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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23화> 마음약한 사채업자

바다의기억 |2005.09.04 18:48
조회 10,091 |추천 0

근 1년 만에 도서대여점에 들렀더니

 

보고 싶은 책들이 너무 많더군요.

 

오늘 하루 내내 만화책만 봤습니다.

 

가끔은 이렇게

 

잊고 있던 일을 다시 해보는 것도

 

나름대로 좋은 여가생활인 것 같습니다.

 

========================== 글은 안 쓰냐? ===========================

 

연출 

- 음... 내가 볼 때


너에겐 시니컬한 카리스마가 있는 것 같다.


이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긴장시킨다고나 할까


아무튼 이 역할이 너한테 잘 맞을 것 같아.



...왜 아까랑 말이 다른 건데?



내가 귀가 좋은 편인지는 몰라도


이전 대화를 다 듣고 난 상황에서


배역에 어울린다는 말을 듣는 건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 잘 하면


그녀와 함께 무대에 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스멀스멀 끓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하늘은 기다리는 자에게 복을 주는 법.


언젠가 기회는 올 거라 믿고 있었다.

(무대장치의 구성과 활용은 어디가고?)



연출 - 대본은 있나? 없으면 내 걸 보고.


기억 - .......아, 예. 있습니다.


연출 

- 대충... 여기 6페이지에 이쯤부터


다섯 마디 정도만 해 보자.


앉아서 대사 좀 외우고, 이미지도 생각해보고.


김군! 여기 와서 상대역 좀 해줘라!



내가 이미 대본을 가지고 있다는 말에


옆에 있던 민아가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순간 아차 싶긴 했지만


준비된 사채업자의 위용을 보여주는 데는


오히려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사, 이미지, 모션


모든 것은 머릿속에 들어있었다.


단지 그것들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드러내는가가 문제였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배역은 나쁘지 않다.


한없이 차갑고, 싸가지는 아밀라제로 소화시켜버린 냉혈한.


지금의 나에겐 안성맞춤인 역할이 아닐 수...



...... 하지 말까?



기억 - ..... 준비 됐습니다.


회계 

- 자, 어차피 이놈은 선배 같지도 않으니까


그런 사실은 말끔히 잊고


부담 없이 연기에 임하면 돼.


최대한 싸가.... 아니, 냉혹한 카리스마를 뽐내면서. 응?



김군 - 아니 제가 뭘 어쨌다고요!


회계 - 김군아.... 네가 지금까지 밀린 회비가 말이다...


김군 - 기억아, 잘 들었지? 난 신경 쓰지 말고!



비굴한 인간이 되려면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


손수 모범을 보이는 그.


김군이야 처음부터 내 관심사 밖에 있던 사람이므로


그녀와 함께 무대에 서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불사시킬(?) 용의가 있었다.



연출 - 자, 신 레디! 아그륵~쑌!


김군 - 일주일만, 일주일만 더 기다려주세요!



연출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비굴모드로 들어간 김군은


근처에 있던 의자에 반쯤 쓰러진 듯한 자세로 몸을 기대며


절박함의 극치를 달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과연.... 나의 심층에 잠들어있던


학대의 본능을 이끌어내는 듯한 모습이다.



기억

- 그러니까... 일주일, 일주일 그렇게 미루는 사이에


이미 단풍도 지고 눈이 내리잖아.


이야..... 그러고 보니 오늘 눈 참 많이 내리네.


이정도면 사람 하나쯤 묻어봐야 티도 안 나겠어.


어떻게 할까. 조금만 더 기다려 줄까?



김군 - 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기억

- 아니지~ 아니지.... 지금정도면 어떻게


눈 뽑고 신장 팔아서 메워볼만 하지만


그때가 되면 뼈까지 다 발라도 적자야.


안 되겠네, 그냥 지금 적당히 정산해보자.



김군 - 제발!! 제발 한 번만!!



상황이 절박해지자 내 바짓단을 잡고 애걸하는 김군.


그의 비참, 비굴, 처참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안군이 이 역할을 꺼렸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기억 - 놔, 밟아버리기 전에.



큰 소리로 화를 내는 사람은 그리 무섭지 않다.


정말 무서운 사람은


지극히 현실적인 말을 하면서


정말로 그 행동을 취할 것 같은 위기감이 느껴지는 사람이다.


나의 아버지가 그런 분이셨고,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김군 - .........



완전히 기세가 눌린 김군은


바싹 얼어붙은 듯한 표정으로


주춤주춤 내 옷깃을 놓았다.


하지만 이후 이어진 지나치게 긴 정적.



기억 - ..... 대사를 해야죠.


연출

- 아니야, 아니야. 그만 됐다.


정말 정나미가... 아니지, 카리스마가 느껴져.


김군도 아주 짜증날 만큼 비굴한 게 완벽해!


역시 상대역이 있으니까 제 기량이 나오는구만!


이로써 두 명 다 역할 확정!



연출은 우리의 연기에 매우 만족한 듯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박수를 쳐댔다.



...... 그런데 정말 이런 역할 해도 괜찮은 걸까?


그녀에게 괜히 안 좋은 인상만 주는 건 아닐까?



민아 - .......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살짝 그녀를 돌아봤을 때


나를 향해 들려있는 그녀의 엄지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원츄!’



나는 덩달아 소심한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곤


머쓱함에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혹시 나... 이쪽으로 재능 있는 게 아닐까?



그날 이후


난 연극부에서 ‘사채왕’ 혹은 ‘업자님’ 등으로 불리며


그 자리를 확고히 만들어 나갔다.


돌고 돌아 귀에 들어온 소식통에 따르면


연출이 말하기를



=녀석의 딱딱하면서 살벌하고 정나미 떨어지는 말투와

차갑도록 날카로운 외모,

진지하게 건들거리는 태도엔

일주일 안에 돈을 갚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드는

강렬한 포스가 있다.



라고....



이 한마디에 뼈 속 깊이 상처 받은 난


내친 김에 연극에서 파이낸스의 길로 전향....


사채 시장의 검은 손으로 그 악명을 떨칠까 생각했지만


연습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생각지 못한 약점이 노출....그 꿈을 접고 말았다.


그 사연인 즉슨....



김군 

- 아, 아직.... 준비를 못했습니다.


정말로.... 정말 마지막으로.... 일주일만...



기억

- 그래, 일주일.... 그럼 일주일 값은 해야지.


얘들아, 다 뒤져! 멀쩡하다 싶은 건 싹 털어가라!



김군 - 안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면!! 크억!



곧장 달려든 박군 일당의 공격에


바닥을 구르는 김군.


난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조소하듯 소리쳤다.



기억 

- 우리가 지금 자선사업 하러 온 줄 아나?


아직도 두 눈깔 성하게 박혀있는 걸 감사하라고...!!



이런 대사를 실감나게 커버할 때마다


나의 무서운 재능을 신이 시기하진 않을까 염려될 정도였다.



김군 - 크흐윽.....



순간순간 번뜩이는 나의 재능과


그간 쌓인 게 많은 박군 일당의 횡포에


지속적으로 시달려온 김군은


최근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지고 핼쑥해진 게


빚지고는 못산다는 말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아마 요즘 꿈자리도 그리 편하진 않을 거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도


결코 넘지 못할 벽이 있었으니....



민아 - 제발... 제발 그만하세요.



연습임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김군을 감싸는 민아.


그 우수어린 눈빛은 인간 본연의 동정과 양심에


한 조각 비수가 되어 내리 꽂혔다.



가슴에서부터 흘러넘치는 죄책감과 가책.....



기억 - ...... 예. 마님.


연출 - 스타아아압!!!! 너 인마!! 오 쒯, 혈압, 아 뒷목....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뒷목을 잡고 인상을 쓰는 연출.


그도 그럴 것이...


요 며칠 이 장면에서 막힌 게


근 수십 번도 더 되는 것이다.


그럭저럭 대사는 하고 넘어가더라도


급감하기 시작하는 리얼리티에


연출은 여지없이 ‘NG!'를 날려댔다.



기억 - 하아... 죄송합니다. 도저히 마음이 아파서....


연출 - 너 썅!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해?!


김군 - 그럼 난 뭐야 인마!


민아 - 아.... 눈 아파.


기억 - 미안해요,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민아 - 아, 아니에요. 아직 처음이니까 그럴 수도 있죠....



길길이 날뛰는 김군과 김새버렸다는 듯한 민아의 표정.


이렇게 연습의 맥이 끊겨버리면


그 분위기가 회복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각자 더 연습한다고 뿔뿔이 흩어지기도 하고


다시 해봐야 분위기가 안 살기도 하고...



이번에도 연습을 망쳤다는 죄책감에


보조 연습실 한 쪽에 조용히 찌그러져 있는 나에게


그녀가 다가왔다.



민아 - .... 괜찮아?


기억 - 미안. 이번엔 정말 잘 하려고 했는데....


민아 

- 힘내. 기억이는 이 역할에 100% 적합한 인상이니까....


조금만 더 하면 잘 할 수 있을 거야.



결코 칭찬이 아닌 것 같은 그녀의 격려.


‘100% 적합한 인상’ 이라는 그 한마디는


연출의 뒷담보다 더 신랄하게 내 여린 가슴에 상처를 주었다.



기억 - ........ 그게 더 마음에 걸린 달까.



중얼거리듯 내뱉은 한 마디에


그녀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게 변했다.



민아

- 자신에게 꼭 맞는 배역이 있다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어.


그건 자신만의 색깔, 열정 모든 걸 나타낼 수 있다는 말이니까....


그런데도 그 역할에 충실하지 못한 건


자신에게 소홀히 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너무나 단호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난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아니야.


난 그녀의 꿈을 꾸면서도 화낼까봐 손조차 못 잡아봤는데


연극 연습이라고 해서 그런 모진 말과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이런 역할.... 나한테 어울리지 않아.



문득 그녀가 너무나 매정하게 느껴졌다.


내 맘을 알아주지 않는 그녀가 야속하기만 했다.



그렇게 3일이 지났다.


하지만 난 여전히 그녀의 눈물에 약했고


NG만 하염없이 늘어갔다.



계속되는 독촉과 폭행에 김군은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고


나 또한 그녀를 향한 죄책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민아도 하루 대여섯 번씩 눈물을 쏟다 보니 붕어눈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아이셰도우 3인방이 결성된 상황에서


연습은 침체기를 맞이했고


연출은 끝내 풍을 맞아 자리에 눕고 말았다.



오히려 활기를 띄고 있는 건


김양의 바텐더 연습이나


회계가 두목으로 있는 조직의 단결된 모습 연습.



모든 게 내 잘못이었다.


주객전도가 되어버린 연습실을 보며


이제라도 배역을 포기하고


‘무대장치의 구성과 활용’이나 열심히 공부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까진 아직 시간이 있었다.


지금이라면 모든 걸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 더 이상 그녀를 볼 면목이 없었다.



나.... 이제 어떡해야 해?



숨통을 꽈악 죄어오는 듯한 압박감에 현기증을 느낀 난


잠시 바람을 쐬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비상계단으로 나가 멍하니 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


뒤에서 그녀가 다가왔다.



민아 - 내일... 연습 없는 거 알죠?


기억 - 아, 예.


민아 - ..... 내일 연습실에서 봐요.


기억 - ....예?



난 어안이 벙벙해서 되물었지만


그녀는 내 대답도 듣지 않은 채


휙 돌아서 연습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연습실에 들렀을 때


난 비장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민아 -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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