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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 그리고 내 꿈

히히히 |2005.02.26 12:50
조회 282 |추천 0

아버지 나이 쉰 아홉. 2년후면 환갑이시다.

아빠는 재작년에 정년퇴직으로 퇴직하셨다.

30년동안 일한 공장에서 퇴직금이라고는 300만원밖에 받지 못하고 퇴직하셨다.

그동안 집세 올려주느라 야금야금 퇴직금을 중간정산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생모는 강씨 집안의 며느리였다. 할아버지는 이 할머니를 첫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아버지를 낳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아버지가 세 살때 돌아가셨다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7살때, 역시 다른 집안의 며느리였던, 내가 아는 할머니와 재혼하셨다.

그 때 두 아이를 데리고 들어왔고, 할아버지 사이에 아버지와 10살 터울나는 아들을 하나 더 두셨다

작은 아버지는 부산에서 사업을 하고 계신다.

 

아버지는 일곱살 무렵 초등학교를 입학하셔야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집에서는 학교를 보내지 않았다.

1950년대 경상도 깡촌의 한 농부의 인지수준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새엄마에게서 당연히 홀대를 받았을 것이고

교육도 받지 못해 변변한 친구 하나 사귀지 못했던 아버지는

지게 지고 산에 올라 나무를 하며, 등교를 하는 또래들을 부러운듯이 바라보면서

17살까지 고향에서 보내셨다.

그 즈음(1960년대 초중반) 그 깡촌 시골에도 기독교 바람이 불었고,

마음의 평안을 찾고자 하던 아버지가 교회당에 나가자 집안에서는 악령이 들었다며 절에 끌고가 굿을 하기도 하는 등..

온갖 고초를 당하다가 17살 나던해 서울로 올라와 객지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글도 모르고 배운 것도 없는 더군다나 17살의 앳딘 소년이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찌어찌 아는 사람의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하고,

밤에는 한글 학원을 들어가 겨우 겨우 글을 깨우쳤지만,

아직도 한글 읽는 속도나 쓰는 글씨 모양새나 떠듬떠듬 수준인 것을 보면 제대로 학원을 다니지는 못한 모양이시다.

 

그렇게 10년을 어찌 어찌 사시다가 27 되시던 해에 아는 사람의 중매로 어머니를 만나게 된다.

집안에 대학까지 나온 오빠가 있고, 나름대로 서울에서 자리잡고 있는 집안의 막내딸이면서 

꽤나 끼도 있고, 상당한 미인인 어머니가 아버지와 결혼을 한 것도 참으로 이상하거니와

예쁜 막내딸을 아빠처럼 형편없고 조건 없는 사람에게 시집 보낸 외갓집도 이상한 일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기념이 12월인데,

내가 5월 말에 태었으니 나는 이른바 속도위반의 산물인 셈이다.

아마도 이래저래 통빡을 굴린 아버지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결혼을 할 수 없다 싶었기 때문에 작전을 짠게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도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끔찍하시다. 아버지는 정말 어머니를 사랑하신다.

당시로서는 처녀가 임신을 하였으니 결혼을 시킬 수밖에 없었던 분위기였을 것이다.

 

여하튼 외가에서는 어머니를 결혼을 시키는 햇지만, 여간 탐탁치 않았고

한동안 아버지는 외가에서 홀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눈치가 없으신건지 어쩌신건지 아버지는 그래도 뻔질나게 사위노릇을 했고

사실상 부모님이라고는 외할머니밖에 없었으니 더더욱 자식노릇을 잘했다.

그렇다고 외할머니가 아버지를 좋게 보신 것은 아니었다.

 

외갓집은 1명의 아들과, 5명의 딸을 슬하에 두었다.

외할아버지는 어머니가 13살 되시던 해, 즉 1962년경 돌아가셨는데 당시 외할머니 나이가 40대 중반쯤이었을 것이다. 이 사건은 외갓집이 기우는데에 한 몫 단단히 하신 모양이다.

 

외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당시 결혼한 큰이모, 두째이모는 꽤 괜찮은 남자들과 결혼했지만

셋째, 넷째, 그리고 우리 어머니는 결혼 과정도, 결혼생활도 순탄치않았다. 

게다가 큰이모부, 두째이모부 역시 각기 사고와 병으로 일찍 돌아가시고 과부로 사셔야했고

셋째이모와 넷째이모는 싸움이 잦고, 폭력도 심한 남자들이랑 결혼했다.

그에 비하면, 우리 아버지는 비록, 돈은 많이 못 벌고, 배운 것도 없어서 폼은 안 났지만,

술담배 안하고, 열심히 교회 다니며 화목한 집안을 이끄는 것이 영 기특해보였던 것이다.

특히 내가 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도 곧잘하고 반장도 하고, 좋은 대학도 들어가고

동생들도 다들 무리 없이 크니까 더욱 자랑스러워하셨고

아버지도 외할머니에게 잘하시니까, 외할머니도 그 많은 자손중에 우리 집을 가장 아끼게 되었다.  

 

어릴 때 아버지는 생기신것처럼 깔끔 떨고 올바른  생활을 하려 하였고 그것을 아이들에게 강요했다.

성경을 읽어라. 집에 오면 씻어라. 테레비 많이 보지 말아라. 9시 되기 전에 자라 등등

잔소리가 많으셨다.

또 귀엽다고 얼굴을 자주 부비곤 하였는데, 힘조절이 안되서 어린 나에게는 너무 고통이었고

뽀뽀를 하셨지만 침이 묻어서 역시 싫어하곤 하였다.

또 가끔 장난친다고 이불속에 집어넣고 이불을 뚤뚤 말아서 숨을 못 쉬게 하고

죽겠다고 소리치면 그제서야 풀어주곤 하였기 때문에

어린 나에게 아빠는 기피대상이었다.

 

어느 정도 내가 자라게 되자, 아버지가 여느 아버지와 다르다는걸 느끼고

더구나 인생의 조언자 조차 되지 못하는 아버지를 원망 혹은 무시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스스로의 일은 부모의 간섭을 받지 않고 처리하기 시작했고

대학교 진학에서부터 직장, 결혼까지 내가 결정해서 통보하는 방식으로 살아왔다.

스무살 무렵에서 스물 네살 때까지 아버지와 가장 많이 다퉜는데

직접적 원인은 내가 교회를 안 다니는 것과 또 역시나 계속되는 심한 잔소리가 귀찮아서었지만,

실제로는 내가 아버지를 인정 안했던 것이 가장 컸다.

그러던 나도 스물 다섯이 넘어서면서부터는 아버지에 대해서 조금씩 이해가 됐고 

결혼을 해서는 더더욱 아버지에 대해서 인간적으로 연민도 가고,

살아오신 세월에도 이해가 되면서 그동안 아버지에게 못해드렸던 것들이 죄송스럽고,

잘해드려야겠다는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아직은 동생들이 나처럼 생각하지는 않지만, 동생들도 철이 들고

나 역시 만나면 이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요새는 아버지에 대해서 다들 수긍하고 있다.

 

그런 아버지가 퇴직을 하셨다.

퇴직을 하신 아버지는 배운 것도 없으시고 딱히 수완이 좋은 것도 아니셔서

아파트 경비도 하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보니 집에서 전화 받고, 청소하고, 그러는 것이 전부다.

너무나 심심해하시고, 특히 친구들이 없어서 더더욱 적적해하신다.

아직 60도 안된 연세에 저렇게 지내는 것이 내게는 걱정이다.

혹시나 우울증이라도 걸리지 않을까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아버지에게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건 무얼까?

 

 

내 나이 서른 하나.

2년 반전에 결혼해서 출가해서 살고 있다.

월 세후 300 정도의 수입을 갖고 있고, 와이프는 가끔 돈벌어오긴 하지만 맞벌이는 아니다.

아직 애는 없다.

 

내 나이에 18평이지만 아파트도 있고, 중고지만 차도 있고..

그냥 나 하나만 보면 과히 나쁘지는 않은 신상이라고 생각한다.

굳이 따지면, 내 나이에서는 평균을 조금 웃돌지 않을까 생각한다.

 

개인적인 꿈이 있다면, 

서울의 30평대 아파트를 5년 내에 장만하는 것이다.

지금 자산으로는 약 2억 정도를 더 모아야 가능한 수치다.

1년에 4천씩 저축해야 하는데 지금 내 수입규모로는 어림 없다.

그렇지.. 대출이라는 제도를 이용하면, 7-8천 대출 받아서 또 3-4년 빚갚는데 쓰면

아마 내 나이 40이 되어 있겠지...

 

그런 것만 생각한다면, 그래도 홀가분한 편이다.

 

맏이라서 그런지

아버지나, 동생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결혼 적령기에 들어선 동생들이 결혼자금 하나 변변하게 만들지 못한 것은 둘째 치고

요즘엔 중년 취급 받는 50대 후반인 아버지와 어머니가 할 일이 없으시다는 게 제일 걱정이다.

수입 자체는 둘째 치고 워낙에 적적해하시니 아버지 어머니 사이도 안 좋고

특히 아버지가 더욱 걱정이다.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고향에 내려가서 농사 짓고 싶다고 하신다.

그렇게 고향에서 받은 것 없으면서도

얼마전엔 고향 친척들이 돈 500을 해 보내라고 했다는 말도 나한테 빼놓지 않고 전달하실 정도로

애착이 강하다.

 

그런 아버지의 애착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그렇다고 아버지가 내내 농사를 짓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농사 짓겠다는게 목적이 아니라, 그나마 거기 가면 참견할 일도 많고

또 워낙 도시 생활보다 시골 생활을 좋아하니까.. 그걸 원하시는 것이다.

 

아빠가 시골로 가겠다고 엄마도 그냥 아무말 없이 따라가실 분이 아니다.

원체 도시를 좋아하고, 서울에서 태어나신 분이시라 아빠가 가겠다면 혼자 가라는 주의다.

 

굳이 서류상 이혼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떨어져서 사시는건 내가 못 본다.

 

나는 그저 아버지가 늦은 공부라도 시작했으면 좋겟다. 

검정고시를 봐도 좋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배움의 기쁨을 느끼게 해드리고 싶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아빠와 엄마가 소일거리라도 할 수 있는 구멍가게라도 하나 내드리고 싶다. 

또 아빠만을 위해서 시골에 별장 비슷하게 집 하나 지어놓고

여름 한철이라도 그 곳에서 농사라도 지으실 수 있게 해드리고 싶다.

 

내 개인적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아빠와 엄마, 그리고 동생들을 위해서 추가로 들어야 하는 돈이 당췌 감이 잡히지 않는다.

얼추 1억 정도는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이 모든 것들도 다 5년 내에 이루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평범한 직장인인 나로써는 참으로 힘들다.

이런 걸 생각하면 마음의 여유도 없고, 불안해진다. 그리고 급해진다.

그래도 언젠가는 이루겠지 하는 심정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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