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망하지.. 부끄럽지.. 고개도 못 들겠지. 와서 밥이나 먹어 자는 척 하지말고"
"하나도 안 민망해"
"그럼 와서 밥이나 먹지.. 나 출근해야하거든.."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죄인처럼 행동하는 저 녀석이 안스럽게 보인다. 어깨에 힘이 하나도 없는게.. 내가 더 이상 뭐라고 말하지도 못하겠다.
"속은 괜찮아"
"조금 아파"
"조금 아프겠냐. 아주 많이 아프겠지. 너 때문에 내가 바닥에 잤어"
"....."
"입이 열개라도 할 말도 없겠지. 너 때문에 2년 만에 아침밥 먹어본다. 고맙다"
"아침밥 안 먹고 출근해.. 밥상 보니까 아줌마 요리 못하지. 이게 콩나물국이야. 그냥 콩나물 찌개야 밥도 사오고.. 너무하네"
"너 아침부터 숟가락으로 한번 맞아볼래."
"전 요리도 잘하고 설거지도 잘하고 청소도 잘하는데.. 내가 아줌마 대신 해줄까?"
"지금 미안해서 그러지.. 그래도 양심은 있네.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다시는 너 보는 일 없을거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밥이나 먹어"
"날 다시는 못 보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아줌마.. 첫 사랑이랑 결혼해"
"..."
"내 말에 대답해"
이제 말해야 할때가 온것 같다. 그런데 뭐라고 말하지.. 인상만 쓰고 있는 저 녀석의 얼굴을 보니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 녀석한테 쩔쩔매는거야. 이 녀석이 나한테 뭔데.. 그냥 외할아버지 때문에 이 녀석과 어쩔 수 없이 만나는거잖아. 외할아버지가 아니면 난 이 녀석과 만날 이유도 볼일도 없을거다. 평생.. 아주 평생... 이 녀석을 모르고 살았을것이다. 우린 그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관계이니까?
"밥이나 먹어. 속 아프잖아 얘기는 다 먹고 해도 늦지 않아"
"난 지금 듣고 싶어"
"좋아"
"....."
"너랑 결혼 안해. 물론 그건 너도 마찬가지겠지만.. 그 점에 대해서 우리 둘은 의견이 같아. 하긴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는 웃기는 얘기였어."
"그래서 나와는 웃기는 사이니까? 첫 사랑 그 남자와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말이야"
"글쎄... 그건 나도 몰라. 내가 정확히 말 할 수 있는 것은.. 난 한달 뒤에 한국에 없다는거야. 오늘 부모님께 말하려고해"
"그게 무슨 말이야.. 한달뒤에 한국에 없다니.. 그럼 어디가"
"해외로 발령날 것 같아. 내가 원하는 일이고.. 바라는 일이야. 공부도 더 하고 싶고... 잘 된 일이지"
"결혼해서 가는거야"
"아니.. 결혼.. 내가 22살 때 그 사람을 처음 만났어. 그때 인연이 있었다면 결혼했겠지. 그러나 우린 헤어졌고, 지금 난 일이 더 좋고, 사랑은 나중에.. 나중에.. 아님 영영 못할지도 모르지"
아무말도 안하는 저 녀석. 그저 국하고 밥만 먹고 있다. 처음으로 내 손으로 밥을 해준 녀석이 하필이면 저 어린 녀석이라니.. 동욱오빠에게 늘 아침마다 밥을 해주는 꿈을 꾸었는데.. 내 손으로 밥을 하고 찌개를 준비하고 반찬을 만들고.. 그리고 동욱 오빠는 내가 해준 음식을 먹으면서 즐거워하고... 나도 그런 평범한 생활을 바랬는데.. 그 평범한 것들이 나에게는 하나도 평범하지 않는 일들이다. 너무 어렵고, 힘들고,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숙제들일뿐이다.
"혹시.. 이런 말하면 좀 그렇지만... 혹시 외할아버지한테 사채라도.. 그러니까.. 돈을 갚아야한다던지.. 그런 이유로.. 나와 결혼을 해야한다면... 너는 정말 싫은데.. 어쩔 수 없이 그런 이유로 날 만나고 있는거라면.. 괜찮아. 내가 외할아버지한테 말해줄게. 걱정하지마.. 내가 해결할게."
"아줌마 걱정이나 해"
"집안이 많이 힘드니.. 얼마나 갚아야하는거야. 너희 부모님은 능력이 없는거니.. 그래서 모델 일하고 파출부 일도 해"
"아줌마 혼자 오버하지도 쌩쇼하지도 마"
자존심 상하는구나.. 이해한다. 나라도 자존심 상했을거다. 특히나 20살 어린 녀석한테는 그런 일은 감당하지 어려운 일이거다.
얼마나 힘들고 자존심 상할까? 가여운 자식.. 그런 일이라면 진작 말하지.. 불쌍한 자식. 어린 나이에 안됐어.
"너 삐졌지. 표정관리 안되고 있어."
"안 삐졌어. 화가 났을뿐이야"
"알았어. 난 지금 출근해야하니까? 넌 이 밥 다 먹고 천천히 가. 열쇠는 경비 아저씨한테 맡기고.. 니가 내 조카인줄 알아. 조카인척하고"
"내가 왜 아줌마 조카야"
갑자기 버럭 소리치는 저 녀석때문에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얼마나 놀랬는지... 저렇게 화늘 내니 무서운 구석도 있다.
"아줌마. 아줌마. 아줌마. 나 보다 꼴랑 9살 많다고, 함부로 어린애 취급하지마. 어제 나 아줌마 덮칠 수도 있었어. 맨 정신이였어. 하나도 취하지 않았다구.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모르겠다 이 자식아. 어쭈 이젠 큰 소리까지 치네. 뭘 잘했다고 큰 소리까지 치냐. 막 먹어라 이게 어디서 들이대고 있어. 내가 만만하게 보여"
"아~~유 진짜. 아줌마는 바보팅이다. 아줌마는 바보팅이다. 나이만 먹은 바보팅이다. 아줌마는 평생 아주 평생 사랑도 못해보고 죽을거야.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죽을거라고.. 그렇게 늙어 죽어. 바보팅 아줌마"
그렇게 소리치고는 나가버리는 저 녀석.. 사람 혈압만 올리고 그냥 나가버린다. 나도 할 말이 많은데.. 나보고 바보팅이라고.. 아줌마에서 이젠 바보팅이냐..
"저게 쥐약이라도 먹었나"
분해서.. 너무 분해서.. 눈물이 다 났다. 나이 먹은 것도 서러운데.. 어린 놈한테 이런 소리나 듣고.. 조금 있으면 계란 한판인데.. 저런 어린 녀석한테 그런 악담이나 듣고.. 절대로 절대로 오늘의 일은 잊지 않을것이다. 나쁜 놈
회사에서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혹시나 그 어린 놈이 혹시나 전화해서 잘못했다고 하지는 않을까? 하루종일 그 녀석의 전화를 기다렸다. 그런데 전화는 엉뚱한테서 왔다.
-뭐하냐
"무슨 일이야"
-나와 점심 같이 먹자
"알았어"
-회사 근처 음식점에 있어. 어디에 있는 줄알지
"응. 알아 10분 뒤에 갈게"
친구 미경의 전화였다. 진성이랑 같이 있는 모양이다.
"너 죽었어"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친구들이 얼굴을 보야도 즐겁지가 않다.
"얼굴에 보톡스 맞았냐. 얼굴이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꼬마 신랑이랑 잘 안되는갑지"
"꼬마신랑 같은 소리하지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무일도 없어. 아무튼 지금 이 순간부터 그 놈의 꼬마신랑 얘기하는 인간 있으면 내 손에 죽었어"
"무슨 일 있네"
이것들이 적군인지.. 아군인지.. 아님 원수인지.. 친구인지.. 구분이 안된다. 내가 이런 것들을 믿고 살았다니.. 도움이 안되는 친구들이다.
"진성이 맞선 본 얘기 했어"
"처음 듣는 말인데.."
"몇살짜리가 나왔는지 말해줄까?"
"아주 신났다. 아줌마 배 속에 애기도 있는데.. 마음을 좀 곱게 쓰지"
"37살 완전 아저씨가 나왔데.. 37살. 진짜 말이 되냐.. 니 고모 너무 했다. 아무리 니가 29살 노처녀라고 하지만 37살이 뭐냐. 33살까지 카바되나"
"너나 카바잘해. 지 남편도 35살이면서.. 누굴보고 비웃는거야"
"그런데 우리는 25살 31살에 만났어. 그거랑 차원이 다르지"
"뭐가 다르냐.. 사람 짜증나게 할래"
"알았어. 입 다물고 있을께"
"저거 가만보면 우리 결혼도 못하고 있다고 아주 무시하는 것 같아. 지는 아줌마 주제에.."
"야 여기서 왜 아줌마가 나와."
"그만해라. 밥이나 먹자"
"그런데 너는 왜 그래. 진짜 무슨 일 있는거야"
"아무 일 없다"
"아참 너 동욱오빠 만났지. 동욱오빠... 너 찾았다고 하더라.. 그 누구지 예전에 너랑 동욱오빠 소개 시켜준 애.. 우린한테 죽도록 맞은 애 말이야. 그 애를 백화점에서 우연히 만났어. 지 남편 옷 사러 왔다고 하던나.. 아무튼 남편 하나는 잘 만나서 잘 살고 있는 것 같더라. 너 얘기 묻던데. 내가 연하하고 연애중이라고 했다. 잘 했지"
"지랄"
"꼬마신랑이 너보고 뭐라고 그래"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니야. 결혼은 더욱더 아니고.. 친구들 관심 꺼주세요"
"요즘 그 꼬마신랑 때문에 재미있는데.. 관심을 켜줄게요"
"그렇게 사는게 심심하냐.. 너 백화점 일때문에 바쁘잖아"
"몰라.. 회사에서 자꾸 밀려나는 느낌이야."
"결혼해라"
"결혼은 나 혼자하냐.. 남자기 있어야하지"
"37살 선본남자"
"너 죽고 싶지"
"미안"
그 동안 못했던 얘기를 스트레스 대용으로 풀었다. 그리고 친구들과 헤어지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어떤 여자가.. 좀 어린 여자가 날 불렀다. 난 처음 보는 여자다. 그런데 그 여자는 내 이름을 알고 있다.
희한하네..
"고 민희씨"
"저 아세요"
"네.. 좀 알아요"
말투가 아주 건방지고 시비조다... 사람 기분나쁘게... 이젠 별 어린 여자까지 날 무시한다...
"전 처음보는데요."
"맞아요. 우린 오늘 처음보는 사이예요. 그런데 그쪽도 알고 나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죠"
"누구 말하는거죠"
"박 우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