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포르티보와 레알 마드리드가 만난 지난 1월 7일 리아소르 스타디움. 전광판 시계가 멎은 가운데 데포르티보 벤치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관중들은 술렁대기 시작했고, TV 중계 카메라는 하프라인에서 교체를 준비하는 등번호 21번의 한 선수를 비추었다. 3만명이 들어찬 리아소르의 관중들의 기립박수를 받고 피치 위에 발을 디딘 선수는 다름아닌, 후안 카를로스 발레론이었다.
1년 전 바로 이 곳 마요르카와의 경기에서 십자인대를 부상당한 이후, 6개월여만에 복귀한 뒤 보름여만에 재발한 부상. 그리고 그는 또 한번의 6개월 재활 끝에 다시금 피치를 밟을 수 있었다. 그의 복귀전은 아주 짧은 시간에 이루어졌지만, 9경기째 승리를 기록하지 못하던 데포르티보에게, 그리고 많은 팬들에게는 그 어느 것보다 값진 선물이었다.
■ 카나리아 제도에서, 라 코루냐까지
1975년 6월 17일, 스페인 본토에서 1,400km나 떨어진 카나리아 제도에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발레론은, 라스 팔마스 유스팀에서 뛰며 차근차근 프리메라리가로의 데뷔를 준비했다. 그리고 20세가 되던 1995년, 라스 팔마스 성인팀에서 36경기를 소화하며 팀의 승격에 일조한다. 라스 팔마스에서 두 시즌간 54경기 2골을 기록한 발레론은 이어 1997년에는 마요르카로 둥지를 옮겼고, 이적한 그 해 팀을 리그 5위 및 코파 델 레이 준우승으로 이끌며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스페인의 명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의 이적을 통해 그동안의 활약을 보상받을 수 있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 후 주닝요 파울리스타의 백업으로서 주로 활약하던 첫 시즌이었지만, 주닝요가 나간 이후에 발레론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주전으로 발돋움한다. 그러나 솔라리, 하셀바잉크, 바라하 등 많은 실력있는 선수들이 있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리그19위를 기록하면서 세군다 리가로 강등되고 말았다. 이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던 데포르티보는 카프데빌라, 몰리나 등과 함께 발레론을 새로이 영입한다. 이적료 1090만 유로, 2000년 7월 1일 발레론은 네 번째 둥지를 라 코루냐에 틀었다.
■ 데포르티보의 에이스 ①:신흥강호 데포르티보의 중심에 서다
1999/2000시즌 사상 첫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스페인의 신흥강호로 발돋움한 데포르티보에 발레론이 당장 설 자리는 없어보였다. 새로운 시즌을 맞아 트리스탄 등 스타급 선수들을 대거 영입한 데포르티보의 중심에는 자우밍야가 있었기 때문. 마카이를 향한 어시스트와 자신이 직접 골을 만들어내는 등 자우밍야는 이미 리아소르의 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 자우밍야의 팀내 입지가 너무나 컸던 탓에 갓 들어온 발레론이 쉽사리 기회를 얻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이루레타 감독은 자우밍야보다는 발레론을 택했다. 테크닉과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확실하게 자우밍야가 한수 위였지만, 경기를 조율하는 능력과 안정적이고 성실한 플레이를 선보였던 발레론이 점차 피치위에 서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발레론은 마카이 혹은 트리스탄을 앞세우고 데포르티보의 중원에서 새로이 자리를 잡아나가기 시작했고, 데포르티보의 리그 준우승에 기여한다.
이듬해인 2001/2002시즌은 발레론이 확실하게 데포르티보의 에이스로 자리잡은 해였다. 발레론은 리그 38경기 중 32경기를 선발 출장하고 6경기를 교체 출장하는 등 모든 경기에 모습을 드러냈고, 챔피언스리그(13경기 중 10경기 선발)와 코파 델 레이(4경기 중 3경기 선발)에도 전 경기 출장하며 리그 준우승ㆍ코파 델 레이 우승ㆍ챔피언스리그 8강을 이끌었다. 특히 아스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벤투스 등을 제압하며 2년 연속 챔피언스리그 8강에 진출하며 유럽 무대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는데, 팀의 중심에는 단연 발레론이 서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일 월드컵을 지나 시작된 2002/2003시즌, 그러나 발레론에게 첫 시련이 다가오니, 바로 첫 번째 부상을 당한 것이었다. 바야돌리드의 페냐에게 강한 태클을 당한 발레론은 그대로 실려 나가야 했고, 그 해 고작 14경기에만 선발 출장할 수 밖에 없었다. 팀은 리그3위로 한단계 내려가야 했고,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유벤투스에 득실차에 밀려 본선2라운드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발레론은 그러나 2003/2004시즌 다시금 데포르티보의 중원을 지휘하며 데포르티보의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갔다. 5년연속 리그 3위권 진입이라는 기록과 함께, 사상 첫 챔피언스리그 4강까지 팀을 이끌어 나간다. 특히 AC밀란과의 8강 2차전에서는 팀의 두번째 골까지 터뜨리며 '리아소르의 기적'을 일으키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특히 데포르티보로 이적 후 가장 많은 시간인 3,600여분을 뛰며 사실상 데포르티보의 언터쳐블 에이스로서 입지를 굳혀 갔다.

■ 데포르티보의 에이스 ②:발레론의 부진=데포르티보의 추락
하지만 발레론이 지휘하던 데포르티보는 2004/2005 시즌이 되어서 급격하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비단 발레론의 문제가 아닌 팀 전체적인 노쇄화는 팀 전력의 하락을 가져왔으며 특히 최전방 스트라이커들의 빈곤한 득점력에 리그 8위로 추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데포르티보는 득점10걸에 단 한명의 이름도 올리지 못했고, 챔피언스리그에서도 무득점 최하위라는 불명예를 안으며 조기 탈락하고 말았다. 더군다나 든든한 백업이 없었던 발레론은 시즌 내내 많은 경기에 출전하며 (리그 36경기 선발, 2경기 교체 투입) 체력적인 부분에 있어서 문제를 드러낼 수 밖에 없었고, 발레론의 이러한 어쩔 수 없는 부진은 자연스레 데포르티보의 추락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루레타 감독의 사임과 루케ㆍ판디아니의 이적, 프란과 마우로 실바의 은퇴 등 팀전력의 상당수를 차지하던 선수들이 대거 빠져 나가고 카파로스 감독이 새로 취임한 2005/2006 시즌, 발레론은 카파로스 감독의 새로운 포메이션 4-4-2의 희생양이 되며 프레-시즌동안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하기도 했다. 발레론 대신 루벤 카스트로를 투입시키며 전형적인 4-4-2 포메이션으로 데포르티보의 팀컬러를 바꾸려 했던 카파로스 감독은 그러나 결국 발레론을 선택하고 데포르티보는 다시금 4-2-3-1로 돌아섰다. 발레론은 역시나 3의 가운데에 서서 데포르티보를 지휘했지만, 루케와 판디아니, 그리고 마우로 실바 등 그의 주위에 있던 여러 동료들이 떠난 상황이라 예전같은 플레이를 선보이기 어려워 보였다. 결국 설상가상으로 2006년 1월, 마요르카 전에서 십자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하면서 데포르티보에게도, 그리고 발레론 본인에게도 절망같은 순간이 찾아오고 말았다.

발레론 없는 데포르티보는 4-4-2 포메이션과 세르히오나 이반 카릴이 발레론의 빈자리를 메우며 최대한의 피해를 막아보려 애썼고, 천만다행히도 페드로 무니티스가 최고의 활약을 선보임과 동시에 시즌 후반 파브릴의 이아고가 발레론의 빈자리를 그나마 채워주며 어렵사리 시즌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6개월 정도가 지난 7월 11일, 어느 정도 회복한 발레론은 이슬라 카넬라와의 친선경기를 통해 기나긴 부상의 터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7일이 지난 28일, 벤피카와의 친선 경기에서 또 한번 같은 부위를 부상 당하며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에 병상에 누워야 했다. 발레론의 복귀와, 새로운 어린 선수들의 조합을 통해 야심차게 2006/2007시즌을 준비하던 데포르티보는 4~5개월 정도 발레론을 또 한번 잃어야 했다. 데포르티보를 지지하는 모든 팬들은 부진에 빠져버린 데포르티보의 해결책은 단연코 발레론밖에 없다고 믿어왔고, 결국 지난 1월 7일, 1년 여만에 피치위에 모습을 드러낸 발레론에게 기립박수를 쳐주며 환호했다. 견디기 어렵도록 추락하던 데포르티보를 살려줄, 그리고 지난 시간동안 그토록 기다려온 발레론의 컴백이었다.
■ 무적함대의 선원으로서:안타까운 재능, 전술의 희생양이 되다
1998년 11월 18일, 이탈리아와의 평가전에 처음으로 국가대표로 출전한 발레론은 이후 유로 2000과 유로 2004, 그리고 2002 한-일월드컵에 무적함대의 일원으로서 스페인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었다. 물론, 많은 팬들이 알다시피 발레론은 대표팀과의 인연이 그리 깊지가 못한 편이다.
국가대표로서 첫 메이저 대회였던 유로2000. 발레론은 자신의 포지션인 공격형 미드필더가 아닌 중앙의 미드필더로서 피치위에 나섰다. 당연히 발레론의 플레이는 좀처럼 살아날 수 없었고, 토너먼트 도중 이반 엘게라에 밀려 버렸다. 스페인 대표팀은 8강에서 프랑스에 1:2로 패해 우승을 놓쳤고, 이후 카마초 감독은 발레론을 국가대표팀에서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002 한-일 월드컵에는 등번호 17번을 받고 한반도 땅을 밟았다. 그리고 첫 경기였던 슬로베니아전에서 데 페드로의 크로스를 받아 골을 터뜨리며 팀의 승리를 도왔다. 이어 아일랜드와의 16강 경기에서는 연장 전후반까지 모두 소화해냈고, 비록 승부차기에서는 4번째 키커로 나와 실축하긴 했지만 월드컵 8강 무대를 밟게 됐다. 우리나라와의 경기에서 발레론은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로 나와 후반 34분 교체 아웃될 때까지 좋은 활약을 펼쳤다. 스페인 대표팀은 월드컵에서도 8강에서 패배하며 고국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소속팀 데포르티보의 중심에서 좋은 활약을 펼친 발레론은 결국 세번째 메이저 대회인 유로2004에서도 대표팀의 부름을 받았다. 예선에서 6조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스페인은, 노르웨이와 플레이오프를 가졌다. 1차전에서 2:1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내에서는 홈 경기에서 아슬아슬한 승부가 연출된 것을 두고 소위 발레론 논쟁이 벌어졌다. 발레론처럼 공격진과 미드필더진 사이를 연결할 연결고리가 필요했다는 얘기. 실제로 스페인의 AS紙에서 실시했던 '발레론을 2차전 선발로 투입해야 하는가?'라는 설문조사에서는 약 80%가 찬성표를 던졌을 만큼 스페인 팬들은 발레론을 원했다. 결국 2차전에 선발 출장한 발레론은 라울의 선취골을 어시스트 하는 등 최고의 활약을 선보이며 팀의 3:0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사에스 감독은 발레론의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라울과 모리엔테스 투톱을 선택했다. 결국 러시아와의 첫 경기에서 라울과 모리엔테스 투톱이 좀처럼 골문을 열지 못하자 사에스 감독은 발레론을 교체 투입 시켰고, 발레론은 곧장 결승골을 터뜨리며 1-0 팀 승리를 이끌었다. 그럼에도 사에스 감독은 2차전 그리스전에서도 발레론을 선발출장시키기 보다는 라울-모리엔테스 투톱을 여전히 선택했으며 발레론은 25분을 남기고 교체 투입되며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지 못했다. 8강 진출이 걸렸던 마지막 3차전 포르투갈전에서는 아예 출전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조3위로 충격적인 탈락을 경험한 스페인대표팀에게 스페인 언론과 팬들은 특히 사에스의 용병술에 크게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그 비난 속에는 역시나 발레론의 적은 출장시간에 관한 부분이 적지 않았다.

언론의 집중 비난에 못이겨 2006년까지 대표팀을 맡으려 했던 사에스가 사임하고 새로이 아라고네스가 무적함대의 사령탑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세대교체를 단행하던 아라고네스 감독은 발레론을 좀처럼 기용하지 않았고, 4-3-3으로 팀 포메이션을 옮기면서 자연스레 발레론의 입지는 좁아져만 갔다. 설상가상으로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앞둔 1월, 발레론이 십자인대 부상으로 시즌아웃됨에 따라 어쩌면 마지막 메이저대회가 될지도 모르는 월드컵 무대에 발레론은 자신의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발레론과 스페인대표팀을 다룰 때 항상 나오는 이야기는 '만약 발레론이 스페인 선수가 아니었다면….'일 터. 스페인의 상징인 라울 곤잘레스와 움직임이 겹치면서 자신의 플레이를 마음껏 선보이기 어려웠기 때문에 자연스레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다지지 못한 까닭이다. 라울이라는 선수가 스페인대표팀에서 차지하는 비중 탓에 발레론이 라울을 밀어내고 기회를 얻는 것은 너무나 어려워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사에스 감독은 유로2004 본선 3경기에서 1골밖에 뽑아내지 못한 라울-모리엔테스 투톱을 선택했고, 이어 아라고네스 감독은 어린 선수들을 중용하며 발레론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언론과 팬들이 그토록 바라던 발레론은 정작 감독의 전술에 의해 희생되어야 했다. 정말 만약 발레론이 스페인 선수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다른 국가대표의 선수였다고 해도 이렇게 찬밥신세였을까. 자신의 재능을 스페인 국민들을 위해서 마음껏 펼칠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또 아쉬울 따름이다.
사비 알론소: "같이 뛰어본 사람 중의 최고는 발레론이다. 수줍음이 정말 많지만 피치에 나서면 모든 것을 다 한다. 그와 함께 뛰는 것은 정말 큰 즐거움이다."
■ 선수가 아닌 인간으로서:겸손하고 사람 좋은 '신부님'
공항 카페테리아에서 선수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다 가장 뒤에 나온 발레론에게 모든 커피요금이 청구되어 당황해했다는 일화는 많이 알려진 편. 더불어 발레론의 주머니에 계산되지 않은 과자를 몰래 넣었다가 경고부저가 울리는 바람에 발레론이 곤란해 하고 동료들은 그의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며 대폭소를 터뜨렸다는 일화도 있다. 팀 동료들은 피치위에서의 축구 실력 뿐만 아니라 발레론의 이러한 순진한 모습과 선한 인간성에 또 한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한다.
2002/2003시즌 바야돌리드와의 경기에서 발레론은 페냐에게 강력한 태클을 당해 장기간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한창 잘나가던 때에 부상을 당한 발레론은 페냐에 대한 악한 감정이 없냐는 질문에 ˝그가 일부러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그냥 넘겨 버렸다. 노르웨이와의 플레이오프 2차전 3-0 승리 이후에 자신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에 대해서도 ˝1차전과 멤버가 같았어도 이러한 스코어가 나왔을 것˝이라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는 슈팅보다는 패스를 먼저 생각한다˝며, 그리고 ˝팀에서 나 혼자 눈에 띄는 것은 원치 않는다˝며 자신보다는 동료들을 챙기고 겸손해할 줄 아는 그는 동료들로부터 선수로서 뿐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인정도 받고 있다.
다비드 실바: "같은 마을 출신인 발레론은 축구선수로서의 재능은 재차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인간적으로도 정말 대단하다. 그의 소박하고 성실한 인간적인 면은 본받고 싶다."

■ 항상 발전하는 선수가 되고 싶다:발레론이 빛나는 이유
발레론은 우측윙어로도, 중앙미드필더로도 때론 스트라이커로도 뛰었지만, 주로 4-2-3-1포메이션의 3의 가운데에 서서 창조적이고 정확한 패스웍을 바탕으로 팀의 공격을 풀어나가는 실질적인 공격의 원천이자 경기의 전체적인 흐름을 조율하는 플레이메이커로서의 임무를 맡아왔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수비 한둘정도는 제칠 수 있는 개인기, 넘어질듯 넘어질듯 균형을 잡아 공을 빼앗기지 않는 키핑력, 그리고 빗장수비를 단번에 뚫어버리는 송곳같은 쓰루패스 등을 통해 발레론은 실질적인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고 단언할 수 있겠다.
16명을 새로 영입하는 등 카파로스 감독의 지휘아래 과감한 세대교체를 단행하는 통에 성장통을 앓고 있던 데포르티보에게 있어 한 가지 간절한 바람이자 유일한 희망이 있었다면, 그건 바로 부상에서 회복중인 발레론의 컴백이었을 것이다. 팬들은 데포르티보가 부진에 빠졌을 때마다 항상 발레론의 복귀날짜만을 손꼽아 기다려 왔고, 그만 돌아오면 데포르티보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최근의 성적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데포르티보 팬들에게는 의지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고, 그 대상은 단연코 발레론일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발레론은 데포르티보에게 있어 너무도 큰 존재다.
2010년까지 계약을 연장하며 사실상 데포르티보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할 것으로 보이는 그는 은퇴 후에 감독이나 평론가보다는, 카나리아 제도로 돌아가 축구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며 소박한 자신의 미래를 꿈꾸고 있다. 다른 선수들에게 실력으로서의 인정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인정을 받고 있는 그는 여전히 ˝항상 발전하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최고의 실력을 가진 선수가 지닌 겸손함, 발레론이 빛나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