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준은 집으로 돌아온 태림의 얼굴을 그녀가 눈치 못 채게 요모조모로 살펴보았다. 언제나 그녀의 얼굴을 살피는 것이 버릇이 되어 버린 그는 그녀의 변화에 민감했고, 오늘도 역시 그가 일찍 돌아 왔을 때처럼 태림의 얼굴에서 뭔가 다른 것을 보았다고 맹세 할 수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목소리도 밝았다. 하지만 세준은 언제나 학교와 집만을 다니며 빡빡한 일상을 보내는 데다가 아직 어린 나이에 하는 결혼생활에서 어쩌다 한번쯤 친구들과 놀러 다닌 다고 해서 뭐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왜 만나는 친구에 대해서 거짓말을 했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유정이하고 있다가 오는 길이야?"
"네? 아 네."
세준의 눈에 태림은 뭔가 걸리는 게 있는 눈빛이었지만 심증만으로 그녀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고, 그런 의심으로 아직 시작하지 않는 그녀와의 관계를 무너트리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께 요즘 연락 자주하고 있지."
태림은 갑자기 엄마에 대해서 물어오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마지막 말은 처음 말보다 그녀를 더 놀라게 했다.
"네. 아까도 통화했어요."
세간의 눈을 피하기 위해 아직 부모님들의 만남은 피하고 있었다. 김진만 사장을 만나는 건 사업상의 문제라 별것 없을 수도 있지만, 태림의 어머니를 만나는 것 다른 꼬리표가 붙을 가능성이 있었다.
"안부 전해드려. 피곤하겠다 올라가서 쉬어."
"네."
태림은 세준의 눈빛에 자신을 의심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관심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었고, 눈치 챌 여지도 없었기 때문에 태림은 찜찜한 기분을 풀기 위해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고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본 태림은 놀랐다. 그녀의 볼은 상기되어 있었고, 눈은 빛나고 있었다. 한 번의 외출이 몇 시간의 즐거움이 이토록 많은 변화를 불어 일으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태림은 젖은 머리를 말리며 욕실 밖을 나왔다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세준의 눈길에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세준은, 적어도 그녀가 방안에 있을 때에는 소파에 앉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는 그녀가 자는 소파에 걸터앉아 욕실에서 나오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저한테 뭐라도 묻었나요?"
태림은 벽에 걸린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 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고, 혹시 옷이 이상한가 싶어서 옷까지 확인했지만 이상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내려가서 밥 먹자."
"네."
돌아서서 나가는 세준의 뒷모습에 태림은 상원과의 만남을 그만 두어야 겠다는 자각이 강하게 들었다. 세준에게 아무리 어리고 철없는 신부라지만 그 신부가 남자를 친구로 두고 몰래 만나는 걸 좋아할 리는 없다는 걸 방금 그녀를 바라보는 강한 눈빛에서 알았다.
용서란 없는 눈빛. 꼭 사물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아버지의 잔인한 눈빛보다 더 무서웠다.
"어제 재미있었어?"
유정은 학교에 오자 마자 태림에게 달려와 어제 상원과의 만남에 대해서 물었다. 태림은 상원이 만나자고 청하자 그를 소개 시켜준 유정에게 말했고, 부탁했었다.
"어."
태림의 짧은 대답에 유정은 태림의 정수리를 흘겨보았지만 떨어진 볼펜을 줍던 태림은 그녀의 시기 어린 눈빛을 보지 못했다.
"어디 갔었어."
태림은 유정의 목소리에 친구들이 엿들을 까봐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데었다.
"동물원."
"동물원?"
"응."
"얘 하필이면 왜 동물원이야. 음악 홀도 있고, 더 좋은 데가 얼마나 많은데."
"그냥 동물원이 가고 싶었어."
"넌 참 별난 애인 것 같아. 가질 것 다 가지고서도 부족해하니 말이야."
태림은 처음으로 유정이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유정은 현처럼 태림의 내면을 본 것이 아니라 그녀의 보여지는 모습과 아버지의 영향력만을 보고 태림을 판단해 온 것이었다.
그 깨달음이 더욱더 현의 빈 자리를 크게 했다.
"요즘 텔레비전 보니?"
"아니. 뭐 재미있는 거 해?"
"난 별로 재미 없는데, 다른 사람은 재미있다고 하더라. 현이 나오는 거야."
태림은 현이 나온 다는 말에 기쁨이 몰려왔다.
"현이 주인공이야?"
"아니 주인공은 아니야. 주인공 여동생으로 나와서 쏠쏠하게 나오더라."
태림은 텔레비전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텔레비전에서 보여지는 가족들의 단란한 모습이 그녀를 더욱 힘들게 한 적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저 유정아? 부탁이 있는데."
"뭔데?"
태림은 힘들지만 그리고 더 외롭겠지만 상원과의 만남에 종지부를 찍기로 결심했다. 가능한 빨리.
"상원오빠에게 이제 나 못나간다고 말해줄래. 사정이 생겼다고."
유정의 눈이 차가워졌다.
"왜?"
"그러면 안될 것 같아서. 나... 상원오빠가 참 편하고 좋지만 오빠를 좋아하는 건 아니거든. 그런 마음으로 만나면 안될 것 같아서. 부탁해도 될까?"
"그래. 네가 그런 마음이라면, 하는 수 없지 하지만 네가 직접 말하는 게 좋지 않을 까."
"그렇겠지?"
태림은 하늘을 내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 태림의 가식적인 모습에 유정은 손톱 자국이 나도록 주먹을 꼭 쥐었다.
"그래. 하지만 내가 운만 띄워 놓을게."
"아내야. 네 말대로 내가 직접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아이 말이 나온 후로 시어머니는 확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많이 누그러지기 시작했고, 가끔은 태림의 학교 생활을 물어오기도 하고 태림에게 필요한 옷이며 생활 용품을 직접 사다주는 애정을 보여줘 태림을 기쁘게 했고, 그런 가족들의 행동들이 상원을 만남 태림의 마음에 더욱 상처를 내고 있었다.
상원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 먼저 나와 있던 태림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다시 한번 생각하고 정리했지만, 생각처럼 쉽게 말이 나올 것 같지 않아 걱정스러웠다.
"먼저 나와있구나."
"네."
상원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갸름한 얼굴의 태림을 내려다보았다. 태림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다는 것도, 그녀의 마음에 이미 다른 사람이 차 있다는 것도 알지만 그녀가 자신과 있을 때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 좀처럼 그녀를 향한 마음을 정리 할 수가 없었다.
"무슨 걱정거리 있니?"
태림은 상원의 날카로운 관찰에 놀랐다. 하지만 결정을 미룰 수는 없는 일이었다.
"너무 갑작스럽다는 건 알지만...."
"뭔데?"
그렇게 물었지만 상원은 태림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우리 그만 만나야 할 것 같아요."
"왜?"
"..."
"우린 그냥 좋은 친구 사이처럼 만나기로 했잖아."
그의 마음은 그것이 아니었지만 그런 사이라도 유지 할 수 있다면 그는 참을 수 있었다.
"그러면 안될 것 같아요. 제가 전에 말했죠.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요."
"알아."
"그 사람이... 저 때문에 마음 상하는 거 싫어요."
"난 괜찮고?"
"죄송해요."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시선을 피하는 태림을 상원은 안타깝고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 그녀에게 강요 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이만 가볼게요."
"잠깐만."
상원은 발길을 돌리려는 태림은 불러 세웠다.
"그럼 우리 마지막으로 함께 걷지 않을래?"
태림은 상원의 따뜻한 눈길에, 그의 목소리에 차마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하지만 내내 걸어오면서 태림은 상원과 마지막으로 함께 걷는 것을 후회했다. 차라리 좀 전에 헤어졌다면 이런 서먹한 분위기를 계속 유지하지 않았어도 되었을 거라는 깨달음이 태림의 머릿속에서 떠나지가 않았다.
세준은 오늘도 태림이 집에 들어와 있지 않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태림을 기다리는 것도 싫지 않았지만, 그가 왔다는 걸 아는 즉시 방에서 내려와 그를 맞이하는 그녀의 모습이 더 그리웠다.
"아직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네. 작은 사모님이 오늘은 좀 늦으시네요."
"어제는 일찍 들어 왔었나요?"
"네. 요즘은 학교가 끝나자 마자 바로 들어오셨어요."
세준은 혼자 방으로 들어가면서 태림이 항상 자는 소파를 먼저 바라보았다.
따르릉
전화벨이 울리자 세준은 태림의 전화이기를 바라며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전 태림이 친구인데요.-
세준은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나이에 맞지 않게, 꼭 혜란 처럼 가르랑거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 인지 알았다. 바로 지난번 전화했던 유정이라는 친구였다.
세준은 그 유정이라는 친구가 창사 기념일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옷을 입고 자신의 아버지를 따라왔던 그 유정이라는 아이가 생각이나 싫었다. 목소리도.
"태림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는데."
-어머! 정말요? 진작에 집에 간다고 갔는데.... 무슨 일이지?-
"집에 일찍 간다고 했다고?"
-네. 오빠 일찍 들어온다고 빨리 갔는데, 어! 이상하다. 태림이가 집에 늦게 들어갈 애가 아닌데.-
"알았어요. 고마워요. 곧 들어오겠죠."
세준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양복 상의만 벗은 채로 밖으로 나갔다.
유정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마치 쥐를 코너에 몰아넣은 고양이처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세준을 가지지 않아도 좋았다. 하지만 태림이가 그를 가지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세준은 무작정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태림을 동네 어귀에까지 걸어가서 기다렸다.
지난번에도 거의 이 시간 무렵에 들어왔으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짐작할 뿐이었다.
그가 예상한 시간 보다 조금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에 태림이의 모습이 누런 가로등불 아래로 보였다. 하지만 태림이 혼자가 아니었다.
그가 가장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그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태림과 말쑥하게 생긴 남자는 서로를 마주보며 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태림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남자는 어두웠지만 애절해 보였다.
돌아서는 남자의 뒷모습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보던 태림은 눈물을 훔치는지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그 모습이 세준의 야성적인 본능과 거의 사라졌다고 믿었던 쓰라림이 드러나게 했다.
다시는 그런 꼴을 당할 수는 없었다. 그것도 그에게 그런 상처를 쥐어 주었던 딸에게 말이다.
태림은 상원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쉽게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기에 뒤돌아서 집으로 향하는 세준의 모습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