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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슬~님과 ^ ^*님은 동일인 이신가요? 그 답글이자 보충입니다.

고상기 |2005.09.26 15:18
조회 143 |추천 0

제가 앞의 글을 두서없이 작성하는 바람에 오해를 산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원래는 더 짜임새 있는 글이었습니다. 근거도 명확하게 표시했었는데 그만 글이 날아가고 말았죠. 그래서 기억나는 대로 쓴 게 위의 답글입니다.그리고 위 답글을 쓴 다음에도 다시 수정들어가서 보충하는 글을 썼습니다만, 윈도우 오류로 또 날려먹고 의욕상실하여 주말내내 손 놓고 있었죠.

 

물론 제가 조사한 내용 중에서 틀린 부분도 물론 없지 않을겁니다. 더구나 기억나는 대로 써서 표현도 적절치 않았을 거구요. 인정합니다.

 

이제 님께서 다신 답글에 대해서 제 생각을 적어보겠습니다.

 

먼저 제가 왜국의 기록만 토대로 했다고 누가 그러십니까? 

조선쪽 잡기에 실렸던 내용도 참조했거든요. 물론 정사가 아니고 야사이긴 합니다. 그리고 퍼온 글이라고 명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거 보니. 딴지 거셔서 저를 친일쪽으로 몰고 가시는 것 같은데요.

조일전쟁이라는 표현, 아직도 논란은 많죠.

 

 하지만 임진왜란이라는 표현은 단지 임진년부터 시작된 전쟁의 시작 단계이고 그 후 정유재란에서 완전히 조선반도를 회복했었습니다.  단지 7여년간의 이 긴 전쟁을 임진왜란이라는 단순한 표현으로 통칭하는 것이 합리적일까요?

 

 아무튼 임진년에 시작된 이 전쟁의 의의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조선 후기의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준 전쟁을 단순히 폭동이라는 표현인 란(亂) 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까?

 

  더구나 명나라는 이 전쟁으로 쇠락의 길을 걷다가 누르하치에게 멸망했습니다. 단지 5만 정도의 군사를 파견한 것으로 말이죠. 반면 일본의 병력은 2-30만 정도였던걸로 추산되고 있죠. 작은 규모의 난리가 절대 아닙니다.

 

그러면 조왜전쟁이라고 하면 되지 왜 조일전쟁이냐? 라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현재 일본은 친일이고 반일이고 간에 정치 경제적으로 우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국가대 국가의 관계죠. 아닙니까?

 따라서 서로 대등한 관계를 정립하고 합리적, 논리적으로 주장을 밀고 나아가야 합니다.

독도문제도 그렇고, 일본 평화헌법 문제도 그렇죠. 위안부 할머님들의 문제뿐 아니고 강제 징용 피해자, 국내에서 보면 친일 잔재 청산 등등.. 산적한 문제들이 많습니다.

 

 일본애들은 왜곡된 내용을 사실로 만들기위해 엄청난 노력을 합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나 국제절차-이 국제법은 아직도 약소국에 불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를 차근차근히 밟아가면서요.

그래서 독도가 국제영토분쟁지역으로 되어 있는 겁니다. 현 상황에서 국제재판을 통해 결정하게 되면 백이면 백 우리가 불리하죠. 따라서 우리도 제대로된 대응을 시작해야 하겠죠. 여러 단체들이 생기긴 했지만 아직 아마추어 수준입니다.

 

갑자기 엉뚱한 길로 글이 샜는데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조일전쟁이던 임진전쟁이던 전쟁이라는 용어가 맞다는 것이고, 임진왜란이라는 표현이 비합리적이라는 겁니다.

 

이전 왕조시대에는 연호나 왕의 재위 연대를 표시하고 십이간지를 써서 사건 내용을 기재하는 방식으로 역사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를 기년체(紀年體)라고 하죠. "임진왜란"도 이런 기년체의 개념에서 나온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년체 방식의 기록은 역사적 사건의 정의를 규정하는 바른 역사용어를 사용하는 데 한계를 지녔습니다. 왜냐하면 긴 역사동안에 60년마다 같은 간지가 나오는데 우연히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 용어만으로 이러한 사건들의 변별성을 가지기 어렵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 방식을 해방 뒤에 별 생각없이 수용하였기 때문에 임진왜란을 비롯하여 갑자사화·을미사변 등의 역사용어가 수없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간지를 사용한 방식의 부당성은 언급했고, 이제 "왜란"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적합하지 않음을 살펴봅시다.

왜란이란 “왜구가 일으킨 변란”이라는 용어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세계전사에도 기록된 엄연히 국가끼리 벌인 전쟁입니다. 그리고 3개국이 연관되었던 사안이고 특히 우리민족이 삶을 영위하는 한반도 전역이 휘말렸던 전쟁이기 때문에 작은  “왜란”이라 부르게 되면 그 실체에 접근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에게 더욱 의미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을 써서는 안됩니다. 또한 일본은 엄연한 국가 실체이므로 왜구로 대표될 수 없습니다. 일본이라는 국가용어가 세계적으로 통용되어 고유명사가 된 지금 더욱 써서는 안되는 표현이라는 거죠.

 

우리가 이러한 합리적이지 못한 표현을 쓰는데, 다른나라는 어떨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은 전쟁이 진행되는 시기의 일본 연호인 문록(文祿)과 경장(慶長)의 앞 글자를 따오고 전쟁의 뜻을 담은 역(役)을 써서 표현하였습니다. 붙여보면 " 문경역" 입니다.

최근 일본 진보 역사학자들은 "조선침략전쟁"이라고 쓴다고 합니다만 이것도 너무 일본중심적인 표현이라 이거죠.

 

그리고 중국을 보면 " 임진동정(壬辰東征)"이라고 표현하는데 이것 또한 임진년에 동쪽을 정벌하여 조선을 구원하였다는 표현인데 이는 '동쪽으로 정벌을 나아가 속국인 조선을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였다'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봉건적이며 수많은 한계를 가진 기존의 역사용어를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다른 나라들에 당당히 표기할 수 있는 이름으로써 "조일전쟁"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여기에 친일의 의미가 어디에 있습니까? 왜(矮)라 표시하지 않고 일(日)이라 표시해서 입니까? 저는 님께서 속이 매스꺼울 이유가 어디에도 없다고 봅니다.

 

다음 지적으로 넘어가죠. 노량해전 이전에 단병전이란 없었다고 하셨는데, 그건 이순신 장군이 수행한 전투만 가지고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아니면 조일전쟁 전체를 거친 해상 전투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노량해전 이전에 단병전은 없었다고 확신하십니까. 제가 잠시 조사하다가 읽은 내용에는 단지 한척의 왜선에 나뭇꾼 출신의 왜인 수십명을 수백명이 못당하고 육지까지 도망쳤다는 기록도 있었거든요. 왜의 정규군도 아니고요. 징발되어 온 잡부들한테 말입니다. 뭐 또 일본기록만 쓰지 말라는 둥 하시면 저도 더이상 할말은 없습니다.

 

그리고 원균에 대한 이야기는 저도 별다른 이의 없습니다. 어차피 정사에는 칠천량에서 패전하여 전사하여 선조에 의해 공신으로 책봉된것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엔 원균에 대한 어떤 됨됨이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식사료로 인정되지 않는 잡기들을 이용한거죠. 

그러나 역사에 있어서 정확한 것은 무엇도 없습니다. 그때의 시대적 정치적 상황에 따라 역사가 기록되기 때문이죠. 만약에 원균의 집안이 당대의 권력을 쥐고 있는 당파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역적질을 한것도 아니고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에 대해서 그정도 포상도 못할까요?

 

그리고 따져봅시다. 어느정도의 공과가 있다고는 하나 결론적으로 수많은 군사를 잃고 패사한 장수를 어째서 3대 공신까지 끼워넣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볼때는 이순신의 공적을 어느정도 상쇄하기 위해서 원균을 그렇게 우대한거라고 봅니다만. 육지에서는 권율, 바다에서는 이순신 이렇게 하면 조금 문제가 있겠죠? 이순신 장군이 너무 띄워지는 거니까요. 그렇다고 그 전과를 인정하지 않을 명분도 없고 말이죠. 조정에 적이 많았던 이순신 장군인데 그 적들이 버젓이 조정의 중책을 맡고 있는 상황에서 그 공적을 폄하하려는 노력이 없었다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저도 원균에 대한 의견이 그렇게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원균을 이렇게 표현한 기록도 있다는 것을 보여드린 것이죠. 때로는 야사가 더 신빙성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당시의 미묘한 정치적인 상황과 어우러진 역사 기록의 경우에는 말이죠.

 

그리고 원균의 사생활에 대한 내용은 조경남의 난중잡록과 안방준의 은봉야사별록,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내용이라고 썼는데도 기록이 없다니요. 찾아는 보시고 말씀하신 건지.

 

다음으로 넘어가서 판옥선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이것도 할말이 많은데요.

일단 조선의 군선에 대한 내용을 간단히 짚어보죠.

  조선 전기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에는 군함을 대맹선,중맹선,소맹선으로 구별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조선 후기의 법전인 대전회통에는 전선, 방선, 병선으로 군함 종류를 구별하고 있죠. 조일전쟁 당시의 조선 수군의 주력 군함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판옥선(板屋船)입니다.

 그러나 조일전쟁 당시의 판옥선은 조선 전기의 대맹선과는 전혀 다른 배이며, 대략 조선 후기의 전선(戰船)에 해당하는 배입니다. 당시에는 판옥선, 판옥전선, 전선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웠다고 합니다.

 

조선전기의 선박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긴 하지만 대맹선은 판옥선보다 작은 규모(약80명)의 배로 단층 구조의 한선(韓船)입니다. 고려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맹선계열을 그대로 수용한 선박입니다. 인터넷 보면 대맹선이 300명 승선 규모네 판옥선이 대맹선이네 쓰시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군선은 병력 수송용 선박에 가까웠습니다. 신속한 이동과 단거리 유격전을 주 목적으로 사용된 함선입니다. 물론 쓰시마 정벌할 때 일반적인 대맹선보다 큰 배를 건조했을 수도 있죠. 하지만 대맹선은 판옥선과 다릅니다.

 

아무튼 그래서 판옥선을 태종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대체 어디 어느 기록에서 보신건지 궁금합니다. 그 내용을 찾으신 것이라면 대한민국 해양사에 길이 남는 업적이 될텐데요. 알려주세요.

 

판옥선의 가장 큰 특징은 판옥선 이전의 주력 군함인 대맹선이 갑판 위가 평평한 평선형(平船型)인데 비하여, 판옥선은 갑판 위에 다시 갑판(상갑판)이 추가되어 있고 (2층 구조의 함선), 장대(將臺)도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판옥선'으로 부르게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대맹선보다 함선이 크고 노를 젓는 격군과 전투요원을 분리한 2층구조의 함선이라는 것입니다.(100명~120명 승선) 혹 다른 기록에서 3층으로도 되어 있다고 하죠.

 

하지만  아직 판옥선의 개발과정은 아직 명쾌하게 밝혀지진 않았습니다. 다만, 대략 중종 말~명종 초에 걸쳐서 판옥선이 개발되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명종 10년(1555년) 9월 16일 한강에서 새로 만든 전선(戰船)을 시험했다는 기록이 있죠. 일반적으로 이 기록에 보이는 "새로 만든 전선"이 판옥선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는 것입니다. 뒤이어 명종 12년의 기록에 판옥선이란 이름이 처음 등장하고 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고 보여지네요.

 

그렇다고 판옥선이 어디서 뚝딱하고 발명해서 떨어진 것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중종 39년에 판중추부사 송흠은 당시 전라도 지역에 침입하는 중국 해적선이 "백여명이 탑승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크고, 판자를 사용하여 배 위에 집을 만들었으며(以板爲屋), 나무 판자로써 방패를 세웠다(用板爲障)"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배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보이는 以板爲屋이라는 문구가 판옥선이라는 이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조선 전기 성종부터 연산군, 중종대에 걸쳐 어떤 배가 가장 해전에 효율적인가에 대해 일종의 전략전술적 논쟁이 존재해왔었습니다. 작은 배로 빠르게 접근하여 전투를 수행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소함주의자와 원거리 무기를 중심으로 하는 큰 배를 주축으로 전투를 수행하여야 한다는 대함주의자간의 논쟁이 약 백여년에 걸쳐 있어왔죠. 그 뒤 흘러간 상황으로 볼 때 결국 대함주의자들이 승리하여 판옥선이 개발된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을 뿐입니다.

 

보통 이순신장군이 학익진이니 다른 전법이니 하는 것들으 뚝딱 개발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지는 않을 것으로 봅니다. 현대에도 해군이 모종의 전술을 도입하려면 최소 5년에서 10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병기나 무기체계를 전술에 맞도록 개발하거나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연습을 통해 전술상의 허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라도요. 더구나 현대보다  무기체계나 군대의 훈련강도와 전략전술에 대한 개념이 뒤떨어지는 과거에는 어땠을까요? 최소 수십년은 걸릴것입니다.

 

이렇게 볼때 판옥선과 판옥선을 이용한 전술체계라는 전략전 우위 기반이 있었기에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승승장구 할 수 있었겠죠. 물론 병기의 우월성도 중요하지만 그 운용하는 사람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은 원균의 칠천량 해전만 보아도 알 수 있죠.

 

이순신의 전법을 보고, 판옥선의 구조나 무기구성을 보았을 때, 판옥선의 운용전략은 화포라는 원거리 무기를 가지고 화망이 효율적으로 구성될 수 있는 진형을 짠 상태에서 적에게 공격을 하는 화력전을 기반으로 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적에게 일차로 타격을 주고 나서, 적에게 근접하여 화살과 그물을 퍼붓는 화공을 펼칩니다. 또는 화살을 쏘면서 진형을 유지하고 적의 옆구리로 돌격하여 당파(?)를 하여 침몰시키는 전술을 구사했겠죠. 이런 전술을 효과적으로 구사하려면 어느 규모 이상 대량의 판옥선을 가지고 운용을 하여야만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화포는 명중률이 극악했기 때문에 그렇죠. 그리고 바다의 특성상 배들이 밀집하였다 해도 서로간의 간격이 수십미터는 되었을 겁니다. 바닥에 콩을 흩어놓고 손으로 바늘 던져서 맞추는 것하고 비슷하다고 볼 수 있죠. 현대처럼 조준장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쏘기에 더욱 명중률은 떨어졌을 겁니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조선해군의 전략 자체는 단병접전을 그 기반으로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이때 서양은 어땠을 까요? 물론 대포의 운용은 13세기부터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해도 해전에선 소구경의 대포로 적들을 놀라게 하는 정도의 수준이었고 15세기 전까지는 돌격하여 단병접전을 주로하는 노젓는 갤리선이 가장 강력한 전함이었죠. 이러한 개념이 무너지고 거함대포를 중시하는 기풍은  에스파니아와 영국이 맞붙었던 시절 부터입니다. 이때가 1588년이니까 16세기말이죠.

 

포문의 구경이 작고 사정거리가 짧은 대포를 조금 가진 커다란 갤리선으로 구성된 에스파니아 무적함대와 해적선과 상선으로 구성되었지만 작고 기동성이 뛰어났으며, 상대적으로 사정거리가 긴 대포를 다수 가지고 있던 영국함대와의 결전으로 인하여 영국이 해상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유럽 각국이 갈레온선을 기반으로 대포를 많이 싣기 위해 배의 크기를 키우게 된 거죠. 이때가 17세기 이후의 상황입니다. 이때부터 2층 3층의 갑판을 가진 대형 범선이 생겨나기 시작했죠.

 

앞의 글에서도 썼지만 그렇기 때문에 당시만해도 유럽에 뒤떨어지지 않는 군사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셈입니다. 일본의 조총부대도 당시에는 최강의 군대였습니다. 3열횡대로 배열하여 앞열이 쏘고 물러나고 장전하는 동안 2열이 쏘고 물러나고 3열이 쏘는 전법이 일본에서 처음 나왔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이 조총부대를 양성해서 전국을 통일한 거죠.

 

님의 말씀대로 이후에 거의 기술적인 발전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위정자들의 기반 사상이 유교라서 기술을 천대하고 상업활동을 제한한 것이 그 원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주변 환경이 유럽과 같이 지속적으로 국가간의 전쟁과 각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본도 전국시대를 거쳐서 병기와 전술에 있어 상당한 발전을 거둔것과 마찬가지고, 삼국시대에 우수한 철기를 보유한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것도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시아권의 전반적인 기풍은 정신을 물질보다 우위에 놓은 것도 한 몫을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기술발전을 바라보아야지 무조건 서양에 뒤지니까 한심하다 바보다라는 식의 논리는 좀 우습더군요. 그리고 우리나라만 그랬던 것도 아니고 아시아 전반적으로 동일했습니다. 일본만 제외하고요. 일본도 미국이 먼저 강제개항을 하고 나서야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해서, 명치유신을 통해 부강해진 겁니다. 그들도 역사가 길지는 않죠. 다만 일본인들의 기풍이 실리적이기 때문이고 바다로 진출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이었죠.

 

각설하고 원균이 부산출정의 부당성을 알리기로 했던 것도 휘하 장수들의 의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했던 이억기의 경우, 황실의 종친이었습니다. 그리고 능력도 뛰어난 장수라고 알고 있죠. 원균에 뒤지지 않는 사람이었으나 당시에는 종친의 경우 견제를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원균이 그를 무시할 수도 없었죠. 종친이니까.. 그런 시각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과거의 사람을 현대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마십시오. 당시는 당시의 상황에 맞도록 보아야 합니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과 같은 경우도 가장 논란이 적은 사실을 기준으로 만든 겁니다. 사실일지는 누구도 모르는 겁니다. 당시를 살아보지 않은 이상...

 

한마디 더 하죠.

 제가 언제 해양대국 운운했다는 겁니까?

논점 흐리지 마세요. 님이 말씀하신 건 해양활동에 관심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다고 말한거지. 해양대국이었다 아니다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답글에서 분명히 조선시대 들어와서 해양활동이 위축되고 발전이 더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전까지는 분명히 해양활동을 했구요. 앞 글에서 얘기한 건 그런 예시였습니다. 엉뚱하게 밀어 붙이지 마세요.

벽란도 가 무엇인지 찾아보지도 않았나요? 왕이 그런명령을 내린 기록이라.. 하~ 대체 해양활동이 무엇을 말합니까? 막말로 님께서 태종때 쓰시마섬 정벌 어쩌고 했다면서요? 판옥선 개발해서..

본인이 얘기해 놓고 그런 기록이 있냐니, 모순도 그런 모순이 어딨습니까? ㅎㅎㅎ

섬 정벌하는 데 해군도 없이 한답니까? 그리고 배 개발하고는 왜한답니까?

 

그리고 앞에서 판옥선 이야기 하면서 소함주의와 대함주의 논쟁 이야기 잠깐 했으니 더이상 언급 하지는 않겠습니다.

 

님께서 예를 든 것 중에서 왜구이야기 말이죠.. 전국시대의 패잔병 얘기도 맞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지방영주들의 후원 아래서 영국의 사략함대 비슷하게 자신의 부와 세력을 키운 경우도 많습니다. 이건 아셨을라나~~? 그리고 전국시대라 외부와의 해양활동에 큰 신경을 안썼을 수도 있지만, 일본이 어디 통짜 한판의 땅입니까? 엄연히 4개의 큰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분명 해전도 있었습니다. 배가 발달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문화적 정신적 주변 환경의 측면을 생각하시기 바래요.

 

또 하나 바다로 둘러싸인 일본에서 조선 침략하려면 말타고 갑니까? 배타고 가나요?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얘기가 해전 얘기인데 이거 자체만으로도 그 증거 아닐까요?

 

장보고 시절이 통나무 배였겠다라... 아는거 없이 막 말하신다는 게 그대로 보이네요.

고등학교 역사책 보시라고 말은 했으니 간단하게 말하죠.

 

아래는 우리나라의 해양 고대사에 대한 자료를 퍼온 겁니다. 읽어보시고 말씀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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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선사시대부터 조선·항해술이 발달하였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나타나는 고래와 포경선을 보면 알 수 있다. 수 십 명의 어부를 태운 배가 여러 척 보인다. 이 바위그림은 신석기시대 말기로부터 청동기시대까지 장구한 세월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여기서 보이는 선박은 통나무선에서 다음 단계로 발전한 곤도라식 구조선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두 척의 배가 협동하여 거대한 고래를 공격하고 있다. 이것은 세계에 제일 오래된 ‘선단식’ 고래잡이 기록이고 울산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래잡이 기지였음을 알 수 있다. 태화강과 울산만 일대는 세계의 포경사에서 첫 장을 장식하는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경남 김해시, 부산 영도구 동삼동 등 1~2세기에 해당하는 유적에서 이미 고래뼈가 출토되고 있음을 보면 고래잡이가 보편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 들어와 고구려·백제·신라는 각기 조선·항해기술을 발전시켜 해양활동을 전개하였다. 삼국의 중국에 대한 견사활동, 무역활동 등은 항양선(먼바다를 항해하는 선박으로 다소 규모가 크고 강도가 높은 배)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특히 백제는 중국과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는데, 이것은 모두 해로를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조선·항해기술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발전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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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라나요? 그러면 예를 들어보죠. 왜 그때가 통나무배 어쩌고 하는게 우스운 건지요.

당나라 전이 한나라죠? 그리고 중간에 위촉오 삼국시대구요.

 

조조가 패했던 적벽대전때 배의 크기가 어떻게 묘사되며 군사수가 그 얼마일까요?

조조가 탄 대장함은 너무 커서 운행하다가 모래밭에 걸려 그걸 끌어내느라 수백마리의 말과 수천의 인원이 여러날에 거쳐 빼내었다는 표현도 있고, 수백명이 승선가능한 배라는 묘사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이런 배들을 이미 가지고 있었던 중국에 비해서도 해전에서 이기곤 했습니다.

이런게 장보고의 해상활동의 기반이 없었다는 말인가요? 통나무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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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년에 태자 법민은 병선 100척을 이끌고 덕물도에서 소정방을 맞고 있으며, 671년에 당나라 수송선 70여 척을 격파하고, 673년에는 철천 등을 보내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지키게 하였다. 675년에 문훈 등은 당나라 병선 40척을 빼앗았고, 676년에는 아찬 시득이 수군을 이끌고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설인귀와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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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만 하죠. 공부 좀 하세요~~~ 머리 속 이나 채우고 말씀하시죠.

대체 500년 쉬었다는 말은 어디서 어떻게 튀어나온 건지.

위에서 판옥선 얘기했죠? 2층구조의 배....... 그리고 조일전쟁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였습니다.

그리고 님이 말씀하셨던 네덜란드 전성기니 어쩌구는 그 이전입니다만, 중국의 누선이나 우리의 판옥선 처럼 다층구조의 배는 조일전쟁보다 이후에나 일반화 됩니다. 에스파니아하고 영국하고 싸운때가 언제라고요? 1588년이죠. 연도를 생각해 보세요. 대항해시대는 그보다 전인 15세기입니다. 콜럼버스의 항해는 1482년부터 1502년까지죠. 그런데 기록상 판옥선 등장한 때는 1557년 명종 12년입니다.

어디가 기술이 더 발전한 걸까요? 그리고 서양은 17세기에도 철갑선이란게 없었답니다.......

 

결론적으로 문명 사이의 비교는 님 처럼 단순비교를 해서는 안되는 겁니다. 누가 낫고 어쩌고.

계속 유럽의 범선 어쩌고 하는 것도 사대주의입니다. 서양의 것에는 사람들이 보통 거부감을 잘 가지지 않는데 그것도 큰 문제라고 봅니다.

 

어쨌든 지금 대한민국은 세계 수위의 조선기술을 가진 나라고 세계 선박운송 물동량 10위 안에 드는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그리고 과거의 역사를 발판 삼아 더욱 큰 발전을 이룩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추신 : 우리나라의 과거도 남들 못지 않았다는게 님은 그리도 배가 아프신가요? 아니면 반박을 위한 반박하느라 그러신 건지~~~

 사실 저도 여기에선 읽기만 하고 간단한 답글만 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이 아닌 것들을 사실처럼 쓰고 그러신걸 보고 조목조목 따져쓴 겁니다. 사실 어이가 없어서요.

 

아닌걸 바로잡으려고 한 거지만 님의 전반적인 이순신에 대한 평은 거의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이점은 알아주세요.  개인의 의견은 그 나름대로 존중받아야 하는 거니까요.

 

그래서 되도록 사실을 기재하려고 쓰기 전에 하루종일 자료조사도 했습니다. 이름도 실명 달고요. 날려먹어서 실제 분량은 그 반도 안되지마는 이렇게 두번째 글까지 쓰게해주셨네요.

저는 많은 공부가 되서 좋았습니다. 분석하다보니 새로운 것들을 많이 알게되고 생각하게 되었거든요.

 

그점은 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래에 님글 그대로 옮겼습니다. 비교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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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해전은 완벽한 승리요

그건 인정 합니다

하지만 왜국의 기록을 토대로 답변은 삼가 바랍니다

글구 조일전쟁이란 표현...

듣기 속이 매스꼽소...

내가 알기론 노량해전 이전에는 단병전은 없다고 알고 있소

 

원균...

엄연 임진왜란 3번째 공신으로 올라 있소

1번  권율

1번 이순신

1번 원균

 

어디서 술 마시고 도망치고..등등

어떤 기록엔 죽은 이 목을 짤라다 바치고 수군 통제사가 되었다 합디다

뮈~ 어디서 패허구 등등 댁이 주장하는 근거는 어느 소설책 애기로 알고 있소

한마디로 후대가 지어낸 애기지 기록은 없다 이거요

비교적 이순신 드라마가 다른 가정과 측면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런대로 정확하오

두ㅡ라마에도 당신의 주장과는 거리가 머오

 

그라고 곤장을 맞은 이유...

원균이 부산 출정을 미루다 끌려가 곤장을 받을줄 알고 있는데

제 말이 틀렸소

그도 부산 출정의 부당함을 조정에 알렸소

 

아마 당신의 주장을 뒤업는 내 애기가 맞을거요

그는 이순신과 대립하지 않았소

어디에도 이순신이 통제사 시절 그런 기록은 없소

그리고 그는 결코 도망 다니는 겁쟁이는 아니었소

좀 우직한 성격이라고는 할까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은 이러하오

본문대로 그는 최대한 부산 원정이 가능하도록 인근 포구에 정박했소

그러나 기습을 받은거지

 

글구 판옥선 문제...

내가 알기론 조선 태종때 쓰시마 원정을 걔획할 당시 구상된 배로 알고 있소이다

글구 자세히 내용을 안 읽어 오해는 있는것 같으나 서양 에서 처음으로 해상권을 잡은 나라는 네들란드져~

하두 오래 되어서 가물 거리지만 16c경이져

그때 해상권을 후려잡을수 있었던게 바로 범선 때문이 아니겠소

포르트칼, 스페인이 이어받고 그 다음 영국이 이어받구... 글쳐~

뮈~ 장보고등.. 애기 하시며 해양 대국을 부르 짖는데..

솔직히 우리나라가 해양에 신견 쓴적 있소

대답해 보시오

그 어떤 시기라도 왕이 그런 명령을 내린적..기록이 있나요

왜구의 예를 들지만

왜구란

그들의 오랜 전란으로 즉 패장병..

그들이 자국에서 먹을꼐 없자

배를 타고 다른 나라로 도둑질을 나간 거요

과연 그들이 선박 개발에 일조 했다고 보오

일본 또한 해양은 무시했던 나라요

 

장보고는 신라 시대요

아마 통나무 배에서 겨우 벗어난 그런 배의 구조를 갖고 있었겠지

조선조에 등한시 했을 뿐이라 하는데

우리나라 쇄국정책 10년 하는 통에 나라 뺏겼소

지금 현 상황에서 우리나라 1년만..

아니 서너달만 과학 기술 개발 안 한다면 아마 세계 최대 후진국이 되어 있을 거요

근데 500년동안을 잠시 쉰적 뿐이라고???
흠~ 댁의 애가ㅣ를 좀더 읽고 답글 달겠소...

다 까먹었네  무슨 애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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