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천천히 물들어가다.
-어머, 퇴원하는 거에요?
마리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뒤를 돌아봤다. 진나였다. 진나는 퇴근하는 중이었는지 가운을 벗고 산뜻한 자켓을 입고 있었다. 마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사님은 안 오셨나봐요?
마리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집도 가까우고 짐도 없다. 더군다나 박재석 사건 때문에 너무 시끄러워서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고 어제 형원이 푸념한 터라 오라고 할 수가 없었다.
-집이 어디에요? 내가 데려다 줄게.
진나의 말에 마리는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어쨌든, 아직까지 마리는 진나가 왜 그렇게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아, 괜찮아. 어디에요? 데려다 줄게. 아직 좀 쉬어야 하잖아.
언젠부턴가 진나는 마리에게 스스럼없이 반말도 하고 팔장도 끼고 마치 오랜 친구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마리는 얼떨결에 그녀의 손에 이끌려 차에 올라탔다. 마리는 수첩에 아파트 이름과 동을 적었다. 그러자 진나가 되물었다.
-몇혼데?
진나의 물음에 마리는 몇호인지 알려주고 말았다.
-알았어.
진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마리는 불안한 마음에 스쳐가는 바깥 풍경만 바라보고 있었다.
밤 늦게 집에 도착한 형원은 쓰러질 정도로 피곤했다. 그렇지만 얼굴을 활짝 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마리가 일어서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마리의 얼굴을 보자 형원은 마음이 놓였다.
-안아프냐?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머리가 많이 아팠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했어야지. 내일은 혼자 병원갔다 와. 알았지?
마리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하지 않아도 형원이 그녀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밥 차릴까요?
마리가 불쑥 수첩을 내민다. 항상 손에서 놓지 않는 수첩은 너덜너덜 하게 낡았다. 형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밥보다 잠을 더 자고 싶었다.
-아니, 나 잘래. 너두 자라.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원은 비틀거리며 방 문을 열었다. 마리는 그런 그의 뒷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아프다.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누운 형원은 몸은 너무 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았다. 또 시작이다. 형원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웃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잠은 오지 않고 몸은 피곤하고. 살인적인 불면증에 시달린 지도 오래되었다. 형원은 다시 비틀거리며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마리가 막 욕실에서 나오다 형원을 보고 깜짝 놀란다.
-아, 미안.
형원은 그제서야 자신의 상체가 누드라는 사실을 알고는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자 마리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형원은 냉장고에서 또 소주를 꺼낸다. 이러다 알콜 중독이라도 될 것 같아. 그는 중얼거리며 소주병을 땄다. 소주병을 들고 베란다 쪽으로 걸어간 형원은 어두운 밤하늘을 보면서 술을 마신다. 목구멍이 따갑다. 이 짓도 못하겠다. 형원은 갑자기 솟구치는 울분에 유리창을 깨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형원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조금 안정이 되는 듯했다.
마리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형원이 창가에 서 있었다. 왠지 슬픈 분위기, 가라앉은 듯한 공기에 마리는 다시 문을 닫고 침대로 가 누웠다. 그렇지만 잠이 안 오기는 마찬가지였다. 쭉 그랬다. 16살.. 16살 이후 말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로 편안한 잠도 잃었다. 그날 이후로.
아침에 일어난 형원은 머리가 아팠다. 그렇지만 늘 소주를 한병 씩 마시다 보니 머리 아픈 것 쯤은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칠 수 있었다. 샤워를 마친 형원은 옷을 입고 어제 벗어놓은 옷은 들고 밖으로 나왔다. 세탁기에 옷을 넣은 형원은 부엌으로 갔다. 마리가 뭔가를 다지고 있었다.
-뭐하냐? 어..
장난스럽게 냄비를 열어본 형원은 순간 멍해졌다.
-왠 북어국이야?
형원은 마음이 알싸하게 시려오는 것을 느꼈다. 북어국이라니.. 마리는 그저 웃더니 자리에 앉으라고 손을 펼쳐보였다. 자리에 앉은 형원은 오랜만에 정말 맛있는 아침을 먹었다.
형원이 출근한 다음, 마리의 일상은 별 다를 것이 없었다. 정성스럽게 청소를 하고 세탁기를 돌려 빨래를 널었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향하는 도중, 마리는 악세사리 점에 들러 머리 방울을 하나 샀다. 머리카락이 자꾸 바람에 날려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형원이 근무하는 경찰서를 지나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마리는 느릿느릿 걸어서 약국에서 약을 받았고 다시 느릿느릿 걸어서 동네를 한바퀴 돌았다. 모든 것이 아주 느리게 지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아주 천천히 마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마리는 그 느린 변화에 조금씩 적응하고 있었다.
띠리리리..
누군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마리는 읽던 책을 내려두고 비디오 폰을 봤다. 뜻밖에도 진나가 서 있었다. 깜짝 놀란 마리는 의아한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을 열었다. 진나는 보기에도 고급스러워보이는 과일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마리는 머리만 빼꼼하게 내밀었다.
-안녕, 마리씨. 아픈 건 좀 어때?
진나는 문을 벌컥 열고는 집 안으로 들어왔다. 마리는 당황스러웠다.
-집엔 아무도 없어?
진나는 두리번거리며 물었고, 마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마리에게 과일바구니를 건넸고, 마리는
어떻게 해야하지? 혼자 생각하면서 우선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자리에 앉은 진나는 친숙한 듯, 마리의 손을 잡아 끌었다.
-마리씨도 앉아.
마리는 고개를 흔들고는 부엌으로 가서 커피를 한잔 탔다. 그 사이, 진나는 거실을 구경했다. 거실에 있는 장식장에는 형원이 탄 표창장과 메달 등이 보기좋게 장식되어 있었다. 사실은,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것을 마리가 잘 닦아서 보기 좋게 올려 놓은 것이었다.
-좋겠어. 좋은 오빠를 둬서.
-?
진나의 말에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딱히 다르게 설명할 거리도 없는 터라 그냥 그렇게 생각하도록 두자고 생각했다. 진나는 흐뭇한 듯, 마리가 건네는 머그잔을 받았다. 진나 앞에 엉거주춤 앉은 마리는 도대체 이 여자가 왜 왔을까.. 하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왠일로 오셨어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마리가 물었다. 그러자 진나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 난.. 그냥. 잘 있나 해서.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마리는 왠지 진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집 좀 구경해도 되니?
마리는 싫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진나도 손님이고 그렇게 홀대했다간 형원에게 혼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진나는 신이 난 표정으로 먼저, 형원의 방 문을 열었다. 형원의 방은 사실, 신혼 방이었다. 깔끔한 아이보리 색 가구들이 정갈하기까지 했다. 그런 사연을 모르는 진나는 형원이 생각보다 심미안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혼자 쓰기엔 너무 큰 퀸사이즈 침대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침대 옆의 화장대를 보고는 노골적인 궁금증을 드러냈다.
그렇지만, 물어볼 사람이 없어 그저 궁금증으로만 남겼다. 창문에는 화사한 꽃무늬가 들어간 아이보리 색 커튼에는 나비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었다. 진나는 그 나비 장식을 만지작거리다 마리가 밖으로 나간 틈을 타 주머니에 넣었다. 나중에 돌려줘 깜짝 놀라게 할 작정이었다. 지독한 골초인 듯, 재떨이에는 담뱃재가 말라 붙어 있었다. 마리가 아무리 씻으려 해도 씻어지지 않는, 거의 벽돌처럼 단단하게 붙은 담뱃재였다. 그러나, 진나는 그저 마리가 좀 게으른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마리는 저 여자가 무슨 생각으로 집에 왔는지, 또 왜 형원의 방에서 안 나오는 지 알 수 가 없어 짜증이 조금 났다.
-여기는 마리씨 방?
진나는 곧바로 마리의 방문을 열었다. 마리의 방에는 원목으로 된 싱글 침대와 작은 탁자, 거울, 서랍장 등이 있었다. 다들 심플하고 깔끔한 가구들이었다. 진나는 재빨리 방을 훑어 봤는데, 곧 화장대로
쓰는 탁자 위에 화장품이 달랑 스킨과 로션, 크림만 있는 것을 보았다. 진나는 살짝 미소 지으며 거실
로 와 앉았다.
-저 방은?
-그냥 창고에요.
마리는 수첩에 글을 써서 내 밀었다.
-응. 그렇구나.
-마리씨, 화장품이 너무 없어. 예쁠 땐대 화장도 좀 하고 그러지. 내가 좀 골라줄까?
마리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왠지 진나의 친절은 부담스럽고 비밀스러운 데가 있었다.
-내일 병원오면 응급실에서 나 찾아. 꼭. 기다리고 있을게.
진나는 형원과 마리의 집을 나서면서 말했다. 마리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어때, 좀 괜찮으신가요?
-아, 네..
연준은 말꼬리를 흐리는 형원의 얼굴을 바라봤다.
-저번에 병원에는 왜 오셨나요?
-사실은..
-네, 말씀해보세요.
연준은 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여자.. 그러니까 여자라고 볼 수도 없을 만큼 어립니다만.. 사정이 생겨서 그 아이와 함께 살게
되었거든요.
형원은 연준의 눈치를 살피는 듯 했다.
-아, 그래요?
연준은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저는 주 5일 근무에요~
집에 있는 컴터가 고장이 나서...집에서는 글을 쓸 수 없답니다.. 이해해주세욤...![]()
그리고...저 내일 여행가거덩요~
그래서 다음 글은 목요일에 올릴게요..![]()
기다려주세욤~^^ 목요일에 더 많이 올릴게요~ 지성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