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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미국에 항복하면서 세계 2차대전이 끝난 지 다음달이면 꼭 60년. 우리에겐 광복 60주년, 미국은 승전 60년이 된다. 2차대전의 영웅이라면 우리는 영화에 나오는 독일의 롬멜, 미국의 맥아더 장군 등을 떠올리지만, 한국계 미국인인 김영옥 미 육군 예비역 대령(86)도 계급이 낮았을 뿐 그에 못지않은 전쟁영웅이다.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그가 워싱턴에서 최근 암으로 수술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그동안 e메일 교신 등을 통해 취재해온 그의 삶의 행적을 독자들에게 더 늦기 전에 소개해야겠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미국·프랑스·이탈리아 정부로부터 20여개의 무공훈장을 받았고, 한국전쟁에 참전해 미군 역사상 전장의 대대장을 지낸 최초의 유색인 장교라는 기록을 남긴 김영옥. 그의 드라마틱한 삶 속으로 들어가보자.
‘김영옥’이란 이름이 가장 최근 한국 신문에 나온 것은 지난 2월 프랑스 최고무공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을 때였다.
한국인으로는 이건희 삼성 회장, 조중훈·조양호 한진그룹 창업자 부자가 받은 이 훈장을 그가 받은 것은 2차대전 때 프랑스에서 세운 전쟁공적을 60년이 지나 다시 평가받은 때문이다. 1944년 그는 미 육군 442연대 100대대 작전참모로 전투에 참가해 프랑스 동북부 보주산맥 인근의 비브뤼에르 지역을 해방시켰고, 이때의 일로 현지 프랑스인들 사이에 ‘카피텐 김’(김대위)이라는 전설적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는 것을 프랑스 정부가 늦었지만 인정한 것이다.
-로마해방 앞당기는 수훈-
이 훈장을 받을 때 김영옥은 “이 나이에 훈장 하나 더 탔다고 해서 개인적으로 무슨 큰 일은 아니지만, 한국계 후배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다면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큰 상을 받는 소감치고는 꽤나 덤덤한 말이다. 이는 그가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도 개인적 욕심에 얽매이지 않아온 그의 삶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김영옥은 1919년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김순권의 아들로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순권은 경신학교(경신중고교의 전신) 출신으로 신문물에 눈을 떴으나 조선이 일본에 강점당하자 세번의 밀항 끝에 미국으로 건너갔고, 어머니는 이화여전(이화여대의 전신) 출신으로 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미국에 간 터였다.
전쟁터로 내몰린 것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 때문이었다. 미국은 일본인 이민자의 충성심을 의심해 일본계 2세들로만 군부대를 만들었는데 사병으로 징집돼 복무하다 장교가 된 김영옥을 일본계로 오해해 이 부대에 배치한 것이다.
“어머니가 미국에 온 1916년은 한·일합방 이후여서 조선이란 나라는 없었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설움이지요. 이 때문에 내 인사기록에 모국어가 일본어라고 씌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일본계 부대와 인연을 맺게 된 김영옥은 이탈리아 전선에 배치됐다. 그곳에서 대낮에 독일군 진영에 들어가 포로 2명을 잡아왔고, 이들로부터 얻은 정보로 연합군은 총공격을 감행, 로마해방을 앞당기게 됐다.
-예편 뒤 유색인 권익 앞장-
이 공로로 그는 미국에서 두 번째 높은 특별무공훈장을 받았다. 이탈리아 주둔 미군 최고사령관인 마크 클라크 중장은 훈장수여식에서 행정상의 문제로 최고무공훈장인 명예무공훈장을 주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하면서 자기 부관의 계급을 떼 꼽아주고 즉석에서 대위로 진급시켰다. 당시 미국이 철저한 인종차별사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훈장도, 진급도, 사과도 파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탈리아는 로마해방 직후 동성무공훈장을 수여했다가 전쟁이 끝난 뒤 공훈심사를 다시 해 최고무공훈장인 십자무공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2차대전 뒤 비즈니스맨으로 변신했던 김영옥은 한국전쟁이 터지자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싸우겠다며 입대를 자원했다. 51년 1·4후퇴 후 한국 전선에 배치된 그는 강원도 철의 삼각지대 등 최전선에 있으면서 숱한 전쟁 일화를 남긴다.
몇가지만 들여다보자. 그가 31연대 1대대장 지휘권을 넘겨받는 날인 51년 5월23일 작전 전황도에는 1대대가 강원 홍천에 다른 부대와 같은 선상에 있었다.
하지만 김영옥의 지휘가 개시된 지 1주일이 지난 5월31일 전황도에는 1대대가 전선에서 혼자 앞으로 삐죽이 나와 유엔군 9군단의 최선봉부대로 화천 이북에까지 진격해 있다. 다시 여드레가 지난 6월8일 전황도에도 31연대는 북으로 솟아오른 중부전선의 맨 앞에 그려져 있다. 이후 전쟁은 교착상태에 들어갔고, 결국 오늘날 휴전선의 모양이 됐다.
“당시 1대대는 문자 그대로 유엔군 대공세의 견인차가 됐습니다. 매일 전투가 벌어졌지만 1대대는 한번도 지지 않았습니다. 연전 연승, 혼자 너무 북으로 올라가 3면이 적으로 둘러싸이는 위험한 형국이 됐을 정도니까요.”
그의 직속상관이던 윌리엄 매캐프리 미 육군 예비역중장(당시 31연대장)의 증언이다.
김영옥이 전투에서 처음으로 패배 아닌 패배를 하게 된 것도 너무 진격속도가 빨라 유엔군이 적으로 오인해 쏜 포탄에 맞았기 때문이다. 목숨은 건졌으나 이때의 중상으로 후속수술을 40차례나 받았고, 지금도 한쪽 다리를 절며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쉬 믿어지지 않는 일화 하나만 더 들어보자. 대대장 지휘권을 받은 지 이틀 만인 5월25일 홍천 인근 금병산 전투에서였다. 중공군 진지를 향해 다가가던 미군 병사들은 중공군의 총격이 시작되자 능선을 버리고 산비탈로 뛰어내려 머리를 은폐물에 처박고 방아쇠를 당겼다. 겁 먹지 말라고 아무리 독전해도 소용없었다.
“생각끝에 나는 능선에 올라가 팔짱을 끼고 일부러 왔다갔다했습니다. 병사들 사이에서 ‘너무 위험합니다’라는 아우성이 터져나왔지만 나는 ‘나를 보라 괜찮지 않느냐’고 말했지요. 중공군은 100m쯤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빗발치는 총알은 모두 빗나갔습니다. 전쟁에서 총에 맞는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은 거지요.”
얼마 뒤 병사들은 머리를 내밀고 총을 쏘기 시작했고, 눈이 휘둥그레진 중공군은 사격을 멈추고 도망쳤다.
-암투병에 주위 눈시울-
72년 대령으로 예편한 그는 사회봉사, 특히 유색인의 권익확보에 일생을 바쳤다. 미국 최대의 한인봉사단체로 성장한 한인정신건강정보센터를 만들었고, 한인 2세들을 위한 한인청소년회관, 한미연합회도 그의 리더십 아래서 태동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재미 일본계로부터도 존경받는다는 점이다. 일본계 2세부대를 이끈 전쟁영웅이란 점 때문이다. 일본계 교육재단인 고 포 브로크(Go For Broke)는 그의 일대기를 담은 잊혀진 용맹(Forgotten Valor)이란 영화를 만들어 LA 등지에서 상영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일본의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는 단호하다. 99년 캘리포니아주 의회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규탄하는 결의안이 상정됐을 때 일본계에서 반대 로비를 벌이다 김영옥이 설득에 나서자 포기한 적도 있다.
김영옥은 지난해 미국 이민 100년을 맞아 선정한 7명의 ‘이민영웅’에 문대양 하와이대법원장, 야구선수 박찬호 등과 함께 뽑혔다. 전쟁영웅에서 이민영웅이 된 김영옥은 “나는 100% 한국인이며 100% 미국인”이라고 말한다. 국적이 어디든 그는 분명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다.
<경향신문 200-5-7-10일자 기사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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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한국인이 있다는 것을 여기저기에 알리고 싶네요.
미국이나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는 모두 훈장을 받았다는데, 정작 조국인 한국에서는 아직 그의 공적을 인정한 훈장이 수여되지 않은 것 같아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인터넷 기사를 보니 국회의원 100여명이 이 분에게 훈장을 주자는 서훈을 촉구하고 있답니다.
하루 빨리 김영옥 옹에게 훈장을 달아 드렸으면 좋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