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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련{여덟번째}

이야기 상자 |2005.03.07 23:20
조회 1,620 |추천 0

 이틀만에 태림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학교에 등교를 했지만 세준은 말리지는 않았다. 더 누워 있고 싶어도 시어머니의 눈총에 불편했기에 얼얼한 사지를 겨우 추슬러 학교 갈 준비를 했다.
 "조금 더 쉬지 그러니 몸살 기운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시아버지는 태림이 근력이 약해져서 기절한 거라고 생각하고 과일이나 뭐다 간식거리를 가득 사다주며 그녀의 건강을 걱정했다.
 "젊은애가 그 정도 쉬었으면 됐죠. 잘하는 것이 없으면 눈치라도 있어야 줘. 저 아이가 누워있으면 세준이가 회사에서 편하게 일할 수 있겠어요."
 태림은 몰래 역시 표정이 없는 세준의 얼굴을 흘끔 바라보았지만 시어머니의 말뜻을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맞은 날은 세준이 그녀의 곁에 잠시 머물러 일에 차질이 생겼다지만 다른 날들은 세준은 평상시와 별 다른 차이 없이 생활했기 때문에 자신이 그의 일해 방해되었다는 말이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그 생각은 여전히 태림의 머릿속에서만 머물 뿐이었다.
 "늦겠다 어서 출발해야지."
 "이 이는 내가 무슨 말만하면. 누가 부전자전 아니랄까봐 그런 건 꼭 닮아 가지고서는."
 시아버지의 나가라는 손짓에 태림은 세준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저기 그 날 아버지 회사에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세준은 출발할 때부터 살펴보고 있던 서류철에서 잠시 고개를 들고 태림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어두운 눈길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었다.
 "이현이 매니저가 전화했었어. 그 애 오빠에게 신세진 게 있어서 이현이 뒤를 내가 좀 봐주고 있거든."
 태림은 그의 입에서 더 많은 말들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그의 부드럽지만 냉철해 보이는 입술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애절한 눈길을 느꼈는지 세준은 어쩔 수 없다는 말투로 말을 했다.
 "군대에 갔을 때 내가 단체 생활에 좀 적응을 못한 적이 있었어. 그런데 내 고참이었던 현수가 그런 나를 항상 챙기면서 내무반에서 뒤쳐지지 않도록 도와주고는 했지. 그는 제대하면서 꼭 밖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사고로 이 세상을 등을 졌고, 난 조금이나마 신세를 갚고 싶어서 그의 가족들을 돌보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는 듯이 세준의 눈길은 다시 서류로 향했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그가 사람보다 더 애지중지 하는 그 서류들을 찢어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언제나 생각뿐이었다.
 태림은 그의 말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지나치는 거리의 풍경을 아무런 의미도 두지 않은 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세준은 그렇듯 열심히 살면서 남도 도울 줄 아는데, 자신의 아버지는 젊은 여자들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면서 그들의 인생을 짓밟는 일을 서슴없이 한 다는 게 자신을 용서 할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웠다.

 역시 태림의 예상대로 이현은 태림을 바라보지를 않은 채 자리에 앉았다. 태림은 그런 이현이의 눈치를 보며 그래도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지만 이현의 표정은 무서우리 마치 싸늘했다.
 "태림이 왔구나. 몸은 어때, 얼마나 아팠기에 너 같은 모범생이 학교에 다 빠졌어. 괜찮은 거야."
 유정은 교실에 들어서자 마자 태림에게 수선스럽게 다가와서는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어 보기도 하고 태림의 볼을 쓰다듬기도 했다.
 "괜찮아. 많이 좋아 졌어."
 "그래, 다행이다. 근데 니 짝궁 표정은 왜 저래."
 유정은 귀엣말을 하며 턱으로 책만 바라보며 있는 현을 못마땅하다는 듯이 가리켰다.
 "제 웃긴다. 언제는 저 만한 죽마고우는 없다는 듯이 행동하던 애가 오늘은 완전히 생판 처음 보는 사람처럼 구네. 싸웠어?"
 분명 유정의 목소리는 현에게도 들렸을 테지만 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니."
 민망한 태림은 다른 친구에게 노트 정리를 빌리러 가야겠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정에게 계속 말을 하게 내버려두면 안될 것 같았다.
 수업 내용을 놓쳐서는 안된 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 현의 태도가 신경이 쓰여서 책조차 읽을 수가 없었다. 숨막히는 시간이 흘러갔다.
 태림은 노트를 맨 뒤로 돌려 현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TO. 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미안하다고 해야겠지?
 난 그곳에서 널 보게 되리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어, 아무리 속없는 우리 아버지 이지만 그런 짓을 하리라고는....
 정말 미안해, 우리 아빠를 용서해 달라는 말하지 않을게 하지만 우린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걸까?
 내가 너무 큰 욕심을 내는 거니.
 난 널 너무 좋아하는데, 지금까지 만났던 그 누구보다 더 널 사랑하고 아끼고 믿어. 우리 아버지가 밉고 용서가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날 한 번만 용서해 줄래.
 지금까지 난 아버지를 사랑해 본적이 단 한번도 없었어. 언제나 강압적이고 무섭기만 한 사람일 뿐이지. 지금도 난 아버지이지만 아버지가 아닌 것 같아. 
 이해 할 수 있니.
 없을 거야, 이런 내 자신도 날 이해 못하니까. 너도 지금쯤은 세준 오빠와 내 관계를 알겠지.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닌데 난 얼굴도 보지 못하고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에게 시집이란 걸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갔어, 지금 너에게는 오빠라고 쓰지만 아직까지 단 한번도 오빠라고 부른 적도 소리내어 이름을 불러 본적도 없어. 솔직히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잘 몰라.
 난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했어, 하지만 우리 엄마와 넌 정말로 날 걱정해 주고 사랑해 주었지, 난 너의 그 사랑이 너무 좋았어, 그걸 우리 아버지라는 인간이 망쳐 버린 걸 믿을 수가 없어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쫓아가서 죽어버리라고, 우리 인생에서 제발 사라져 버리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불쌍한 우리 엄마 때문에라도 그럴 수가 없어.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엄마를 그 집에서 데리고 나오는 게 내 꿈이었어, 엄마가 더 이상 험한 꼴을 보기 전에 말이야. 그런데 그것도 안 돼.
 나 참 웃기지 안 되는 것도 많고 할 수 없는 것도 많고 내 인생은 끝나는 순간까지 이렇게 있으면서 변하지 않을 까봐 무섭다.
 내 소중한 친구인 현아. 날 용서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날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 줘, 그리고 내가 널 사랑하는 것도 잊으면 안 돼.

                                             너의 영원한 팬이자 친구인 태림으로 부터


 태림은 편지를 다 쓰고 나서 현이 화장실에 갔는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현의 책상 서랍에 넣어 놓고 교실 밖으로 나왔다. 편지를 발견한 현의 옆에서 그녀가 편지를 다 읽고 나서 무슨 답변을 할지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아 태림은 햇살이 따사롭게 비추는 창가에 기대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유정은 하루 종일 틈만 있으면 태림과 현의 얼굴을 살폈다. 태림은 정말로 많이 아팠는지 얼굴이 핼쑥해져 있었고, 현은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지 그 밉살스럽게 하얀 얼굴이 단단히 굳어 있었다.
 '아무래도 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유정은 단 한번도 태림에게 진심인적이 없었지만 현이 나타나 항상 자신에게 잘해주던 태림이 현에게 관심을 돌리자 화가 나고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태림은 내성적인 성격인 탓에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어도 그걸 쉽게 받아들이지 못해서 친한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유정에게 잘 해주었고, 유정이 부탁하는 일이면 거절하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였는데, 현이 끼어 들고 나서부터는 태림을 자신의 뜻대로 할 수가 없자 단단히 삐쳐 있었다.
 사실 아버지만 아니었어도 태림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건설회사의 사주인 태림의 아버지는 영향력이 많았기 때문에 유정의 아버지도 그의 연줄을 타고 언젠가는 국회에 진출하는 것이 꿈이었기에 그 집안의 외동딸인 태림에게 딸을 붙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태림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유정은 태림이 노트 뒤에 뭔가를 열심히 적어서 현의 서랍에 집어넣고 나가는 걸 놓치지 않았다.
 유정은 남의 것을 몰래 보면 안 된다는 양심의 작은 소리를 무시하고 다른 친구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현의 자리 옆을 지나면서 일부러 연필을 떨어 틀렸다.
 "어머."
 유정은 친구들이 자신에게 별다를 관심을 가지지 않자 태림이 넣어두었던 쪽지를 조심스럽게 꺼내어 들었다.
 "너 내 자리에서 뭐 하는 거니?"
 "엄마야."
 현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내려보자 가슴이 찔렸지만 유정은 가슴을 내밀고 섰다.
 "연필 떨어트려서 좀 주었다. 왜 톱스타 자리에는 그런 것도 떨어지면 안되니."
 "누가 그런다고 그랬어. 다 주었으면 좀 비켜 줘. 가방 싸야 하니까."
 "알았어. 좋겠다 촬영 핑계 치고 수업 안 들어도 되잖아."
 유정은 현이 가방을 챙기기 위해 다른 곳에 눈길을 둘 때 쪽지를 손바닥 안에 꼭 쥐어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게 했다.
 "잘 다녀와."
 "니가 웬 일이니. 나한테 인사를 다 하고."
 '으그, 정말 밉살스러운 계집애라니까. 쪽지만 아니었으면 너한테 말도 안 붙인다 내가. 도대체 태림이는 이런 새침데기가 뭐가 좋다는 건지.'
 "애도 같은 반 친구끼리 그 정도 인사는 할 수 있는 거잖아."
 유정은 다른가 떨려 더 이상 서 있을 자신이 없어지려고 하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무슨 내용일까.'
 편지를 다 읽은 유정의 얼굴은 파리해 졌고, 두 손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다른 여학생들은 그런 유정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유정의 표정은 독을 쏘기 위해 준비하는 독사처럼 두 눈에 가득 독기를 머금고 편지를 사정없이 구겨버리고 있었다.
 '김태림 널 용서 할 수 없어. 어떻게 감히 네 가지께 세준 오빠의 아내가 될 수가 있어. 어떻게 날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어. 널 용서 못해. 세준 오빠를 너한테 절대로 줄 수 없어. 세준 오빠는 내 꺼야. 너 같이 세상 물정 모르고 세상의 깨끗함이 다 내 것인 냥 하는 애는 세준 오빠를 가질 자격이 없어."
 유정은 태림이 자신을 가장 소중히 아끼는 친구가 아니라는 건 상관하지 않았고, 그런 것에 상처받지도 않았다.
 유정은 현의 뒤에 세준이 있다는 걸 아버지를 통해 잘 알고 있었기에, 현이 잘 아는 세준 오빠라면 무성전자의 정세준을 말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나중에 자신이 세준의 아내가 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현을 그의 곁에서 때어 놓는 것이 유정의 계획이었다.
 태림이 자신을 기만했다는 걸용서 할 수가 없었다. 세준 오빠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말했을 때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고 비웃었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쫓아가고 싶었지만 자신에게도 세준과 태림의 결혼이 알려지는 것이 이득이 되지 않는 다는 걸 깨닫고 죄 없는 편지를 꼬깃꼬깃 만들었다.


 태림은 따뜻한 햇살을 받고 있으면서도 한기가 들어 팔뚝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갑자기 왜 이렇게 춥지."
 태림은 교실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리다가 가방을 매고 자신의 옆을 싸늘한 시선으로 지나가는 현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저기..."
 하지만 현은 멈추지 않았다.
 태림은 옆을 지나가는 현과 함께 자신의 가슴속에서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현이 자신의 곁을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지나간 그 순간부터 태림의 하루는 편지를 쓰기 전보다 더 엉망이 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날 이후 현은 학교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친구들이 알려주는 현의 드라마데뷔와 가수로써의 출발한 소식을 듣지 못했더라면 현이 자신을 피하기 위해서 학교에 오지 않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태림아. 너 요즘 너무 외로워 보인다."
 태림은 자신에게 별로 신경을 쓰지 않기 시작한 유정이 갑작스레 친근하게 대하자 혼란스러웠지만 유정에게 그 속내를 들어내지는 않았다.
 "내가? 아니 괜찮아."
 외로웠다. 뼈에 사무칠 만큼.
 보고 싶은 엄마와 전화통화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고, 시아버지의 사랑이 있지만 시어머니와 가장 중요한 남편의 관심을 받지 못해서 힘들었고, 마음을 의지하게된 이현이 곁에 없어서 외로웠다.
 "뭐가 괜찮니, 얼굴에 외롭습니다 라고 쓰여져 있는데, 오늘 수업 끝나고 내가 빵 사줄게 나랑 같이 놀자."
 "그게..."
 "나가자. 우리 고3되고 나서는 떡볶이 한번 먹으러 간 적 없는 거 너 아니?"
 유정이 태림의 팔에 손을 감고는 애교스러운 눈웃음을 해 보였다. 순간 태림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수업이 빨리 끝나는 날이고, 한번쯤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좀 늦는 게 어떠냐 라는 생각이 그녀를 좀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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