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편
눈을 가늘게 뜨고 베이비의 눈을 유심히 바라봤다.
저 놈의 알쏭달쏭 시꺼먼 속이 어떤 속인지 파악하려고 말이다.
정말 내가 납치했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나를 놀리려고 하는건지 말이다.
빤히 바라보는데도 낯짝 두꺼운 베이비는 태연했다.
오히려 예쁜 눈동자를 껌뻑껌뻑거리며 나와 눈까지 맞춰주고 있었다.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뭐가.”
“너 이유가 뭐야?
도대체 나같이 착한 애를 납치범으로 두 번씩이나 몰아붙힌 이유나 한번 들어보자.”
“뚱땡이 니가 납치해서 데려온 거 맞잖아.”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니가 니 발로 온거잖아!”
“뚱땡이가 생사람 잡네..”
“뭐??”
“내가 뚱땡이 니 집을 어떻게 아냐? 술 취해서 쓰러진 날 니가 납치해서 데리고 온거잖아.”
베이비의 말에 나는 거품 물고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술 쳐먹고 자빠진 놈 보살펴준 게 누군데! 술 쳐먹고 우리 집 가겠다고 땡깡 부리던 놈이 누군데!
갑자기 베이비가 내 가슴 바로 위에 손바닥을 터억하니 올렸다.
그러니까 심장 언저리 위쪽 말이다.
순식간의 일이라 나는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베이비가 살짝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뚱땡이 너...혹시 이 안에 나 있냐?”
그제서야 정신이 돌아온 나.
이 새끼가! 지가 무슨 파리의 연인 수혁이냐!
이동건이라도 되냐고! 이 안에 너 있다도 아니고 뭐시 어째~! 이 안에 나 있냐~!!
드라마를 보려면 곱게 볼 것이지!
“에라이~! 이 안에 니가 있기는 개뿔이 니가 있다아~!!”
손을 뿌리치며 냉큼 베이비의 이마에 꼴밤을 시원하게 먹여줬다.
“아야! 뚱땡이 너 죽고 싶어! 감히 내 얼굴에 손을 대?”
“술 쳐먹고 민폐를 끼쳤으면 곱게 갈것이지..고맙다고는 못할망정 뭐가 어째?
납치범? 뭐가 어째? 이 안에 나 있냐?”
“그럼 왜 자꾸 납치하는데.”
“납치한 게 아니라니까! 니가 자꾸 우리 집 온다고 했잖아!
싫다는 데도 자꾸 온다고 그랬잖아!
그래, 처음은 니가 하도 정신 못차리고 길바닥에 쓰러져서 정신을 못 차리길래 하도 불쌍해서 데리고 왔다, 됐냐!
하지만 어젠 니가 우리 집까지 니 발로 걸어서 찾아온거잖아!”
“..진짜냐?”
미심쩍은 듯이 나를 바라보는 베이비.
“야, 너 혹시 왕자병 아니냐? 니 어디가 이쁘다고 이 안에 널 놔두냐고!”
라면서 좀전에 베이비가 손을 올렸던 자리를 파악파악 쳐댔다.
내 말에 갑자기 눈이 휘둥그래지는 베이비.
“뚱땡이 너 지금..나한테 왕자병이랬냐?”
“그래, 왕자병이랬다! 왕.자.병!”
“나한테 왕자병이라고 한 앤 너가 처음이야.”
정말 충격 먹은 듯한 베이비의 표정.
내가 무슨 엄청난 잘못이라도 한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베이비는 왕자병이 아니라 정말 왕자였다.
그러니 누가 왕자병이라고 하겠어..
“여하튼 착각은 그만하라 이말이야! 이 자리..니가 말한 이 자리!”
베이비의 손이 올려져 있던 내 심장의 위쪽 부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니가 아니라 너보다 더 멋지고 고독한 왕자님이 이미 있다구!
니 있을 자리 없다..이 말이야, 알았냐? 결론은 죽어도 널 납치 안한다구!”
착각도 유분수지, 베이비! 이 곳은 이미 가비한테 내준지 오래라구!
“뚱땡이 너..좋아하는 놈 있냐?”
“뭐? 좋아하는 애? 없는데..”
“금방 니 입으로 그랬잖아.”
“내..가?”
그제서야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생각났고, 누구를 떠올렸는지 기억했다.
고독하게 비를 맞고 가던 가비를 떠올렸다는 것.
나도 모르게..............설마...설마 나 진짜 가비 좋아하는 거야?
몇 번이나 봤다고. 안 지 얼마나 됐다고!
“뭐..여하튼 다행이다. 뚱땡이 넌 나 좋아하지 마라, 알았냐?”
베이비의 툭 내뱉는 말에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걱정 마셔~ 그럴 일 절대 없으니까.”
“밥 줘. 배고파.”
“니네 집 가서 먹어라! 왜 맨날 와서 나한테 밥 타령인데!
밥이라도 맡겨놨냐? 나도 먹고 살기 힘들다구!”
“밥 없어. 밥도 없고...아무것도 없어. 그러니까 뚱땡이 니가 줘.”
베이비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이는 듯 했고, 가비만큼은 아니지만 베이비 또한 마음 아픈 사정이 있을 것 같았다.
“분명히 말하지만 반찬은 김치 밖에 없다! 반찬 없다고 투덜대기만 해봐!”
내 말에 베이비가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미소짓는 것 같았다.
한창 부엌에서 콩나물국을 끓이고 있는데,
“뚱땡이! 야, 뚱땡이!”
부엌문이 벌컥 열리자마자,
“아야!"
국자를 들고 돌아서보니, 인상을 잔뜩 찌푸린채 머리통을 감싸안은 베이비가 보였다.
“너 뭐하냐?”
“야, 부엌문 좀 높여!”
키가 커다란 베이비, 고개를 내밀다가 문 위쪽에다 머리를 부딪힌 모양이었다.
뽀얗던 얼굴이 불그스름한 게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니가 조심했어야지.“
너무 귀여운 모습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온 몸이 바르르 떨렸다.
“왜?”
“과자. 내가 전에 사다줬던 과자 어딨어?”
“아아~ 그거? 내가 다 먹었는데 왜?”
“누가 내꺼 먹으래!”
“니가 먹으라고 줘놓고 왜 화는 내고 그러냐?”
“그게 먹으라고 준 거냐? 보관하라고 준 거지!”
염치도 없는 놈.
그러니까 결론은 나중에 우리 집 왔을 때 먹으려고 맡겨놓은 거라 이거지!
“언제는 몸값이라면서 쥐어준 게 누군데!”
“몸값이랬지 먹으라고는 안했어!”
“너 자꾸 그러면.........밥 안 준다!”
내 말에 갑자기 흠칫하는 베이비.
오호~! 딱 걸렸어!
“이 국자 콱 놔버릴까?”
더더욱 흠칫하는 베이비.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싶더니,
“다음..엔 다 먹지마.”
라고 조그맣게 말하더니 베이비는 사라지고 어느새 부엌문은 닫혀 있었다.
...바보..어차피 콩나물국 다 끓였는데....
이번에도 콩나물국에 고춧가루 팍팍 뿌려버리려다 참았다.
처음처럼 베이비는 후후 불어대며 맛있게 먹었다.
다 먹자마자 뻔뻔스럽게 베이비는,
“아~ 입 안 찝찝해. 혹시 칫솔 새거 없냐?”
“너 우리 집에다 살림 차려놨냐!”
“칫솔.”
예쁜 두 눈을 꼼빡이는 베이비이에게 나는 이번에도 넘어가버렸다.
여분으로 놔두었던 칫솔 하나를 홰액 던졌다.
“이거 갖고 떨어져.”
칫솔 하나 던져주자, 한 손에 거머쥐고 아이마냥 좋아하며 부엌으로 뛰쳐 나가는 베이비.
어지간히도 찝찝했었나 보다.
대충 방정리를 하고 있는데 베이비가 뛰쳐 들어왔다.
“왜?”
입가엔 하얀 거품이 묻어 있었다.
“치약 맵잖아!”
..참 내 별 걸 다 맵다고 하네..
“그럼 소금 줄테니까 소금이라도 닦을래?”
“됐어!”
괜시리 나한테 신경질 내는 베이비. ..웃겨~~
“나 집에 간다.”
“근데 니네 집은 어디야?”
“..나중에 알게 돼.”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나가버리는 베이비.
도대체 무슨 바람도 아니고 지 멋대로 쳐들어왔다가 지 멋대로 사라지고 무슨 뺌 믿고 저렇게 제멋대로냐고!
그것도 잠시였다.
“뚱땡아!뚱땡아!”
무시했다.
하지만 계속 불러대는 베이비.
목소리가 꽤나 다급해보였다.
..그래, 이번 한번만 나가주자..
대문을 열자 베이비가 서 있었다.
“집에 간다면서 왜. 뭐 놔두고 간 거라도 있어?”
“왜 이렇게 늦게 나와!”
“그럴 수도 있지! 왜 자꾸 신경질 내!!”
내가 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비 오잖아!”
“비 오면 비오는 거지 그게 뭐 어때서?”
베이비가 갑자기 나한테 분홍 우산을 내밀었다.
..이것은 또 누구의 우산일까?
색깔을 봐서는 이것 또한 원래 주인은 여자가 아니나 싶다.
“왜 나줘?”
“갖다 줘.”
“......?”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못알아듣겠다.
“저기 할머니!”
답답하다는 듯이 지 가슴팍을 쳐대며 손가락질하는 베이비.
베이비가 손가락질하는 곳을 바라보니 저 멀리 힘없이 걸어가시는 할머니 한분이 보였다.
“왜?”
“우산 갖다주라고.”
“우산 쓰고 계시잖아.”
“눈이 삐었냐? 저게 우산이냐? 찢어져서 쓰지도 못하는 고물이잖아.”
사실 거리가 꽤나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여하튼 베이비 말은 저 할머니가 쓰신 우산이 우산 구실을 못하니 우산을 주라는 것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할머니 우산 갖다줬다고 잡아먹을 듯이 난리치던 놈이 무슨 심보야..
양심 없는 줄 알았는데...의외네..
정말 의외의 행동에 베이비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얼른 안갖다주냐?”
베이비가 인상을 희미하게 찌푸렸다.
“그렇게 저 할머니 걱정되면 니가 우산 갖다주면 됐잖아. 왜 나까지 불러서 그래?”
정말 베이비는 요상했다.
지가 갖다주면 될 것을 날 끝까지 불러낸 이유는 뭐냐고오오오..
“난 그런 거 안좋아하잖아. 그런 거 좋아하는 니가 갖다 줘 알았냐, 나 간다.”
“야..!야! 내가 뭘 좋아한다고 그래!”
베이비가 갑자기 돌아섰다.
“그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감히 내 우산을 허락도 없이 줘버리냐?”
“그건..그건..”
“꼭 갖다줘라.”
“ 너 비 맞는 거 싫어한다면서.”
“어제는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일이었고, 오늘은 내가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게 비 맞고 가는 거야,
됐냐? 우산이나 잘 갖다 줘.”
내 이마를 가볍게 툭 치더니 빗 속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베이비.
웃음이 나왔다.
정말..정말 베이비의 겉모습을, 말과 행동을 그대로 믿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이비의 속은 너무 알콩달콩해서 알 수가 없다.
나 또한 빗속으로 뛰쳐 들어가 할머니에게 죽어라고 뛰어갔다.
정말 베이비가 다급하게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느린 할머니 걸음이었지만 꽤나 멀리 가셨기에 죽어라고 뛰어서 갖다드려야 했다.
괜찮다는 할머니의 차가운 손에 베이비가 건네준 분홍 우산을 꼬옥 쥐어드리고 왔다.
베이비 덕에 비를 맞기는 했지만 마음만은 가벼웠다.
집 정리도 다하고 남은 시간을 활용해서,
간단히 김밥과 주먹밥을 만들어 한쪽 손에 거머쥐고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집을 나서는 나.
편의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기 전에 나에게는 해야 할 일이 새롭게 하나 더 생겼다.
바로 가비를 만나러 놀이터를 가는 것.
물론 가비가 있을지 없을지는 모른다.
무턱대고 나 혼자 고집부리고 날마다 오겠노라고 선포했지만, 정말 가비가 날마다 나와 줄지는 몰랐다.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놀이터로 향했다.
놀이터가 가까워질수록 내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가비가 놀이터에 있을까.. 아니면....텅 빈 벤치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드디어 내 눈에 놀이터가 보였고, 벤치에 희미하게 앉아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가비! 가비가 분명할 것이다.
“야호오오~~!”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내리듯이 자전거에서 내려 가비에게로 뛰어갔다.
역시나 오늘도 가비는 내가 오든 말든 전혀 신경도 안쓰고 있지만 말이다.
뭐 사실 나 때문에 나오는 게 아니라 원래 이 시간에 가비가 나오는 건데 내가 끼어든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오늘은 음악을 듣고 있지 않았다.
가비의 어깨를 살며시 툭툭 쳤다.
가비가 돌아봤고, 나는 뚜껑을 연 도시락과 함께 수첩을 내밀었다.
-혹시라도 아침 안 먹었으면 먹어봐, 물론 맛은 없겠지만..^^-
수첩을 가만히 바라만 보던 가비, 도시락을 받아들었다.
먹지 않고 바라만 보는 가비가 답답해서 김밥을 하나 집어서 내 입 안으로 쏘옥 넣었다.
“으음..굿~!”
엄지 손가락을 가비 앞으로 쭈욱 내밀었다.
그런 나를 가비가 희한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잽싸게 김밥 하나를 집어서 가비의 입으로 가져갔다.
머뭇거리던 가비는 조심스레 김밥을 받아먹었다.
하나를 다 먹은 가비는 김밥을 또 하나 집어서 입 안에 넣더니 꼭꼭 씹어서 먹었고,
그 모습에 그제서야 나는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김밥을 열심히 먹는 가비를 턱을 괴고 물끄러미 바라봤다.
“가비, 내가 오늘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말야...
~~~너가 못 듣는 거 알면서도 왜 이렇게 쑥스럽나 모르겠다.
아직 잘은 모르겠는데 아마도 내가 널 좋아하는 것 같아. ..그래도 괜찮지?
정말 내가 널 좋아하게 되어도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