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겁쟁이-
-또 다른 겁쟁이-
죽은 시체처럼 계속 누워만 있었다.
귀에 들려오는 건 째깍 째깍 거리는 벽시계 소리 뿐.
그렇게 반복되는 시간속에 재떨이 위엔 담배꽁초들만 점점 쌓여가고..
"저는 진짜 행님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예..아무리 행님이라 해도 혜성이한텐 안됩니더."
"제발 평범하게 사세요. 개성도 좋고,예쁜 여자 밝히는 것도 좋고,튀는 것도 좋지만..
시간은 많은 것을 변하게 한답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죠?
그리고 이건 마지막으로 드리는 얘긴데..
아저씨는 지금 혼자라는 사실...잊지 마세요."
피식 ..이유모를 웃음이 입가에 지어졌고, 좀 전의 그 생각들을 떨쳐버리려는 듯
몇 시간째 등을 붙이고 있던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서는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긴 손톱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는다.
잊고 있었던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끼는 거지만 내 옆엔 항상 두려움이 따라다녔던 것 같다.
나보다 체격이 훨씬 좋은 상대와 맞서게 될 때의 두려움.
시퍼런 칼날을 나에게 들이내밀고 있는 상대에게서 느끼는 두려움.
수 많은 늑대에게 둘러쌓인 한 마리의 양이 됐을시의 두려움.
아무리 주먹을 날려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씨익 웃어보이는 상대의 미소를 보며 느끼는 두려움.
하지만 내가 가장 두려웠던건..
내가 처한 이 상황들이 두렵다고 ..점점 뒷걸음질 치면 다시 예전 겁쟁이의 모습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두
려움.
주먹을 쓰는 명분 따윈 없었다.
때론 정의를 위한 답시고 주먹을 쓰곤 했지만 결국 나 역시 여느 문제아 학생들과 다를게 없었다.
단지 멋있게 보이고 싶어서,강한척 보이고 싶어서 ..그렇게 있으면 아무도 날 건들지 못할거라는 생각에.
나의 과거만큼은 아무도 몰라줬으면 하는 바람이 나 답지 않은 모습을 더욱 더 강조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땐 항상 함께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마음이 약해지거나 두렵다고 뒷걸음질 치고 싶을때마다 함께 하는 녀석들이 있었기에
항상 본드걸이라는 가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 예전의 겁쟁이랑 다를게 없잖은가?
어머니와의 약속? 꼭 지켜야 하는 약속이긴 하지만 ...
난 지금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보단 이용하겠다는 생각이 앞서고 있진 않은가?
"본드걸."
형식이였다. 교복을 입고 있는 장형식이 날 부르고 있었다.
"날렵하고 쎄고 빠르고..정말 타고난 싸움꾼.
하지만 아무리 감춰도 틈은 있기 마련이지.
본드걸이라는 모습 속에 여리고 겁이 많은 또 다른 녀석이 숨어있지.
같이 다니는 친구들 마저 겁내고 있는 최준이라는 녀석 말이야."
삐리리리..
책상위에 올려놓은 진미의 핸드폰 벨소리에 깜짝 놀라며 눈을 뜬다.
꿈이였던가....?
꿈에서 달아나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책상 전체를 흔들고 있는 핸드폰을 손에 쥔다.
순간 전화를 건 상대방이 이혜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긴장을 했다가
핸드폰 액정에 떠 있는 미선이 라는 이름을 확인하고 나서야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있었다.
사자머리 미선..?
"여보세요?"
"어라?진미 핸드폰 아닌가?"
"아 그,그게.."
"야!!너 누구야?왜 내 친구 핸드폰을 니가 들고 있어?!"
이 빌어먹을 기집애가..상대방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대뜸 너라니..
"그러니까 네 이름이 미선이 맞지?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 침착하고 잘 들어봐.."
"침착 못해 새끼야."
-_-
"나 예전에 xx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 하던 .."
"아르바이트 누구?!!아르바이트 하는 새끼가 한 두놈이야?"
"그러니까 있잖아. 기철이 사촌 형이라고."
"아아 혹시 그 어리버리하고 기집애 같이 생긴 아저씨?"
"응!!맞아!어리버리하고 기집애 같이 생겼어!!"
답답함이 풀리긴 했는데 ..기분 상당히 별로다??
"근데 아저씨가 왜 진미 폰을 들고 있어?어떻게 된거야?진미는??"
"그게 얘기를 하자면 지금 문제가 좀 심각한데"
"아씨.답답하니까 만나서 얘기해. 아저씨. 그때 우리 다 같이 만나서 술 마셨던 공원 알지?
지금 당장 그쪽으로 나와. 늦게 나오면 가만 안둬?"
혼자 고민해봤자 아무것도 안되겠다는 생각에 옷을 챙겨 입고는 집을 나섰다.
공원에 도착하니 미선만이 있을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반갑지 않은 손님들도 날 기다리고 있었으니..
"아저씨 반갑수?"
박홍철.그리고 그 패거리들..
그들은 담배를 땅바닥에 던져버리더니 날 향해 가소롭다는 미소만을 짓고 있었다.
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애써 웃는척 하며 박홍철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 쳐주며 반갑다는 인사를 했고.
"어 그래 반갑다."
"허..지금 어딜치는기요?"
박홍철은 나의 손목을 붙잡더니 날 향해 눈을 부라린다.
그러자 미선이 박홍철의 그런 행동을 제지하더니 화제를 돌리려 노력한다.
"박홍철.개인 감정은 나중에 얘기하고 중요한 건 이게 아니잖아."
"하긴.."
박홍철은 그때서야 나의 손목을 놓으며 피식 웃는다.
"아저씨 나중에 봅시다?"
"그러던지."
"이 아저씨 여전하네.뭘 믿고 이렇게 자신만만 한거야?
아아.박기철이 사촌 형이라고 그랬지?"
홍철의 그 말 한마디에 그의 패거리들이 웃음을 터트린다.
예전 같았으면 지금 그들의 모습을 보며 이성을 잃지 않도록 무던히 노력을 했을터인데,
전에 이런 비슷한 상황이 몇 차례 있어서 그런지 아무렇지도 않게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내 모습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난 미선과 박홍철,그리고 그 패거리들에게 진미가 이혜성에게 납치당해버렸다는 사실을 아주 심각하게 얘기
하는데..
난데없이 미선이 "풉.." 하는 소리와 함께 크게 웃기 시작한다.
그건 미선 뿐만 아니라 다들 마찬가지였다.
"에이 시발 뭐야. 쫄았잖아?난 또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야야 진미가 납치를 당했다니까.."
"납치는 무슨..걔네 둘 사귀는 사인데,아저씨 바보?"
"......................"
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엔 박홍철이 나의 어깨를 툭툭 치며 씨익 웃는다.
"댁은 개그맨 해도 되겠수다?크큭.."
미선도 홍철의 말을 거들며 한마디를 던진다.
"아 진짜 이 아저씨 때문에 심장이 가라앉는지 알았네!!!
난 또 큰일이라도 당한 줄 알았다니까.."
"나도 졸라 놀랬잖아.진미가 사라지면 우리의 돈 줄도 끊기는 거잖아???"
난 지금 그들의 반응이 어이가 없을 뿐이다.
이것들이 정말 진미의 친구들이 맞긴 한 걸까?아니면 내가 진미를 잘 모르고 있는 것일까?
하긴..난 그저 데이트 한 번, 그리고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모를 꿈 얘기를 잠시 나눈 것 뿐. 그게 전부이다.
"돈 줄?그건 무슨 말이냐?"
"이 아저씨 별게 다 궁금하신가 보네??"
"어 궁금하다.말해봐라."
무엇인가 내가 모르는 진실들이 있는 것 같다.
들어야 하는 걸까?들어도 되는 걸까?내 자신을 감당할 수 있을까?
"우리가 왜 그년한테 굽신거리고 기어다니는 줄 알어?다 혜성이 그 새끼 때문이잖어?"
"혜성이랑 진미는 헤어졌다고 들었는데?"
그러자 콧방귀를 끼는 박홍철이였다.
"야이 미친 아저씨야. 진미가 뭣 때문에 걔랑 헤어져??
돈 많겠다,힘 있겠다,게다가 혜성이 새끼가 진미한텐 지극정성이지.
생각을 해보라구. 단지 그 자식의 여자친구라는 이유로 모두 굽신거리고 기는데..니 같으면 헤어지겠냐?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 기집애가 그런 기회를 찰리가 없지."
"......................"
"뭐 우리는 걔랑 붙어다니면 물질적인 것들을 비롯해서 이래저래 얻는게 많았단 말이지."
아니다.이건 내가 알고 있는 얘기들과 틀리다.
진미가 혜성과 연인 사이였다면 물질적인 것들은 아쉬울게 없었을텐데..
그녀는 왜 굳이 마음에도 없는 원조교제를 하며 용돈을 벌었던 것일까?그럴 이유가 없었을텐데...
그렇게 혼자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데 박홍철의 중얼거림이 나의 귀에 들려오고.
"진미 그 기집애..이혜성만 아니면 진짜 내가 따먹어버리는 건데."
"킥킥..너 다음에 나다?"
"나도 나도!!"
"야 박홍철. 너 다른 여자랑 자면 뒤진다?!!"
"아 미선이 있다는 거 깜빡했네..미안."
"시발 새끼 .."
"홍철이 오늘 좆됐다..미선이 삐지면 기본 한달인데..킥킥."
................................
착각도 엄청난 착각이였다.
적어도 지금 나의 생각이 맞다면, 이들은 그녀의 친구들이 아니다.
단지 그녀라는 사람을 이용하는 쓰레기들 일 뿐이다.
그럼 이들은 진미가 원조교제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 것일까?
너희들 그거 아냐?
진미 ...그 바보같은 기집애는....그 돈으로 너희들에게.......
적어도 너희들이 친구인 줄 알고......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박진미. 어쩌면 너 역시 나처럼 강한척 하지만 외롭고 여린.. 또 다른 겁쟁이가 아닐까?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주먹으로 집중되기 시작하자 난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얼굴이 점점 빨개지기 시작했다.
"이 아저씨 왜 이러고 있대?"
"화났나봐?우리 어째??크큭.."
"아저씨도 진미한테 용돈 타고 싶은 거였어?에이 진작 말하지."
더이상 쓰레기들과 상대할 필요가 없었다.
세상을 살면서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싶었지만 나의 주먹을 더럽히고 싶진 않았다.
더군다나 맞는다고 정신을 차릴 그들이 아님은 분명했다.
난 그들의 비아냥 거림을 애써 무시한 채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런 날 가만히 놔둘 박홍철이 아니였다.
"지금 뭐하는 시츄네이션?"
난 그의 말을 못 들은척 계속 앞을 향해 걸어갈 뿐이다.
"저 아저씨 봐라?은근슬쩍 그냥 도망칠려고 그러네?"
발걸음을 멈추고는 몸을 돌려 박홍철의 두 눈을 노려보았다.
박홍철은 나의 그 강렬한 눈빛에 상당히 놀란 듯 싶었고, 이내 침착을 되 찾으며 부자연스런 웃음을 짓기 시작
했다.
"하하. 그,그렇게 노려보면 우짤낀데?눈에서 레이저 광선이라도 나오길 바라냐?"
모두들 느꼈을 것이다. 날 대하는 박홍철의 행동이 평소와는 달라보였음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른척 할 수 밖에 없음을. 그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테니까.
난 두 주먹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으면서 박홍철,그리고 그 패거리들을 쭈욱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이 아저씨가 지금 안그래도 화가 많이 났거든?
만화책에서나 보던 어줍잖은 대사 던지다가 혼나지 말고 조용히들 놀다 가라."
박홍철과 그 패거리들은 고개를 뒤로 젖히는 등 비웃기에 바빴고.
미선은 박홍철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 망볼까?"
"어.그래라."
미선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땅바닥에 비벼 끄며, 자리를 피하자
홍철과 패거리들이 날 향해 다가온다.
"동생같은 애들 때리면 나도 마음이 아프고 안 좋으니까..오늘은 이만 하자.
그래 오늘은 정말 그만하는게 좋겠다. 정 내가 못마땅 하면 다음에 정식으로 덤비던지..상대해줄테니까."
난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한번 그들을 돌아섰다.
물론 그들이 쉽게 보내주지 않을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그게 최선이였다.
참고 참다가 여기서 터지게 된다면 ..이 녀석들을 패는 개념이 아니라 거의 반 불구로 만들지도 모를 일이였
다.
난 그리 성격 좋은 놈도 아닐뿐더러 착한 녀석도 아니기 때문이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예상했던데로 뒤에 서 있던 박홍철이 날 향해 달려 들었고..
난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몸을 돌려 박홍철의 팔을 잡고는 최대한 꺽어버렸다.
"아아악..."
공원 곳곳에 박홍철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졌고.
인상을 마구 찌푸리고 있는 박홍철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아니라고 했잖냐."
팔을 계속 잡고 있다간 녀석이 눈물이라도 터트리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팔을 천천히 풀어주자
박홍철은 그때서야 자신의 팔을 붙잡고는 나에게서 뒷걸음질 친다.
그런 녀석의 눈을 무섭게 노려보다가 흥분된 나의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다시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며 몸을 돌려버렸다.
하지만 이정도론 부족했던 것일까?
패거리들중 한 명이 날 향해 다시 달려들었고, 나에게 발길질을 해대는 녀석의 발을 두 손으로 붙잡고는 ..
녀석의 남은 한 쪽 다리를 있는 힘껏 걷어 차버리자 녀석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땅바닥에 쓰러져버렸고
그리곤 연속 동작으로 땅바닥에 쓰러진 녀석의 얼굴을 향해 발길질을 해댈려다가 ...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참자는 생각에 끝내 녀석을 놓아주고 말았다.
"......................"
그리곤 격해진 감정을 감당하지 못해 옆에 있는 쓰레기통을 아주 세게 걷어차 버렸다.
뻥 하는 소리와 함께 쓰레기통은 저 멀리 날라가버리고.
"날 건들지 말라고. 더이상. "
박홍철은 더이상 그 어떤 행동도,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패거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냥 뒤돌아서는 날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였다.
공원을 빠져나오면서 공원 입구에서 망을 보고 있는 미선과 마주쳤고,
날 당황스럽다는 듯 쳐다보는 미선에게 처음부터 해주고 싶었던 한마디를 던져버렸다.
"그 사자머리..진짜 밥맛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기철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언제부턴가 기철에게서 걸려오는 전화가 그다지 반갑지가 않다.
마치 이혜성의 수하들을 상대하는 기분과도 비슷한게 ...
핸드폰을 열고는 귀에 갖다대었다.
"행님예.궁금한게 있는데 혹시.."
"어이 박기철이."
"예?행님?"
"너 언제부터 인사도 없이 할말 부터 지껄여댔냐?"
"아......"
실망스러웠다. 녀석이 처음 날 대하던 행동과 지금의 행동을 보면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건 보이는 게 아니라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이였다.
"잘 나가니까 눈에 뵈이는게 없냐?"
"죄,죄송합니더.행님."
"치워 새꺄."
"아..기분 많이 상하셨지예? 지금 제가 많이 급해가꼬.. 행님 기철이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더."
"그건 됐고. 뭔 일인데 그래?"
"행님."
"어."
"저는예.행님이랑 저 사이에는 숨기는 게 없는 사이라고 생각하는데..맞습니꺼?"
"본론만 말해."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혹시 진미가 행님을 찾아갔습니꺼?"
진미....??
"뭔 소리야?"
"아,아니 그냥...궁금해가꼬.혹시나 해서 물어본기라예."
"야."
"예 행님."
"뭔 소리냐고. 똑바로 말 안해?"
".................."
"너 진짜 이혜성이 시다바리 짓 하는 거냐??그래서 지금 그런 걸 나한테 묻는 거냐?"
"아,아니 저는 그냥 행님을 위해서 ..."
"나를 위해? 지금 내 앞에서 아가리 놀리냐?"
".................."
"너 당분간 내 눈에 띄지마라. 꼴보기 싫으니까."
"해,행님.."
뚝..
핸드폰을 신경질적으로 닫아버리곤 터질것 같은 답답함에 담배만을 입에 문다.
그렇게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데 나의 신발 위로 왠 사람의 그림자가...?
난 조심스레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아저씨 누구 전화길래 그렇게 받아? 혹시 나 찾는 전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