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칙사랑 - 28. 갈라진 입술
다음 날. 회사로 향하는 차의 운전은 언니가 맡았고, 난 조수석에, 아버지는 뒷좌석에 앉으셨다. 큰 딸을 대견스러워 하는 그 표정에 씁쓸함을 느끼며 가방 안에서 립크림을 꺼내 입술을 눌러댔다. 여름이었지만 입술은 불에 탄 듯 메말라 보기 흉하게 갈라져 있었다.
“홍주야. 이젠 홍미의 지시에 따르도록 해. 실수 없는 사람이니까 내 말처럼 여기면 될 거다.”
“······.”
“알겠니?”
“네.”
“앞으론 대답을 바로바로 하도록 해라.”
숨이 막히는 이 기분. 한동안 잊고 살았었는데. 이번 경쟁은 처음부터 내게 너무 불리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불과 2주를 비운 회사는 내게 낯선 곳으로 다가왔다. 예전과는 다르게 긴장한 표정의 직원들에게 어색한 웃음으로 답하며 자리로 행했다.
‘기분 탓만은 아니군.’
묘한 낯섬은 변화에서 오는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책상 배치는 마치 홍미언니에게 전 직원이 감시를 받듯 바뀌어져 있었고, 내 자리도 변해있었다. 놓여져 있던 하얀색 작은 액자와 거울, 그리고 찬기씨에게 선물 받은 선인장은 간데없고 책상엔 서류만 한가득 쌓여있었다.
“오전엔 이걸 검토해 보도록 해. 오래 걸리겠지만 대충 오전까지 봐. 오후엔 따로 지시를 내릴테니.”
“이건 상품 개발 자료잖아. 난 매장관리 담당이었다고.”
“이게 앞으로의 네 일이야. 너처럼 눈치 없는 애가 까다로운 매장점주 비위 제대로 맞췄겠어? 네 적성은 내가 더 잘 안다고. 일단 해보고 불평을 하도록 해.”
“언니!”
“왜, 불만이야? 그리고 회사에서는 언니라고 부르지 마라. 부장님이라고 불러.”
“갑작스레 상품 개발이라니.”
“마음에 안 든다는 거니. 매장 관리로 남고 싶은 거야? 그렇다면 새 거래처 3개만 뚫어와 봐. 그럼 인정해줄 테니.”
지금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자리나 메우라고 회사로 나오라고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다른 부서로의 이전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내겐 점주들에게 아부하며 새로 거래처를 3개나 만들 기력 따윈 없었다. 멍하게 오락이나 하고픈 게 지금의 내 심정이었다.
“알았어. 읽어볼게.”
“그래. 앞으로는 반말도 안 했으면 좋겠다. 나도 정대리라고 부를 거니까.”
휙 돌아 자신의 자리로 가버린 언니가 가자마자 내 자리를 찾은 것은 사촌, 명주언니였다. 슬그머니 내 옷을 끌어당기며 밖으로 나오라고 신호를 보낸 언니는 나가버렸고, 나도 잠시 후에 언니를 따라 나갔다.
“얼굴 좀 봐. 완전 핼쓱해졌잖아. 밥도 못 챙겨 먹은 거야?”
“괜찮아. 언니.”
명주 언니는 내겐 친언니보다 더 가족 같은 사람이었다. 언니의 염려의 말을 듣자 갑자기 약해진 마음은 코를 찡하게 만들었다.
“분위기가 좀 바뀐 것 같네. 사람들도 긴장한 것 같고.”
“홍미 대단해. 어렸을 때 야무지더니 지금은 아주 독해졌어. 며칠 전에는 나이 제일 많은 부장님한테 눈 똑바로 뜨고 지시 내리는데 내가 보기에 다 민망하더라.”
“부장님이 가만히 계셔?”
“화는 나신 듯 했는데 참더라고. 별 수 있니. 월급쟁이가 무슨 힘이 있겠어? 그 연세에 다른 회사 가셔도 일할 자리 구하기 힘들테구. 부장님한테 그 정도니 말 다했지. 직원들한테 지시한 일 한 시간만 늦어져도 아주 난리야. 일주일 만에 회사를 다 휘어잡았다니까. 다들 눈치 보느라 장난이 아니다.”
“언니두 그럼 들어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이상하게 나만 예외다. 그래서 직원들 눈초리를 더 받아. 나한테만 유독 관대하니까.”
직원들과 개인적으로 인사를 나누고 분위기에 적응하는데만 일주일 걸린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물론 언니 직함이 부장이고 난 신입사원 대우였지만 여느 남자들 못지않은 배짱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난 그런 행동이 업무 분위기를 더 해치지 않을까 염려하면서 비워있던 찬기씨 자리를 본 일을 생각해냈다.
“다들 죽어있는데 유독 홍미한테 지지 않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 귀민이. 일적으로 실수가 없으니까 나무랄 방법은 없지, 오히려 홍미가 모르는 부분은 가르치려 든다니까. 입사로는 선배라고 하질않나, 칼퇴근하는 건 여전하고 말이야.”
“저, 언니.”
“어?”
그칠 것 같지 않는 명주 언니의 이야기를 잘랐다.
“음, 찬기씨는 안 보이네.”
“찬기씨?”
“아니, 말이 헛 나오네. 찬영씨 말이야. 출근 전인가봐.”
“너 몰라? 둘이 헤어진 거야? 어떻게 소식을 나한테 묻니.”
“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깜짝 놀라 물으니 언니는 더 당황하며 말했다.
“아니, 그런 거 아니고. 왜 나한테 묻나해서. 매장 나갔겠지. 저번 주부터 매장 관리로 빠졌으니까.”
“매장관리? 왜, 상품 개발하던 것도 아직 안 끝났을 텐데.”
“그게 다 홍미 작품이라는 거 아니냐. 너랑 일이 바뀐 거지.”
찬기씨는 매장 관리를 위해 회사에 입사한 사람이 아니었다. 술을 빚고 사람들 입맛에 맞는 전통주 개발을 하고픈 포부를 가지고 일에 열정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가 현재 느끼고 있을 기분이 어떨지 짐작도 되지 않았지만 좋지 않으리란 것은 분명했다.
“홍주야, 너랑 헤어진 거냐구? 서로 연락을 안하나봐.”
“응. 그렇게 됐네. 헤어진 건 아니지만.”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겠다며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찬기씨의 얼굴을 보게 된 건 그로부터 서너시간 후 점심을 먹고 옥상에 올라가 있을 때였다.
“홍주야!”
돌아보니 그였다. 바뀐 이름을 알고 회사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20m 쯤 떨어져 있는 그는 낯설어 보였으며 서먹한 감정을 들게 했다. 손에는 담배갑과 라이터를 든 채였고 연회색 정장을 입은 그는 천천히 내게 다가오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매장 다녀온 거라고?”
아주 일상적인 대화로 시작된 해후. 뜨거운 포옹도 없고 눈물어린 시선도 없었지만 그가 내 일상으로 다시 복귀하게 된 것만은 확실했다.
“널 보게 될 줄은 몰았어. 그랬다면 좀 더 근사한 옷을 입고 오는 건데. 면도도 깨끗하게 못했는데.”
“그래도 멋있어 보인다는 말 기대하는 거지?”
“아니야. 절대.”
“그럼 됐구. 이제 멋있다는 말 기대하지 마. 있는 그대로 보여줘. 그게 더 좋거든.”
그의 피곤한 듯한 웃음이 더욱 가슴에 저며왔다. 뜨거운 햇빛 가운데 가늘지만 시원한 바람이 머리를 날리게 했다. 마치 그의 손가락이 머리를 매만지는 간지러움을 느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담배 냄새난다.”
“어, 미안.”
“이 냄새 그리웠어.”
“미안하다. 정말.”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말했지? 얼마나 걸릴 지는 나도 모르겠어.”
“기다릴 거야. 천천히 내 얘기도 많이 해줄게. 그나저나 우리 홍주 실망하면 어쩌지.”
“실망 안할게. 천천히 들려줘. 오빠 얘기. 과거 얘기도 좋고 미래의 얘기도 좋구.”
“그래. 그러자. 고맙다는 말 오늘만 할게. 돌아와줘서 고맙다는 말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앞으로는 예전처럼 만나자.”
그의 과오들은 천천히 잊을 예정이지만 오늘 고맙다는 말은 기억하고 싶었다. 손의 감촉과 뜨거운 여름날의 화해. 그것은 잊지 않을 예정이었다.
그와의 간격은 쉽게 메어지지 않아서 데이트를 약속한 것은 출근하고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였다.
“언니, 오늘은 먼저 퇴근해라. 나 들릴 데 있거든.”
“안돼. 같이 가.”
“친구들이랑 약속 있단 말이야.”
“친구들? 찬기씨가 아니고? 그 사람 만나지 마. 아버지가 반대하는 사람이잖아.”
“언니! 요즘 해도 너무한 거 아니야? 어니가 직장 상사인 점은 인정하지만 내 사생활까지 지도하려 들지마.”
“그전에 잘하지 그랬어? 간섭 따위 받지 않게 처신을 잘했으면 좋았잖아.”
“일주일간 언니따라 퇴근하곤 했지만 더 이상 간섭하게 하진 않겠어.”
“간섭을 어떻게 안하니! 또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르는데.”
“언니! 언니가 그렇게나 잘났어? 잘나서 이룬 게 뭔데? 하고 싶은 공부 포기하고 아빠 뜻 따라서 사는 거? 난 그 점에 더 실망했어. 난 언니가 잘나서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살줄 알았다고.”
언니는 의외의 말에 놀란 듯 멍하게 서 있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비켜줘, 나갈래.”
“홍주! 너 그 사람은 지금 만나면 안돼! 알아?”
“언니가 그 사람에 대해 뭘 안다고? 좀 알고 나서 말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아빠 말 듣지 말고 언니 판단해서 말해줘. 그렇다면 들어줄 의향은 있어. 친언니의 조언으로 말이야.”
회사에서의 언니의 행동에 불만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화를 낼 생각은 아니었는데. 발끈하는 성격 탓이었다. 언니에게 등을 돌린 직후부터 후회가 들기 시작하는 것도 예전과 같았다.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감정도 조절하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래서야 오랜만에 하는 데이트가 엉망이 되겠어.’
감정 조절을 하려 애썼지만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고 그를 향해 가는 발걸음은 신경질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