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자의 귀국
“어랏!”
깜빡 졸았던 모양이다. 턱을 괴고 있던 선우는 중심을 잃고 하마터면 선반에 부딪칠 뻔했다. 다행히 가까스로 균형을 잡아서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선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난기류를 만나 기체가 흔들렸던 모양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선반 위의 컵이 심하게 진동한다. 만일 비행기를 처음 타는 사람이라면 겁을 집어먹을 정도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비즈니스 클래스답게 스튜어디스가 부지런히 움직이며 사람들은 안정시키고 있었다.
항공사 멤버십카드의 마일리지만으로도 세계 일주를 할 수 있을 만큼 경험이 풍부한 선우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바닥에 떨어진 담요를 무릎까지 끌어올렸다.
“손님,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한국어다. 지난 몇 년 동안 뉴욕에서 살면서 의도적으로 한국인과의 접촉을 피해왔던 터라, 왠지 반가운 마음까지 들었다. 선우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스튜어디스를 보았다.
그녀는 대부분의 스튜어디스가 그렇듯 단정하면서도 세련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스물 네다섯 살쯤? 많아봐야 선우보다는 한, 두 살 아래로 보였다. 어딘가 낯이 익기도 하고, 싹싹하고 붙임성 있는 말투가 호감을 느끼게 한다. 한눈에 반할 정도는 아니지만 은근히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럼 가볍게 맥주라도 한 잔 할까. 뭐가 있죠? 혹시 버드와이저 있나요?”
“네, 있습니다.”
스튜어디스는 싹싹하게 대답하고는 카트에서 맥주를 꺼내 선우에게 건넸다. 선우는 익숙한 웃음을 지으며 맥주를 받아들다가 무슨 일인지 미묘하게 미간을 꿈틀거렸다. 그리고는 다시 표정을 바꾸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스튜어디스 역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는 다른 손님에게 이동했다.
“재미있는 아가씨인걸.”
선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살며시 오른손을 펼쳤다. 손바닥 위에는 작은 메모지가 반으로 접힌 상태로 놓여있었다. 선우는 승무원 대기실로 들어서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힐끔 보고는 메모지의 적힌 내용을 확인했다.
“한주희, 011-3192…… 후후, 귀국을 축하해주는 선물로는 나쁘지 않네.”
생각해보니 비행기에 탑승한 이후로 줄곧 자신의 주변을 맴돌던 여자였다. 섣부른 판단인지는 모르지만 처음부터 작정하고 접근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저만한 미녀를 마다할 선우가 아니다.
고개를 돌리니 시선이 마주친 스튜어디스가 눈을 찡긋한다. 입가에 살며시 나타는 미소도 은근히 도발적이다. 꽤나 적극적인 여자인걸. 나쁘지 않아. 선우도 머쓱하게 웃으며 가볍게 손을 들었다
“후우, 시간도 아직 많이 남았고, 이제 뭘하면서 때우지.”
선우는 메모지를 지갑사이에 넣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5년 만에 귀국이다. 휴학을 하고 군대를 다녀오자마자 주변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도망치듯 무작정 도미(渡美)를 결행했던 그다. 덕분에 아버지의 회사는 계모가 실질적인 주인노릇을 하고 있고, 대부분의 친척들도 그쪽으로 돌아섰다. 창업멤버였던 아버지의 지기들도 지금은 한직으로 물러났다고 한다.
재산을 둘러싼 아귀다툼이 싫어 도망쳐왔었지만 이제 돌아가면 이전보다 더 치열한 밥그릇 싸움을 벌일지도 모른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아버지가 남긴 재산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지만 환경이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좋든 싫든 간에 어쩔 수 없이 더러운 흙탕물에 발을 담가야한다. 법적으로는 여전히 재산상속의 우선권자이기 때문이다.
돌아가면 선우를 괴롭힐 골치 아픈 일이 한 두 개가 아닐 것이다. 닥치기도 전에 심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사실 지금도 통보도 하지 않고 기습적으로 귀국을 하는 것이었다. 계모가 비밀리에 붙여둔 감시인의 눈까지 피해서.
아마 모르긴 몰라도 선우의 귀국 소식이 알려지면 여러 가지로 시끄러워질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고민하는 것을 은근히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선우는 자신 안에 그런 가학적인 성향이 숨어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 역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혈통이겠지만.
무심코 시계를 보았다.
새벽 1시에서 몇 분 정도가 모자라는 시각. 귀국에 앞서 시간 설정을 한국으로 미리 맞춰두었기 때문에 한국과 동일한 시간을 나타내고 있었다. 아직 비행기에서 적어도 반나절을 더 보내야 한국에 도착한다.
선우의 눈에 조금 전의 스튜어디스가 다시 카트를 밀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름이 한주희라고 했던가? 어차피 시간은 남아돌고,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저 여자나 공략해야겠군. 뉴욕에서 있는 동안, 계모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매우 사치스럽고 플레이보이로서의 악명을 떨치며 지냈었다. 동기가 어떻든 지금은 그때의 생활이 알게 모르게 습관처럼 몸에 배어버렸다. 어찌 보면 심한 부작용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고칠 생각은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권태로움에서 벗어날 방법은 딱히 없으니까. 연극이든 실제였든 잠시라도 ‘망각’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선우는 숱한 뉴요커들을 사로잡았던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스튜어디스를 불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왜 그 자식이 돌아오는 거야. 그것도 이제 와서…….”
자정이 넘긴 시각, 한밤중에 걸려온 전화는 비단 잠을 깼을 뿐만 아니라 단 몇 마디 되지 않는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화를 돋우는 것이었다.
“분명히 뭔가 있어. 그 자식이 까닭 없이 귀국할 리가 없잖아. 뭘까, 왜 갑자기 돌아오는 거지? 무엇 때문에!”
우진그룹의 실질적인 여주인 원희재 여사는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비추고 있는 화장대의 거울을 노려보며 성난 황소처럼 거칠게 숨을 내뿜었다.
선우가 사라졌다. 아마도 감시의 눈을 피해서 몰래 귀국을 감행한 것 같다. 이것이 그녀가 몰래 선우에게 붙여둔 감시인의 전언이었다. 눈엣가시 같은 선우가 고집을 부려가며 미국으로 건너간 지난 몇 년 동안은 정말이지 그녀에게 있어 매우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사실 선우가 그렇게 떠나지 않았더라면 어떤 구실을 만들어서라도 이 나라에서 쫓아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떠나줬으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녀는 그동안 착실히 남편이 남긴 회사를 하나하나 자신의 뱃속으로 집어삼켰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친아들인 근우가 회사의 주인이 되는 것이 최종목표였다.
하지만 아직 어린 근우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기에 자신이 도맡아서 관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아주 순조롭게 일이 착착 진행되어가고 있는 지금, 갑작스런 선우의 귀국은 찬물을 끼얹는 격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아직까지는 선우가 가장 첫 번째 상속인이었다.
빌어먹을 남편이 자신도 모르게 비밀리에 유언장을 작성하는 바람에 자신의 오랜 소망이 물거품이 될 뻔했던 기억을 상기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다행히 선우를 지켜본 결과 재산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고 뉴욕 생활에서 보여준 방탕한 모습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선우의 행동을 내심 의심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아이답지 않게 영악하고, 수재라는 소리를 들었던 선우였기에 어쩌면 모든 것이 계산된 행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뜻 마음을 놓지 못하고 아무도 모르게 선우에게 감시인까지 붙였던 그녀였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그것도 한밤중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사라진 선우. 더구나 귀국을 할지도 모른다는 정보는 그녀를 다시 불안하게 만들었다.
“뭔가 준비를 해야 돼. 그리고 왜 갑자기 심경이 바뀌었는지도 알아야겠어.”
원 여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황급히 휴대폰을 찾아 어딘가로 연락을 취했다. 그녀가 뭔가 구린 일을 꾸밀 때면 어김없이 연락을 하는 곳이었다. 말하자면 궂은일을 대신 처리해주는 해결사라고나 할까. 지난 몇 년 동안 원 여사는 이 라인을 통해서 골치 아픈 문제들을 원만히 처리해왔었다.
“여보세요? 조 사장? 나예요, 원희재. 늦은 시간에 전화를 해서 죄송하군요. 아주 급하게 조 사장의 도움을 받을 일이 있어서요. 네, 물론 조 사장의 능력을 믿으니까 이렇게 연락을 했죠. 안 그래요?”
거울에 비친 원 여사의 표정이 어느새 환하게 바뀌었다. 조 사장이라는 남자에게서 원하는 대답을 얻은 모양이었다. 원 여사는 언뜻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더니 아직 루즈가 지워지지 않은 빨간 입술을 히죽 벌리며 싸늘하게 웃었다.
“네, 바로 그거죠. 역시 조 사장은 믿을 만하군요. 그럼 부탁할게요. 후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