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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사랑 (3장 93년 1월..두번째..) <13년 전, 실극화>

추림의 풍 |2005.09.21 23:35
조회 189 |추천 0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유화의 음성이 귓속을 간지럽혔다.

 

"전화왔는데 또 안받을거야?"

 

딱히 잠을 자려고 오전이 다 가도록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단지 귀찮았다.

간밤에 늦도록 술마시며 논탓도 있었지만 집이라는 공간에서는 무엇도 하고 싶지가 않았

다.

 

부모와 오빠 언니 여동생이 함께하고 있었지만 도저히 정도 붙지 않았고 갑갑하기만 한

공간이었다. 맨정신에 남아도는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것은 유미에게 무료하고 답

답하기만한 순간일뿐이었다.

 

서너차례 전화가 왔지만 그때마다 반응을 보이지 않던 유미가 이불을 젖히고 벌떡 상체를

세웠다. 유화가 첫마디 뒤에 누군가의 이름을 거론한 후의 반응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이번엔 누구니? 친구라고 하던데?"

 

두살 위인 언니, 유화가 유미의 행동을 반기기라도 하듯이 물었다.

 

"친구!"

단순하게 건조한 음성으로 대답한 유미가 침대에서 내려와 유화를 지나쳐 거실로 나갔다.

헛기침을 몇차례 내뱉은 유미가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방금 잠에서 깨어난 것 같지 않은 선명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화가

실소를 흘렸다. 동생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 유화는 매번 유미의 저런 행동에 놀랐다.

너무 자신을 잘 위장하고 변화시키곤 하는 모습은 배우고 싶어도 마음대로 되지않는 행동

이었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유미는 상대가 이미 누구인지 첫 음성으로 간파했지만 모르는척 응수했다.

 

-아예. 저 석혼데... 모르시겠어요? 지난번에 만났었잖아요.-

 

당연히 안다. 덩치가 비대하고 키는 그리 크지 않은 수연의 친구였다. 유미가 벽 한쪽에

걸린 달력을 힐긋 바라보았다. 신정이 막 끝나고 새해 둘째 주였으니 열흘 정도만에 전화

한 것이다.

 

"누구? 석호... 아! 김석호씨? 어쩐일이세요?"

 

-그냥 전화 드렸어요. 새해도 시작되고... 아 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하시구요.-

 

"네. 고마워요. 석호씨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김석호라는 이친구는 자신에게 가장 관심을 보였던 남자였다. 당시 나왔던 수연의 친구들

중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변함없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인 남자는 이친구가 유일했다.

하도 집요하게 전화번호를 묻기에 알려주었다. 아마 다른 친구들도 알고 있을지 몰랐다.

 

-유미씨. 그날 잘 들어가셨어요?-

목소리가 무척이나 친근하게 들려왔다. 유미가 비스듬한 방향에서 팔장을 끼고 선 유화에

게 손짓으로 물을 달라고 제스처를 보이고 대답했다.

 

"네 잘 들어 왔어요. 덕분에 즐거웠어요."

 

-추림... 그 놈이 잘 했을거예요. 워낙 난놈이니까요. 우린 아침까지 술마시다가 늦게 헤어

졌어요.-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석호의 말에 유미는 순간적으로 추림을 떠올렸다.

유일하게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맨 마지막 순간까지 동행했던 남자...

뭔지 모를 감동을 느끼고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했던 남자... 아마 그 친구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석호나 다른 친구들처럼 전화번호를 묻거나 관심

을 보이지도 않았으니 그것이 당연할지도 몰랐다. 그러자 웬지 조금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 덕분에 잘 도착했어요."

 

많은 남자들을 만나보았다. 하지만 추림이라는 남자처럼 새롭거나 배려있는 남자는 드물

었기에 정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통화 해보지 않으셨어요? 가까이에 있잖아요?-

 

"네. 전화번호도 모르고... 별 말 없었어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대답이었다. 석호라는 친구는 당연하다는듯이 물었지만 사실은

그것과 전혀 달랐다. 남자들은 한결 같았다. 만나면 꼭 묻는것이 전화번호나 집이 어디냐

는 질문이었다.   

 

-그놈이 원래 그래요. 당췌 여자에게 관심이 없어요. 하지만 멋있는 놈이에요. 진짜 괜찮

은 친구지요.-

 

유미로서는 뜻밖의 말이었다. 대개 남자들은 아무리 친해도 여자에게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를 칭찬하거나 두둔하는 발언에 아주 인색한 법이었다.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석호라는 친구는 그 범주를 벗어난 행동을 하고 있었다. 바보거나 아니면 순수

하거나... 

 

"좋은 친구 같았어요. 끝까지 신경써 주시더군요."

 

-그놈 알고 있으면 많은 도움이 될거예요. 애늙이라서 마치 형이나 아버지 같은 놈이거든

요.-

 

석호의 말이 맞는듯 했다. 애늙은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무척 조숙하고 속이 깊은 남자

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포장된 외피이거나 연출된 행동은 아닌것 같았다.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저기... 유미씨?-

 

"네. 말씀하세요."

 

유미는 석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열 남자중 여덟 아홉은 자

신의 짐작에 정확히 부흥하곤 했으니 석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괜찮다면 시간나는데로 만날 수 있을까 해서요.-

 

괜찮은 남자라면 유미는 기꺼이 만나왔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은근슬쩍 말을

돌리며 상대가 스스로 알아서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김석호라는 남자는 조금 괜찮은 범위

내에 있었지만 덥석 그러자고 말할 유미는 아니었다.

 

"좀 더 시간이 필요하지 않나요? 너무 이른것 같기도 하고요."

 

-네에... 미안합니다. 그냥 만나서 차라도 마시고 싶었거든요. 유미씨가 보고싶기도 했구

요.-

이정도면 솔직한 편이지만 정말 여자를 아는 남자라면 이런식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적어

도 유미의 견지내에서는 그랬다.

 

-다음에는 시간을 내 주실 수 있나요? 아니... 제가 그쪽으로 가면 안돼나요? 추림을 만날

겸해서 말이죠. 추림하고 가까운데 계시잖아요. 친구들도 근처에 제법 있어요.-

 

"별로 나쁘지는 않네요. 헌데... 여보세요?"

 

-네. 말씀하세요. 듣고 있어요.-

 

유미는 순간 추림에 대해 묻고 싶은것을 끄집어 내야하나 하고 망설였다. 웬지 자꾸 떠오

르는 추림이었다. 잊으려 해도 마치 살갗에 박힌 작은 가시처럼 신경이 쓰였고 해야 할 일

처럼 느껴지는 존재였다.

한숨을 가볍게 내쉰 유미는 조금 뻔뻔해 지기로 했다. 

 

"다른게 아니고요. 이추림씨 말인데요....."

 

-아! 네. 추림말이예요? 뭐 궁금한것이 있어요? 물어보세요. 전화번호 알려 드릴까요?"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건지 아니면 소가 뒷걸음치다 쥐잡는 격으로 알아맞힌 것인지 몰라

도 유미가 원하는 대답이 바로 튀어나왔다. 

소리없이 웃음진 유미가 대답했다. 이정도 눈치면 둔한 사내는 아닌 것이다.

 

"알려주실 수 있나요? 그냥 궁금해서요.?

 

그렇게 말하고 유미는 바로 후회했다. 그냥 궁금한것이 자기라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하지 않을 것이 뻔한데 너무 유치하게 말한것 같았다.

 

-대신! 다음에 저 한번 만나 주세요.-

 

덩치에 맞지 않게 제법 흥정도 할 줄 알고 머리도 쓸 줄 아는 석호였다. 당연히 만날 수 있

었다.

할일 없거나 생활이 조금 지겨워지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 보다 즐거운 일은 없었다. 그

것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유미에겐 가장 새로운 변화가 되는 일이었다.

 

"음... 좋아요. 제가 석호씨에게 전화할께요.-

 

-감사합니다. 추림 전화는 회사로 해야해요. 집에 전화가 있지만 저도 몰라요. 적으세요.-

유미는 석호가 추림의 직장 전화번호를 불러주어 적는동안 곁에 앉아 빤히 자신을 바라보

는 유화를 바라보았다. 손으로 휘휘저으며 저리가라는 몸짓을 했는데 유화가 혀를 내밀어

약을 올렸다.

 

" 엉큼한 계집애! 경태가 알면 널 죽이려 들걸?"

 

다급하게 수화기를 틀어막은 유미가 유화를 죽일듯이 노려보았다.

 

"어머? 나 소리친다."

 

도리질을 친 유미가 다시 수화기를 귀에대고 잠시 박경태를 떠올렸다. 하도 자신을 일방

적으로 쫒아다녀 어느샌가 공식적으로 사귀는 사이인듯한 서로가 되어버렸지만 천만에

이었다.

 

가장 유미가 싫어하는 스타일이 박경태였다. 소심하고 욕심많은 이기주의가 그였다. 나이

는 겨우 세살 많지만 무척 나이많은 어른인척 행동하기 좋아하고 가부장적이고 군주적인

기질이 다분한 남자였다.

 

박경태를 생각하다 코웃음을 친 유미가 언니 유화를 노려보았다. 그때 수화기에서 석호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저 그만 끊을께요. 오늘 고마웠고요 다음에 꼭 만나주셔야해요.-

 

덩치는 산만한 남자가 말하는것은 아이같았다. 수연의 친구들을 만났을때도 그랬는데,

석호라는 친구는 원래 성격이 그런것 같았다. 순하면도 있고 귀여운면도 없지 않아 있었

다.  

 

"그래요. 그럴께요. 잘 지내시고요... 네... 네... 그쪽도 건강하세요....."

 

유미는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석호의 음성을 들으며 추림의 회사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

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숫자의 번호였지만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았다.

마치 수십 수백번을 눌러보고 외우고 있던 번호 같았다.

 

"예. 석호씨도 잘 지내세요."

 

저쪽에서 전화 수화기가 내려지는 소리가 들리고 곧 뚜우하는 신호음이 들려왔다.

상대보다 나중에 전화를 내려놓는 것은 유미가 절대 하지 않는 일중의 하나였다. 상대가

먼저 전화를 끊고 그 나중에 느낄 여운은 정말 싫었다. 그래서 유미는 항상 먼저 전화를

내려놓곤 하였다.

 

그것은 상대에게 아쉬움을 주는 동시에 자신은 작은 성취감을 느끼는 소소한 일이었지만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아쉬운 이는 절대 먼저 전화를 끊거나 헤어지자 하지 않는

법이니까. 딴 생각하는라 그 시기를 놓쳐버린 유미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하는거 아니야? 하여튼 넌 정말 모르겠다. 지겹지도 않아? 하루가 멀다하고 남자들

에게 전화가 걸려오고 항상 그렇게 매번 다른 남자니?"

 

헝크러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유미가 유화를 힐긋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는? 유진하고 오빠는 어디갔어?"

 

냉장고로 다가가 물병을 꺼낸 유미가 컵에 물을 따르며 묻자 유화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작은집에 가셨어. 아마 늦게 오실거야."

 

유화는 유미와 절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 중 하나였다. 성격이 정 반대인 두 자매는

극명하게 삶에대한 주체가 달랐다. 어찌보면 유미가 언니고 유화가 동생같은 분위기인

그녀들은 사사건건 부딪히지는 않았지만 유화가 유미에 대해 썩 못마땅한 것들이 많았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때문에 대학 진학을 애시당초 포기한 유미라면 유화는 양 부모와

오빠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당당히 대학생이 되었고 새파의 어려움과는 무관한 생활을 하

고 있었다. 

 

그에 반해 유미는 집에서 아주 도외시된 아이가 되어버렸다. 성격이 강하고 고집스러운

유미의 탓도 있었지만 열 손가락 중 유미는 가장 안 아픈 손가락인 자식이었다.

그것으로 인해 유미는 힘들어 하고 고민했지만 겉으로 드러내거나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

다.

 

일찍 세상을 경험하고 사회를 알게 된 후 사람의 주관과 길은 저마다 다르다고 판단한 유

미의 생각이었지만 그로인해 그녀는 엉뚱하게 변했다. 밖으로 나돌았고 안정된 생활의 부

재가 그것이었다.

 

 

"상관하지 말아줄래? 피곤해. 나 깨우지마!"

 

유화에게 쏘듯이 말하고 유미는 방으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계집애. 밥은 먹어야지? 라면 삶아줘?"

 

유화의 좋은점은 이것이었다. 늘 동생에게 무시당하듯 하면서도 항상 곧이 받아들이지않

고 다른 방향으로 화제를 돌려 분위기를 순화시키는 것이다.

 

"됐어! 나 이따가 여섯시쯤에 깨워줘."

 

유미가 침대에 몸을 길게 뉘이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덥어쓰고 부탁의 말을 전했다.

유화가 대답하며 건너방으로 들어가 텔레비젼을 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미는 이불속에서 석호와의 통화를 떠올리다가 어느새 추림을 생각했다. 새해도 열흘쯤

흘렀으니 새해라는 기분은 저만치 달아난 시기였다.

 

그동안 열흘남짓, 머릿속 내내 추림이라는 남자가 떠나지 않았다. 어떤 남자인지 그런것 

보다는 웬지 그 친구라면 자신을 이해하고 진실로 여자로서 대해줄지 모른다고 느끼고싶

었다.

 

남자라는 동물은 하나같이 욕망의 도구로서 여자를 대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절실히 느끼

고 있는 유미였다. 만나고 알아가는 남자들마다 가식과 허영 위선과 허세 투성이었다.

그 뒤엔 항상 원초적 본능인 배설의 욕구가 가득했다.

 

어찌하면 자신과 관계할까 하는 눈치와 언행들 뿐이었다. 그것이 딱히 싫거나 혐오스러

운것은 아니었다. 어린 나이지만 이미 남자를 알고 있는 유미였다.

그렇다고 이 남자 저 남자에게 몸을 허락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첫경험도 원치않는 강

압에 의해서였다. 그 뒤로 몇번 경험을 했지만 그것이 좋거나 희열스럽지는 않았다.

 

자신은 단지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것이 이상하게 변질되어 이성이라는 것이 되었

지만 적어도 외롭거나 심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상한것은 남자들을 만나면서도 또한

남자라는 동물이 싫었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남자는 여자에게 새롭고 강한 카타르시스

지만 반대로 남자는 여자에게 더러운 속물이고 오욕 덩어리라는 것이었다.

 

지긋지긋 한 것! 속물근성이 가득한 남자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더 웃긴건 그것을너무 잘아는 자신인데 남자를 멀리하거나 혐오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

다.

 

오히려 즐겼다. 남자들이 관심을 주고 추파를 던지고 하는 것을 자신은 즐기고 바라고 있

는지도 몰랐다. 새로운 남자, 전혀 모르던 얼굴을 보게되고 이름을 알게되고 같이 식사하

고 술 마시는 것은 늘 새롭고 즐거운 일상같았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남자들이 원하는 욕망의 도구로서 자신을 허용하기는 절대 싫었고

거부했다. 물론 개중에는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어서 몸과 마음을 준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끝이었다.

그것이 남자였다. 사랑하지도 존경하지도 않으면서 여자를 농락하고 깊고 어두운 늪에

빠뜨리고 그 자신들은 도망치듯 사라지는 존재들...

 

그래서 남자를 만나고 가까이 하면서도 믿지않는 이상한 자신이 되었다.

추림과 같은 남자는 많았다. 잘생기고 활달하고 매너까지 갗춘 사고밝은 남자는 많았다.

그러나 그 뒤에는 모두 한결 같았다. 이것은 자신의 병인지도 몰랐다.

너무 결과를 잘 알면서도 믿어버리고 후에 상처받고... 자해같은 것!

 

이상한것은, 추림은 망설이게 했다. 뭔지 모를 암연같은 것이 있는듯 느껴졌다.

어둡고 깊으며 애처로운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을 딱히 몰라 궁금하고 생각이 났다.

하지만 그도 결국 같은 남자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고질병과도 같은 자신의 모순때문에 

만나고 싶고 알고 싶어하는 욕망이 절제되지 않았다.

 

머리가 무겁게 느껴진 유미는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내려와 방안 창문에

드리워진 가수 이승철 그림이 새겨진 브로마이드식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날은 잔득 흐려진 채 곧 눈이라도 솓아질 기세였다.

하늘을 올려다 보니 검은 구름이 낮고 무겁게 깔린 채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저 멀리 아스라히 허공으로 신문지인듯 보이는 물체가 너울거리며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

다.

 

뭔지모를 감정이 솟구친 유미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겨우 스므살인데... 왜 이리 지겨운거니... 사는게 왜 이리 지겹니... 추림... 넌 누구니...?'  

 

*          *          *

 

초인종이 열 대여섯번쯤 울리자 추림은 하는수 없이 무겁고 중심잃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열기가 치미는 통에 욕지기마저 느껴졌다.

겨우 오미터 남짓한 거리인데 현관이 왜 그리 멀게 느껴지는지 추림은 그대로 쓰러져 눕

고 싶었다.

 

현관으로 다가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잠긴 자물쇠 고리를 풀자마자 무섭게 문이 열렸다.

별 감각이 없는 후각으로 익숙한 향수 냄새가 훅-하고 풍겨져 왔다.      

 

"와... 왔어?"

 

기운없고 탁하게 잠긴 목소리가 겨우 새어나오며 손님을 맞이했다.

 

"세상에...! 얼마나 아프길래 여기까지 열기가 느껴지는 거야?"

 

하얀색 롱 코트를 벗다말고 추림의 이마에 손을 얹은 선주가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맙소사!"

 

추림이 허리를 구부리고 겨우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머리가 무겁고 사물이 핑그르

하고 돌았다.

 

"나... 좀... 누울께."

 

"도대체 언제부터 아픈거니? 너 병원가야하는거 아니야?"

 

추림은 사실 선주가 조금 부담스러웠다. 혼자있고 싶었는데 말많은 그녀가 혹 자신의 상

태를 무시할까 겁이났다.

직장의 친한 형을 통해 알게된 명지대 이학년생인 최선주는 귀엽고 발랄한 여자였다.

 

'제길. 바람둥이 이대준'

 

속으로 회사동료이자 친형같이 대해주는 이대준을 욕한 추림이 겨우 이부자리에 몸을 뉘

였다.

수건을 하나 들고 욕실로 들어간 선주가 옷도 벗지않고 물에 수건을 적셔대는 소리가 들

렸다.

지난 주에 이대준과 그의 애인과 같이 이곳에 다녀간 최선주는 오늘로 다섯번째 방문이었

다.

집에 없으면 숨겨둔 열쇠를 이용해 버젓히 방안에 들어와 잠까지 자고있는 선주였다.

 

워낙 성격이 와일드한 여자이기도 했지만 처음 추림을 만났을 때 반했다고 말을 전해 들

었다.

추림은 골치가 아팠다. 관심도 없는 여자와 한 공간에 있는것은 편한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선주는 성격이 지나치게 쾌활하고 대담하기까지해서 노골적으로 마음을 표출하곤 했다.

겨우 며칠만에 그런식의 행동은 추림에게 매우 당항스러운 것이었다.

물론 반발할만하거나 화날만한 행동을 한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남자나 여자의 행동반경

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추림으로서는 곤혹스러운 상대였다.

 

@          @

 

"몇살이세요?"

 

선주가 동그란 눈망울로 추림에게 묻자 추림은 멈칫거리다가 대답했다.

 

"스므...한살 인데요."

 

거짓말이었다. 순간적으로 그런것이지만 이면에는 선주보다 나이어린게 못마땅한 마음

이 작용했다.

 

"저랑 동갑이네요. 우리 그냥 말 놓으면 안돼요?"

 

몇잔 마신 맥주에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선주가 거침없이 말해오자 추림은 피식웃으며

대꾸해주었다.

 

"그러지 뭐."

 

"여자친구 있어요?"

 

느닷없는 질문에 추림은 조금 당황스러운 기색이 되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망설였다.

 

"에이. 없구나? 좋아! 이추림 너 내가 찜했다!"

 

없다고 대답하려는 추림에게 사정없이 말해버린 선주가 다가와 덥석 추림의 손을 부여잡

고 악수를 했다.

 

"나 싫어? 나 예쁘다고 다 그러던데? 우리 사귀자 응?"

 

당황한 추림이 다정하게 술을 나눠 마시고 있는 이대준과 그이 애인인 양미선을 바라보

며 울상을 지었다.

 

"뭐해 임마! 감사합니다하고 인사해야지? 프하하핫!!"

 

"어머? 선주 너 정말 추림씨가 마음에 들었나보구나. 이상한 일이네."

 

미선이 선주이야기를 하자 대준이 허리를 곧게 세우며 물었다.

 

"선주가 뭐가 이상해? 쟤 원래 한 터프한 얘 아니었어?"

 

"오빠는 몰라서 그래. 쟤가 얼마나 도도한 얜줄 알아? 열남자 마다하는 얘란 말이야. 그런

데 추림씨에게... 야! 최선주 너 지금 장난하는거지? 그치?"

 

명지대 선후배 사이이자 친한 사이인 미선이 선주에게 못믿겠다는듯이 따졌다.

 

"아니 전혀. 나 이 남자가 아주 마음에 들어. 음식 잘하지 깨끗하지 매너 좋지 잘생겼지...

음... 결정적으로 눈빛이... 느낌이 아주 좋아."

 

주말 밤에 느닷없이 찾아와 막 저녁을 해먹으려던 추림에게 일거리를 만들어줘 버린 이들

과 하는 수 없이 저녁을 같이 먹게 되었다. 간소하게 차리려던 것이 손님이 온 탓에 시장을

다녀오고 두시간이 더 지나서야 저녁식사를 하게되었던 것이 몇시간 전이었다. 그 뒤로

계속 이야기하며 술만 마셨는데, 이 모양이었다.

 

"정말인것 같네? 별일이야... 추림씨는 선주가 마음에 들어요?"

 

미선이도 선주의 행동이 의외인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울상인 추림에게 물었다.

 

"전... 전...모르겠어요."

 

"프하하... 저새끼 아직 여자 경험도 없어! 선주야 너 땡잡았다구 생각해라. 저놈 천기다

천기!"

 

울것 같은 추림을 놀리며 대준이 재밌다고 박장대소를 터트리고 말하자 선주와 미선이

눈을 치드며 추림을 바라보다가 대준에게 미선이 물었다.

 

"오빠. 천기가 뭐야?"

 

"엉? 천기도 몰라? 나도 한때는 천기였는데."

 

"아이 참.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미선이 짜증난듯 묻자 대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천기... 천연기념물 말이야. 그걸 줄인 말이지."

 

"천연 기념물? 누가? 추림씨가?"

 

"당연하지 나이가 몇갠데 아직 여자도 모르고... 그게 천연 기념물이 아니겠어?"

 

"듣고보니 그렇네? 호호호!"

 

미선마저 웃자 추림의 얼굴이 벌겋게 변해버렸다. 억지로 선주의 손을 털어내고 추림이 고

개를 푹 수그리고 말았다.

선주도 이상해 졌는지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얼씨구? 얘네들이 아주 쌍으로 노네? 그래 천기끼리 잘들 해봐라! 하하하!"

 

"호호호호.....!"

 

불과 일주일전에 벌어졌던 개운하지 않은 사건이었다.

그 뒤로 네번인가를 찾아왔다. 막무가내로 밀어부치는 선주인지라 정이 없지 않고 독하지

못한 추림은 차마 가라고 말하지 못하고 싫다고 마음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니 선주가 저혼자 추림을 좋아하는줄은 전혀 모르고 있는것이다.

 

"너 정말 무지하다. 어떻게 이지경인데도 병원에 가보지 않은거니?"

 

"......"

 

말없이 선주가 하는 소리를 건성으로 들으며 이마에 올려진 차가운 수건의 기운을 느끼

던 추림은 이런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실 최선주 이 아이는 추림에게 과분한 여자인지도 몰랐다.

 

코카콜라 한국본사 상무의 딸이라는 것과 중,고등학교를 외국에서 다닌것만으로도 부담

스러운 여자였다.

분명 귀하고 보살핌속에 자랐을 선주였다. 아직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것이고 경험

은 더더욱 미천할 것이었다.

 

저마다 살아가는 모습과 환경이 다르고 바라보는 세상의 이치도 틀리겠지만 자신과는 너

무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여자임에는 분명했다.

결정적으로 이 여자에게는 별반 느낌이 없었다. 무언가 감동이 전해지고 가슴 언저리를

간지럽히는 속삭임 같은 것이 없었다.

 

'유미... 그 여자는...'

 

그러고 보니 유미라는 친구가 기억났다. 미진했지만 분명 다른것이 느껴지는 여자였다.

슬프고 애처롭게 느껴졌고 가슴이 진저리 쳐지는듯한 감정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더이상 볼 수 없을 것이다.

 

"추림. 뭘 그리 생각하니?"

 

머리맡에 앉아서 추림을 곧바로 내려다보며 선주가 물었다.

 

"아니... 생각은 무슨....."

 

"너 다른 여자 생각했지? 다 알아. 그런 얼굴 표정은 딱 '여자생각해'하는 표정이야."

 

귀신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이런경우는 대개가 넘겨짚는 것인것을 추림은 잘 알고 있었

다.

 

"그래. 여자 생각한다."

 

열이 내려 좀 가벼워진 몸이된 추림이 장난끼가 발동했다. 그래서 심각하게 말했다.

 

"나쁜... 누구야? 좋아하는 여자야? 서로 사귀는 여자야? 대준 오빠가 너 사귀는 여자 없

다고 하던데?

정말 여자가 있어?"

 

참 많은것을 묻는다. 그런데 선주의 얼굴 표정이 장난이 아니었다. 심각하게 굳어있는것

이 정말 자신을 좋아하는가보다 라는 생각이 드는 추림이었다.

 

"죽을때까지 시귀기로 했어. 그녀... 그 여자는 아주 아름답고 강한 여자야. 아마 날 그만

큼 사랑하는 여자는 없을걸? 소개시켜줄까?... 아니다 넌 보면 안된다.?

 

추림의 말은 진행형이므로 거의 확실하다고 여긴 선주가 씁쓸한 얼굴로 물었다.

 

"넌 내가 그렇게 싫어?"

"싫고 좋고가 어딨어? 우린 겨우 일주일 밖에 알지 못했어."

 

"그래도 느낌이란게 있잖아. 그 여자는 처음에 어땠는데? 뭔가 달랐어?"

 

모든것을 파해칠 태세로 질문하면 대책이 없는 여자가 선주였다. 이미 한번 경험해서 잘

알고 있었다.

 

 

"선주야? 넌 정말 내가 좋은거니? 난 아직 믿지않고 있는데. 니가 장난치는것 같단 말이다."

 

이마에 올려진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추림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장난? 그랬구나... 난 아닌데... 남자를 제대로 사귀어 보지도 못했어. 그래서 조금 서툴렀

나보다.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으면 서슴없이 낚아 채... 아니 고백하라고 친구들이 그래서 난 그래

야 하는줄 알았어."

 

맙소사. 이 여자 정말 심각한 여자였다. 세상에 어느 남자 여자가 마음에 든다고 바로 고백

하고 대쉬하고 그래서 사귀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그럴까? 이건 순진한건지 아니면 바보스

러운건지 헷갈렸다.

 

'에휴... 나라고 뭐 다른가?'

 

속으로 자신의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은것을 푸념하며 추림이 한숨을 내쉬었다.

 

"참 나원. 너... 아니다. 우린 아직 서로에 대해 잘 몰라. 그러니 좋고 나쁘고는 따질 수 없

어. 물론 느낌이 좋을수는 있어. 하지만 그것이 이성간에 대한 감정이라고 믿어선 안돼!

기본적으로 우린 인간이야. 신뢰나 믿음 따위가 먼저 이루어진 뒤의 감정이 곧 이성간의

교류가 시작되는 거야. 이거 하나만 물어보자. 넌 날 남자로 좋아하니? 인간으로 존중할

만하기에 좋아하는거니?"

 

잠깐 설명을 하며 선주를 설득시키려 했다.

그 뒤의 질문은 매우 애매한 것이라서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이미 자체로 남자인데 그 사이에 인간과 남자라는 논재가 존재되어서는 소용없다는 것을

추림은 알지만 경험없고 순진한 선주는 모른다고 생각해서 비비꼬아 만들어 낸 질문이었

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선주는 그 질문 자체를 아예 무시해버리는 대답을 했다.

 

"그게 왜 중요해? 남자와 여자는 섹스로도 사랑할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린 인간이면서 남

녀 즉, 이성간이잖아. 우리 섹스할래?"

 

전혀 엉뚱하고 다른 대답이었고 황당무계한 말이었다. 설마 이 여자가 이렇게 대담한 구석

이 잇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추림이 입을 딱 벌리고 선주를 응시하자 선주가 집요한 시선으로 추림의 시선을 허공에서 바주 보았다.

 

"대답해봐? 할래? 말래?"

 

이런... 추림에게 가장 난감한 상황이 발생해 버렸다.

삿된말로 선주는 걸레나 그런 여자는 분명 아니다. 다만 문화적 가치나 틀의 개념이 다른

여자가 확실했다. 중학교 이학년 때 일본으로 유학가고 다시 미국으로 가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대학에 입학한 여자였다.

 

근본적으로 한국과 문화나 삶의 질이 차이가 확연히 다른 나라에서 유년기와 사춘기를 보

냈던 그녀로서는 그것이 별 대수롭지않은 일이겠지만 추림에겐 매우 심각한 일이었다.

 

시골에서 대부분을 살았고 성장했으며 유교라는 이념의 사상에 물든 부모밑에서 교육받

은 추림이었다.

 

그러니 섹스라는 말 자체도 영어식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그것'이나 '오입'으로 부르는게

더 익숙했고 성은 은밀하고 숨겨야 하는 비밀로 치부하고있는 추림이었다.

말하자면 선주는 추림보다 더 월등한 세상에서 살았고 고차원적인 문화의 혜택을 누리며

살았다는 것이다.

 

사랑이 인간적 도리와 감정에 의존하는 것보다는 '저정도면 좋겠어'라는 식으로 가능하게

성장한 경우가 선주인 것이다.

 

"대답해봐!"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추림에게 다가서며 선주가 다시 채근했다. 무언가 대답을 해야 할

난처한 입장에 처한 추림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선주를 바라보았다.

 

"난....."

 

입을 열어 대답하려는 추림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선주의 눈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추림은 그 눈빛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4장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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