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모욕한다면 하늘이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 아내를 살해한 어느 남자의 이야기 -
머 리 말
세월 앞에서 우리 모두는 숙련되지 않은 창녀와 같다. 두려움으로 방구석에서 떨고 있을 때 술에 취한 세월이 들어온다. 우리는 울며 세월을 받아들인다. 세월의 거친 행동이 우리를 겁에 질리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마땅한 방법을 알지 못하기에 훌쩍거리기만 할 뿐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세월은 떠난다.
우리는 세월이 남기고 간 흔적을 채 정리할 틈도 없이 세월이 닫고 가는 문소리를 들어야 한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 문소리가 차갑다고 느끼지만 그 어떤 소리도 지르지 못한다. 그리고, 한없는 불안에 떤다. 또 다른 세월이 우리에게 미칠 두려움의 크기를 가늠하면서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어떤 규칙이나 절차를 따라 움직인다. 그게 때때로 공포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격렬한 욕망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렇게 사는 동안 남을 돌아볼 여유를 잃어버린다. 오히려 우리에게 이따금씩 쏟아지는 따스한 시선을 불안한 의심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런 시간을 거치면서 우리는 점차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면서도 어떤 열기처럼 우리는 이 혼란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친다. 우리는 버릇처럼 사랑을 구하고 평안을 구하고, 또한 모든 것을 용서하는 습관을 기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익숙해 있지 않음으로 오늘도 다가오는 햇살을 피해 서둘러 도시의 그늘 속으로 사라지는 초라한 들짐승인 것이다. 당신도 절대 예외는 아니다.
그래도 우리는 산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희망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만약 질식할 것 같은 이 도시에 희망이 없다면 도시는 단지 우리의 시체를 치우기 위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당신이 살고 있는 도시는 어떠한가.
제 1 장 침묵의 법칙
1. 지점장의 자살
장소부터 이상했다. 왜 하필 병원이란 말인가. 승찬은 막 입사한 미스 김을 보내려다가 매일 수신고를 신경 쓰는 지점장이 떠올랐다. 거액을 예치한 노파가 아닌가. 만약 그 노파가 다른 곳으로 은행을 옮기면 지점 전체의 수신고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게 뻔했다.
게다가 며칠 전부터 다른 은행과 합병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합병이 되면 많은 사람이 은행을 그만두어야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돌았다. 여기서 그만 둘 수는 없었다. 특히 요즘 같이 어려운 때에는 그만 두면 달리 갈 곳이 없었다. 승찬은 이를 악물고 전화를 끊을 때의 노파의 음성을 잊으려고 애를 썼다.
승용차로 가려다가 얼마 되지 않은 거리임으로 승찬은 걷기로 했다. 서울대학병원이라면 십 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은행 문을 나오자 탄천이 눈에 들어 왔다. 개를 데리고 걷는 사람들의 옷이 많이 두터워져 있었다. 어제 온 비 때문인지 거리 곳곳에 낙엽이 뒹굴고 있었다.
탄천이 차갑고 깨끗하게 느껴졌다. 추위를 피해 날아온 새들이 탄천에서 헤엄을 치고 있었다. 요즘 들어 부쩍 많아졌다. 다리를 건너자 산 위에 서 있는 하얀 건물이 호텔처럼 다가왔다. 서울대학병원이었다.
천천히 걸으면서 어떤 굴욕을 주더라도 꼭 노파를 설득하겠다고 다짐했다. 고객을 감동시키는 것을 넘어서서 감격시켜야한다고 어제 온 강사는 말하지 않았던가. 고객의 눈물이 보일 때까지 서비스를 하지 않으면 어떤 조직이든지 살아남을 수 없다. 그 강사는 마치 시민 은행의 부실이 승찬에게 있는 것처럼 승찬을 보며 똑똑히 말했었다.
어느새 병원이었다.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선택할 길은 없었다. 승찬은 방 번호를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방에서는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조바심이 났지만 기다렸다. 십분 쯤 기다려도 아무 소리가 없어서 다시 노크를 하려고 할 때 노파는 문을 열었다.
노파의 눈초리는 이미 경멸을 품고 있었다. 돈이 있는 자가 가지고 있는 거만함이 금테 안경 너머에 바늘처럼 촘촘히 박혀 있었다. 승찬은 이를 악물고 웃었다. 여기서 물러서면 끝이었다.
“서민은행에서 온 이 승찬입니다. 진즉에 문병을 왔어야하는데 늦었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바닥에 앉아.”
“예?”
“바닥에 앉으라는 말도 안 들려?”
“아, 예.”
승찬은 비위가 확 상했다. 호텔 같은 병원도 그렇지만 뻔히 소파가 있는데 바닥에 앉으라는 심보는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바닥에 양반 자세로 앉았다.
“무릎 꿇고 앉아.”
“예?”
“이런 아둔한 놈을 보았나? 고객 앞에서 양반자세로 앉는 놈이 대한민국 천지에 어디 있어? 너는 고객만족 교육도 안 받아?”
분노가 치밀었으나 참고 승찬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게 뭔 줄 알아?”
돈이었다. 만 원권 지폐였다.
“만 원 짜리가 아닙니까?”
“알고 있구나. 좋아. 아주 또라이는 아니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군. 자, 잘 들어. 이 돈을 혀로 핥아.”
승찬의 눈앞으로 만 원 짜리 지폐가 마치 정화조에서 꺼낸 것처럼 다가왔다. 갑자기 분뇨 냄새가 방안을 진동하는 것 같았다. 돈은 바닥에 떨어졌다. 승찬은 물끄러미 그 돈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정말 은행을 위해서는 핥고 싶지만 냄새가 너무 많이 나는 것 같았다. 노파의 신경질적인 말이 이어졌다.
“네가 다니는 은행 입구를 보니까 손님을 감격시킨다고 되어 있더군. 어디 한번 나를 감격시켜 봐. 뭐 어렵지도 않아. 네가 그 돈을 핥으면서 멍멍하고 개가 짖는 소리를 하면서 기어 다닌다면 내가 감격하여 펑펑 울 것 같은데 어때 할 수 있겠어?”
승찬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다른 선택이 없지 않은가. 그는 돈을 입으로 핥았다. 그리고 멍멍하고 짖었다. 분노가 치밀어 눈물이 나려고 했으나 꾹 참았다.
“좋아, 좋아. 이제 방바닥을 기어 다녀야지.”
참으려고 했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승찬은 눈물을 흘리면서 방을 기어 다녔다. 그리고 큰 소리로 멍멍하고 짖었다.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간절히 기다렸다. 노파가 이제 그만 됐다고 하는 소리를. 하지만 노파는 아직 감동을 하지 않았는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승찬은 노파를 바라보았다.
노파는 아주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다시 수그러들었던 분노가 치밀었다. 수신고를 위해서 꼭 이래야만 하는 것일까. 그때였다. 노파는 아예 속을 뒤집어 놓으려고 작정을 했는지 황당한 말을 했다.
“개가 신사복을 입고 있으니까 영 개처럼 보이지 않는군. 옷을 벗으면 아주 개처럼 보일 텐데.”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 고객 감동도 고객 감동이지만 도무지 인간 이하의 짓까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참아야 했다. 몇 사람의 운명이 달려 있을 지도 모르지 않은가. 승찬은 간신히 분노를 진정하고 겨우 말했다.
“.....그렇게는 못 하겠는데요.”
“아아, 뭘 그래. 어차피 버렸는걸. 그리고 개가 아주 잘 어울리는데 자, 한번만 나를 감동시키면 내가 내 친구들 다 그 은행으로 데려갈 게. 너, 그럼 바로 지점장을 할 수 있을 걸. 요즘 같은 어려운 시대에 너처럼 새파랗게 젊은 놈이 지점장을 한다면 아주 폼이 나겠지?”
“싫습니다. 조금 더 신사적인 방법으로 고객 상담을 하고 싶습니다.”
“뭐-뭐라고! 신사적인 방법으로 고객 상담을 한다고? 웃기고 있네. 웃기고 있어. 네 놈이 아주 간덩이가 부을 때로 부었군. 아냐, 아냐. 너 이제 보니 또라이가 맞지? 너 짤리고 싶어 환장한 놈이지? 그래. 네 소원대로 해 주지. 내가 그 은행에 박아 놓은 돈을 빼서 다른 은행에 넣으면 넌 아주 깨끗하게 목이 잘릴 걸? 어때, 개 양반 그것을 원하는가?”
나가고 싶었다. 어차피 틀린 일이었다. 더 이상 있어 봐도 나아질 게 없었다. 하지만, 승찬은 더 참아보기로 했다.
“죄송하지만 한 달만 참아주면 안 되겠습니까.”
“버러지 같은 놈이 말이 많군. 단돈 일 억도 돌릴 줄 모르는 놈들이 뭘 안다고 까불어. 능력이 없으면 시키는 대로라도 해야지.”
“...저희 은행이 다른 은행보다 이자가......”
“이 새끼가 점점. 야, 이 새끼야, 누가 그까짓 몇 푼의 이자 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 고객은 이자를 먹고 살지 않아. 고객은 감동을 먹고 살지. 네 은행에 그렇게 적혀 있는 것을 너는 보지도 못 했어.”
“하루 이자가 제 몇 달 봉급과 맞먹는데 몇 푼의 이자라니 너무 하시는 것 아닙니까?”
“내가 몇 푼이라면 몇 푼인 거지, 왜 이리 말이 많아.”
무엇이든 던지고 나가고 싶었다. 돈에 대한 서러움은 여기서 끝내고 싶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돈에서 자유롭지 못했는데 자유는 고사하고 모욕을 당해야하다니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아니, 참고 싶었다. 승찬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사모님.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곧 은행이 합병을 합니다. 사모님의 결정에 우리 직원 몇 명의 목숨이 날아갈 지도 모릅니다.”
“난 잔소리 하는 놈 정말 싫어.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정말 개처럼 기어 다니면서 짖어보라고. 어때, 내가 옷은 벗겨줄까?”
노파는 옷을 벗기려고 다가오고 있었다. 승찬은 심호흡을 했다. 어차피 딱 한 번뿐이었다. 그리고 보는 사람도 없었다. 이 어려운 시기에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운명도 걸려 있는 문제였다. 승찬은 심호흡을 하면서 천천히 웃옷을 벗으며 노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노파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승찬은 노파의 미소를 생각해보았다. 그 미소는 돈에 굴복하는 인간에 대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 그렇다. 더 이상 망가져서는 안 되었다. 승찬은 옷을 벗는 것을 멈추고 노파에게 다가갔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노파는 승찬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음을 알았다. 그리고 뒷걸음치며 도망치려하고 있었다. 승찬은 노파의 멱살을 잡았다. 노파는 숨이 막힌 지 캑캑 거렸다.
“어이, 할망구. 잘 들어. 내가 정말 더러워서 못해먹겠어. 그러니까 할망구는 거래처를 다른 데로 옮겨. 그리고 그 배 떼지가 하늘만큼 솟고 벽에다 똥을 쳐 바를 때까지 잘 살아. 응. 제발 일찍 죽지 말고 잘 살아. 알았지?”
“네 놈이 아주 미쳤구나.”
노파는 캑캑거리면서도 할 말은 다했다. 있는 자의 자존심이었다.
“그래, 나는 미쳤으니까 할망구는 조심해. 이 돈 벌레 할망구야. 돈 가지고 무덤 속에 들어가서도 예금 상담한다고 하면서 오늘처럼 꼭 하라고? 알았지!”
“어디, 네 목이 붙어 있나 보자.”
“할망구 목이나 조심해. 그렇게 인간성이 더러워도 여태껏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은 당신이 한국이라는 아주 좋은 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이야. 감사하게 생각해. 알았지. 아참, 당신은 뵈는 게 없으니 안경이 필요 없겠군. 내가 이 안경은 가져가지.”
“이 놈 거기 안 서.”
승찬은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탄천으로 내려가 마구 달렸다. 헤엄치던 오리 몇 마리가 놀라서 후드득하며 날아갔다. 아무리 달려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미금역으로 달려가서 아무 술집에나 들어가서 소주를 마셨다. 안주도 없이 소주 서너 병을 들이 키고 나니까 화가 조금 삭여졌다. 그래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허탈함은 조금도 지워지지 않았다.
성실이라는 선을 어기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살아온 세월 동안에 이처럼 서럽고 황당한 기억이 있었던가. 생각할수록 자신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승찬은 그 날은 은행에 들어가지 않았다. 아무 곳에도 의지할 곳이 없었다. 그냥 술이나 마시고 싶었다.
밤이 늦도록 술을 마시고 아침에 은행으로 나갔다. 대강의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지점장은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정말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지나갔다. 하지만, 아무 것도 나아진 것은 없었다.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될 뿐이었다.
말이 없던 지점장은 갈수록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어떤 때는 화를 내다가 화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기도 하였다. 그것은 그런대로 봐줄만 했다. 점점 상태가 악화되더니 나중에는 고객과 상담하다가 갑자기 일어서서 고객을 감동시키겠습니다, 라고 외친 후에 서너 번을 외치다가 앉곤 하였다. 놀란 고객이 지점장을 바라보면 지점장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역시, 감동되셨군요. 저희 은행은 언제나 고객을 감동시키는 은행입니다.”
어이가 없는 고객이 지점장의 뺨을 때려도 지점장은 웃을 뿐이었다. 나중에는 이 놈 미친 놈 아냐 정말 재수 없군, 이라고 해도 고객이 감동한다면 저는 미친놈이 되어도 좋습니다, 라고 말해 고객을 질리게 만들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본사에서 예금실적을 물어오면 이 몸이 꼭 예금유치실적을 초과달성하겠습니다, 라고 말한 후에 밖으로 나가서 몇 시간이고 거리를 헤매다가 축 늘어진 어깨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런 지점장을 그 노파는 죽이기로 작정을 한 것 같았다. 잊어먹을 만하면 지점장을 찾아왔다. 그리고 다른 은행으로 계좌를 금방이라도 옮길 것처럼 거만을 떨었다. 지점장이 큰 소리로 개 짖는 소리를 다섯 번을 하고 나면 더 생각해보지 하고 말하면서 지점장 방을 나왔다.
이렇듯 노파는 아주 잔인했다. 돈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누려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지점장이 수신 실적 때문에 노이로제가 걸려 피폐해 질대로 피폐해져 병원으로 실려 가는 것을 보고 그 노파는 다른 은행으로 계좌를 옮겨 버렸다. 불쌍한 지점장은 병원에서 링거를 맞다가 감원을 통보 받았다.
그런 시간동안 승찬은 매일 술집으로 퇴근을 하였다. 승찬이 감원 당한다는 소문이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갔다. 그는 그 소문을 무시했다. 그리고 매일처럼 술에 취해 새벽에 오피스텔에 들어갔다. 오피스텔은 더 이상 사람이 사는 공간이 아니었다. 덫에 걸린 짐승이 초라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곳이었다.
“이제 끝났어. 괜히 고생하면서 대학까지 나오느라 놀지 못한 세월이 원망스럽군.”
시간이 갈수록 더 이상 기댈 게 없다는 체념이 승찬을 강하게 붙들고 있었다. 아직도 정식으로 감원은 발표하지 않았다. 며칠 새 나올 것이라는 애기만 무성하게 퍼져갔다. 차라리 빨리 나왔으면 하고 푸념하면서 술을 마시다가 승찬은 지점장이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지점장 부인의 목소리는 희망을 찾아볼 수 없었다.
“승찬씨, 이제 어떡해요. 우리 애 아빠가 그만 옥상에서 떨어져......”
지점장의 부인은 울고 있었다. 착한 여자처럼. 승찬은 그녀에게 욕을 해주고 싶었다. 왜 그렇게 약하게 살아서 이 땅을 돈 많고 심술궂은 사람들의 도시가 되게 하느냐고. 당신들이 약하니까 그 사람들이 더 설치는 것은 아니냐고. 마구 소리를 질러주고 싶었다.
“꼭 오세요. 은행에서 아무도 오지 않았어요.”
승찬은 가지 않았다. 더 이상 아무런 이유도 없이 도망치던 자의 최후를 보고 싶지 않았다. 착한 여자의 나약함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 노파처럼 이 세상을 조롱하는 여자의 웃음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래야, 조금은 덜 슬플 것 같았다. 당신이 악한 일을 했으므로 벌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점장도 지점장이 부인도 전혀 벌 받을 짓을 하지 않았는데 저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엄연히 살아 있는 세상이 싫었다. 아니 그런 세상을 살고 있는 자신이 싫었다. 승찬은 아주 엉망이 될 때까지 술을 마시고는 지점장의 빈소를 바라보면서 새벽이 올 때까지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