하이킥’과 KBS 월화 미니시리즈 ‘꽃피는 봄이 오면’에서 명연기를 선보여 10대에서부터 중장년층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단지 대사만 외울 줄 안다면 누구나 배우 할 수 있는 시대다. 연기자가 연기를 못하면 존재의미가 있는 것인가”“발음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연기자가 연기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쪽대본으로 무슨 완성도 높은 드라마를 할 것인가. 사전제작제로 우리 드라마도 이제 발전의 계기를 마련해야한다”“말도 안되는 내용으로 극본을 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작가정신이 있는지 모르겠다”....
이순재의 비판은 문제있는 방송환경에 대한 지적에서부터 일부 스타 연기자에 대한 연기력 부재, 그리고 작가 등 제작진의 잘못된 태도에 질타까지 전방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대중문화 환경과 콘텐츠 제작환경이 급변했다 해도 이순재의 건강한 비판은 여전히 유효함을 지니고 있다.
그의 이같은 연예인과 방송, 연예계를 향한 쓴 소리의 행보는 근래 들어 나온 것이 아니다. 이순재의 이같은 잘못된 연예계와 연기자의 행태에 대한 건강한 비판은 지속적으로 이뤄져왔다. 이순재를 처음 만난 10년전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대사중 단어의 장단음을 놓고 5시간 격론을 벌인 적이 있다. 연기자에게 대사 발음이 얼마나 중요한가. 진정한 연기자가 되려면 발음 훈련부터 해야 한다. ”
이순재는 만날 때마다 늘 방송, 연예계를 걱정하고 우려하면서도 대안을 제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지금은 훌륭한 연기자로 자리 잡고 찬사를 받는 고두심과 김영애를 언급하면서 후배들에 대한 태도를 지적한 일도 있다. “1년 안에 뜬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최소한 3~4년의 훈련기를 거쳐야 눈에 띨까 말까 했는데 말이다. 참고 기본기를 다진 그런 배우가 결국 롱런 하는 배우가 됐다. 고두심이나 김영애가 나이 들수록 연기가 나아지고 굳건해지는 이유는 그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이순재는 끊임없이 지적하는 비판중 하나가 드라마 제작관행에 관한 것이다. 그는 외국처럼 사전제작제가 드라마의 질을 높일 뿐 아니라 연기자들의 연기력을 높일 수 있다고 확신한다. 현재 드라마 환경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열악하다. 상당수 드라마가 방송에 임박해서 극본이 나오는 데다 제대로 캐릭터를 연습해 체화하지 못한 채 제작하는 데만 급급하다. 이로 인해 드라마의 질은 떨어지고 작품성을 논하기조차 힘들게 됐다.
또한 이것은 연기력 없는 탤런트를 양산하는 결과만을 초래했다. 그리고 인기 있으면 무조건 늘리고, 인기가 없으면 작품성을 인정받아도 조기 중단하는 척박한 방송 환경을 조성했고 시청자의 반응에 따라 작품이 당초 기획의도와 달리 흘러가는 부작용을 낳았다.
이순재는 “온전한 극본이 아니라 쪽지로 극본이 나오는 일이 허다하고 어떤 경우는 3류 대중소설보다 못한 초고를 가지고 방송해야 하니 이런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현재의 우리 방송환경을 질타하기도 했다.
이순재와의 만남에서 잊을 수 없는 모습중의 하나가 ‘보고 또 보고’의 종영식과 ‘상도’ 시사회때였다. 이순재는 식사를 하면서 물 잔을 들고 두세 차례 다른 방식으로 물을 마시며 말을 던졌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물을 마시는 모습에서 드는 느낌 어떠냐고. 그는 손 떨림 하나, 문 닫는 동작 하나에도 철저한 계산과 개연성을 깔고 연기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감독의 요구와 배우의 확신이 일치 할 때 가장 완벽한 연기가 나온다는 말을 덧붙였다.
최근 몇 개의 매체와 인터뷰중 “‘거침없이 하이킥’의 야동보는 장면은 철저히 계산된 연기다”고 한 말은 손 떨림 하나에도 철저한 계산과 개연성을 깔고 연기를 하는 그의 연기철학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최근 한 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연기력은 없지만 인기가 높은 비싼 아이들을 캐스팅하면 시청률이 올라갈까 하지만 한두 번은 동화 보듯이 봐도 계속되면 시청자들에게 외면당한다”는 지적을 한 것은 이순재의 연기에 신념을 투영한 것이며 그가 몇 년전 젊은 연기자들에게 한 “광고에 안나오면 그냥 끝나는 배우는 배우가 아니다”는 충고 역시 그의 연기에 대한 가치관을 담보한 것이었다.
방송사에 가면 늘 연기에 임하는 이순재를 만날 수 있다. 일흔이 넘은 나이(72)에도 젊은 연기자 못잖은 체력과 열정으로 작품에 임하고 있는 모습을 말이다. 그가 오래도록 여의도와 충무로를 지키며 대중에게는 삶의 애환을 그리는 영원한 광대로, 그리고 연기자들에게는 연기자의 사표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그는 훌륭한 인생 선배이자 광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