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는 서울 남부에 위치한 제일 거리였다.
세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역전통과 시장통 김안과통으로 불리는 영등포는 환락과 네온의
도시였다.
주말이 되자 거리에 사람들이 어찌나 많이 쏟아져 나왔는지 발걸음을 딛기조차 힘들었다.
추림은 지금 이거리를 걸어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많은 곳을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선주의 부탁은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주는 추림보다 생일이 딱 일주일 늦었는데 추림은 지난주 일요일이 자신의 음력 생일
이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음력 12월 18일은 그의 생일이었다.
내일이 선주의 생일이었다. 자신의 생일과 그녀의 생일을 친구들과 같이 보내자고 초청한
것이다.
다음주가 구정이었다.
구정을 어찌 보낼까 떠올리며 추림은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다섯시 사십분.
한참이나 늦었지만 추림은 느긋하게 걸었다.
걸으며 주위를 두리번 거렸는데 그것은 지난주 이후부터 생겨난 버릇이었다.
혹여 이 많은 사람들 중 유미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헛된 생각때문이었지만 자신의 의지와
는 상관없이 이렇게 되곤했다.
지하철역을 비스듬이 가로질러 넓은 먹자골목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매우 익숙한 거리였지만 적응되지 않았다.
골목을 돌아 몇 걸음을 내딛을 때였다.
저 앞쪽에서 소란스런 인기척이 들리고 곧 여러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며 개중에는 비틀
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추림의 안색은 변함없이 무심하게 그곳을 곧바로 보며 걸었는데 바로 그곳이 약속 장소인
광장호프집이 자리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싸움이 난 것 같았다.
고함소리가 들리고 불안정한 움직임들이 휘청거렸다.
호기심이 동한 추림이 자세히 그곳을 바라보다가 눈을 치떴다.
베이지색 롱 코트를 걸치고 머리에 둥근 털 모자를 쓰고있는 여자가 보였는데 다름아닌
선주였다.
그녀의 왼손에 꽃다발 두개가 들려 있었고 어떤 남자에게 어깨부분을 붙잡힌 채 였다.
키가 작지 않은 선주를 남자가 거칠게 이리저리 휘젖자 선주가 저항했지만 사내의 힘을 당
해내지는 못했다. 물건 다루어지듯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담배를 던지고 곧장 걸어가며 한눈에 이곳에 기생하는 사내들임을 간파한 추림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긴장하거나 초조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오른쪽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어 지포 라이터를 힘있게 움켜쥐었다.
선주는 여전히 남자에게 잡힌 채였고 그녀의 일행인듯한 두명의 남자와 세명의 여자는
잔뜩 주눅들고 질린 얼굴을 하고 뭐라고 떠들고 있었다.
곧장 다가가자 모여있던 사내들이 바라보았다.
많아야 이십대 후반쯤 될 것 같았다. 그들은 다가오는 추림을 힘있게 얼굴을 구기고 위협
하는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어이! 너 그 손좀 놓지 않을래?"
추림이 그리 크지 않은 음성으로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한것은 선주였다.
"추림아......!"
눈물을 흘린듯한 흔적이 역력한 그녀의 얼굴을 보자 화가 치밀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추림에게 모아지고 모두의 얼굴에 두개의 의미를 담아냈다.
선주의 일행들은 안도하는 얼굴이었고 사내들은 비웃으며 코웃음을 쳤다.
"그 손 놓으라고 했는데... 넌 말을 잘 안듣는 놈이군!"
눈에 힘을 주고 매서운 얼굴을 지으며 다가서자 선주를 거칠게 다루고 있던 사내가 추춤거
렸다. 추림이 한 발 더 다가서자 그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손을 놓은 사내가 으르렁 거렸다.
"아쭈? 이 새끼! 넌 뭐야?"
"좀만한 게 어디서 깝쳐!"
서너개의 욕설이 터져 나왔지만 사내들이 담담하게 대응해오는 추림을 쉽사리 건들지는못
하고 조금씩 다가왔다.
"추림아! 흑흑......!"
선주가 자유롭게 되자 추림의 품으로 뛰어들며 소리내어 눈물을 쏟아냈다.
가만히 어깨를 다독거린 추림이 선주를 떼어 놓으며 말했다.
"좀 기다려라. 울음은 조금있다가 흘려라."
선주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부드럽게 말해주자 선주가 곧 있을 일을 깨닫고 하얗게
질리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버티고는 있었지만 두렵고 무서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추림은 혼자이고 저들은 일곱 명이
나 되었다.
선주가 추림이 한 발 뒤로 물러서자 친구들 중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너희들도 도와야 하지 않느냐는 얼굴을 하고 보았지만 친구 두명은 자신보다 더 두려워 했
고 얼어 있었다.
추림이 비웃음을 흘리고 있는 사내들을 살펴보았다.
이런 경험은 지긋하게 많았다. 나이와는 무관하게 살아온 덕에 이런 일이 그다지 낯설지도
않았고 두렵지도 않았다. 단지 귀찮고 걱정스러운 것이다.
일곱명 중, 두명만이 어느정도 힘을 제대로 쓸 것이다.
나머지 다섯명은 나이도 그다지 많지 않았고 경험도 별로 없을 것 같았다.
이들은 영등포의 전문 호객꾼인, 일명 삐끼들이었는데 그들을 관리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
다. 추림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잘 알고 있었다. 건달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 열에 여덟은
비굴하고 나약한 떡건달일 뿐이다. 겉모양만 건달인 것이다.
서너발을 내딛어 이들 중 어깨가 가장 넓고 키는 추림보다 약간 큰 검은 가죽 점퍼 사내에
게 다가갔다.
"이새끼가 좀 까부는데? 한번 해보자고?"
"형 그새끼 씹어 버립시다!"
추림이 우습게 보인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추림은 싱겁게 끝날것을 예감했다. 이 놈들 중 가장 강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이놈은
벌써 얼굴이 얼어 있었다. 추림의 거침없는 행동과 매서운 눈에 기가 걲인 것이다.
"너만 죽이겠다! 정말 죽일거야. 그리고 늑대에게 널 끌고가지."
추림이 느긋하게 다가가며 말하자 놈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늑대는 영등포 삐끼들의 왕쯤 되는 자였는데 추림과는 안면이 있었다.
갑자기 가죽점퍼의 정면으로 빠르게 움직인 추림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쉬아악!
추림의 오른 다리가 허공에 반원을 그리며 춤을 추었다.
"......!"
"......?"
놈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나머지 놈들이 그대로 굳어졌다.
추림의 다리가 허공을 가로질러 놈의 면상으로 날아가 바로 턱 밑에서 딱 멈추었는데
기습으로 허를 찌르고 가장 화려한 기술을 이용하고 선보여 노림수를 쓴것이다.
기가 막힌 동작에 놈들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시커멓게 변했다.
가죽점퍼놈의 얼굴이 부들거리며 떨렸고 추림의 다리는 여전히 허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오른다리를 허공으로 쭉 뻗어 가죽점퍼의 턱밑에 고정시킨 자세가 완벽에 가까웠다.
마치 체조선수나 발레하는 이의 동작같았다. 하지만 그 다리에 맞으면 어디가 부서지거
거나 부러진다. 추림은 초등학교 때 부터 택견을 익혔고 고등학교때는 해병 특수수색대
출신인 사촌 형님에게 특공무술을 지도 받은 것이다. 사회에 나온 후 그 견고함은 더 다
듬어져 이제는 다른 형태의 움직임을 만들수도 있었다.
"계속 해 볼테냐? 가서 늑대에게 전해라 성주친구 추림이 다녀갔다고."
성주는 그의 사회 친구였다. 네살 차이를 극복하고 친구가 된 김성주는 어릴때 부터 소년
원과 감방을 들락거린 놈이었다. 김성주는 이곳 역전통에서 알아주는 건달로 통하고 있었
는데 늑대 김봉식과는 호형호재 하는 사이였다.
이미 기세가 걲인 놈들은 주눅이 들어 질린얼굴로 추림을 눈치보고 있었다.
"저기... 성주형님하고 진짜 친구세요?"
가죽 점퍼가 떨리는 음성으로 묻자 추림이 피식하고 웃었다.
"가서 물어봐라. 세상에사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
당연히 추림이라고 할 것이었다.
삼년 전, 추림이 사회에 처음 나왔을 때 우연히 알게 된 친구였다. 어릴적부터 고아원과
감방을 제 집 드나들듯 했는데 놈은 지금 고아였다.
성주는 추림에게 죽기직전까지 얻어 맞았다. 여자를 강제로 욕 보이려다가 추림에게 걸
리고 생긴 일이었다. 당시 김성주는 추림에게 무릎을 꿇고 빌고서야 벗어났다.
선주와 그의 친구들의 얼굴은 놀라고 눈이 흡떠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본 표정
들이었다.
선주의 표정이 봄 눈 녹듯이 풀리며 의기양양한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너! 이리와라."
추림이 한 사내를 불렀다. 조금 전, 선주를 거칠게 잡고 다루던 사내였다.
"......?"
이미 형님이 당하는 것을 보고 늑대와 성주를 언급하던 것을 보아서 놈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추춤 거리고 놈이 다가서자 추림의 오른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놈의 면상으로 그대로 꼿
혔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놈이 거칠게 바닥으로 나가 떨어졌다.
"넌 굉장히 치사하고 나쁜 새끼다. 다음에 집에 가거든 니 엄마와 누나들도 그렇게 다루어
보거라. 일어나라! 한대만 더 버텨라!"
한 주먹에 길바닥에 쳐박힌 놈이 엉금엉금 기자 추림이 다가가 일으켜 세웠다.
"여자를 때릴때는 바로 죽일 때 뿐이다. 그외에 여자를 때리는 놈은 사내가 아닌것이다."
"크헉......!"
추림에게 가슴팍을 잡힌 채 고스란히 추림의 주먹을 받은 놈이 억눌린 신음을 토하며 고개
를 옆으로 떨구었다.
주위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여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세상에 어느 미친놈이 서울의 삼대 환락가중 한곳인 영등포에 들어와서 새끼 건달들을 건
드리는지 구경거리가 생긴 것이다.
절반은 손님과 상가 사람이었고 절반이 삐끼나 건달들이었는데 그들은 감히 나서지 못했다.
추림이 한 말이 그들을 두렵고 망설이게 한 것이다.
늑대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호남 출신인 그는 영남 출신이 대부분인 영등포에서 당당
히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밥줄을 확보한 입지 전적의 존재였다.
나이 열 서너살때 부터 영등포에서 꼬마 삐끼질과 건달로 자랐고 무수한 싸움과 피를 흘리
고 나서 지금의 자리를 잡은 자였다.
나이가 막 사십에 다다랐지만 그는 아직도 한창 나이였다.
추림과는 성주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추림은 그를 한번도 형님이라 부르지 않았다.
'지랄같군!'
놈들을 돌려보내고 사람들이 한참을 지켜보다가 느릿하게 흩어지고 나서야 추림과 선주등
은 자유로울수가 있었다.
"미안해... 자꾸 자기네 가게로 오라고 해서 거칠게 말했는데... 그만 그것이......"
선주가 조금 편해진 얼굴로 추림에게 다가와 말하자 추림은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철없는 이 친구들은 부모의 덕만 보며 자랐기에 이런 삶과는 무관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일과 엮이면 나약한 꽃으로 변하는 것이다. 추림이 없었어도 큰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만 그건 모를 일이다.
"아는구나? 됐다. 그만 가자. 이곳말고 다른곳이 좋겠다."
추림이 선주에게 말하고 친구들을 살펴보자 두명의 덩치 큰 남자들은 부끄럽고 민망한 얼
굴이었고 세명이 여자들은 얼굴이 붉어진 채 추림을 바라보았다.
저 두놈은 아마 지금 굉장히 부끄럽고 창피할 것이다.
추림보다 키도 덩치도 큰 놈들이 한 것은 뒤로 숨어 벌벌 떤 것이 고작이었다.
속으로 한숨을 내 쉰 추림은 어디가 좋을까하는 생각을 떠올리며 골목을 곧장 벗어났다.
선주가 다가와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으며 팔짱을 끼고 베시시 웃었다.
선주는 아마 이곳에 오는 동안 별별 이야기를 다했을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런 일이
벌어져 기분은 한껏 들떠 있을 것이다.
"추림. 굉장했어! 저번에 대준오빠가 그러는데 추림이 무척 무서운 사람이라고 했을 때 안
믿었는데... 너무 멋있었어. 히히... 나 생일 축하한다고 말 안해줘?"
추림은 풀썩 웃으며 선주를 비스듬이 바라보았다.
선주 이놈은 넉살과 애교가 정말 타고난 여자였다.
"생일 축하한다. 이건 선물이다. 집에 가서 봐라."
추림이 점퍼 안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건넸다.
"와......! 고마워. 이거 뭐야? 지금볼래."
"집에 가서봐! 귀고리다. 너안테 처음 해보는 건데... 그리 비싸지는 않다."
감동했는지 선주가 까치발을 하고 추림의 볼에 기습키스를 했다.
"사람들이 본다. 이러면 안되는거 알면서... 나 그냥 간다."
"헤... 이미 했는걸? 오늘 너무 기분 좋다. 아무래도 하느님이 이렇게 좋으라고 아까같은
일을 당하게 하셨나보다."
선주의 친구들이 조용히 뒤에서 따라오며 선주의 그런 행동을 믿을 수 없다고 수근거렸다.
대학교들어서 알게 된 친구지만 절대 저런 모습과는 거리가 먼 선주였는데 지금 그들이 보
고 있는것이 사실인지 의심스러운 것이다.
영등포 중심가에서 한참을 벗어나 물레동 근방까지 추림이 안내하고 보스클럽이라는 술집
을 정해 들어갔다.
준비한 케잌을 자르고 노래를 부르며 선주의 생일을 축하하고 추림의 생일도 이어서 축복
하는 시간을 가졌다.
보스는 넓고 쾌적한 유럽형 주점이었는데 모든게 다 마음에 들었지만 술값이 비싸다는게
부담이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고 돈 걱정 할 만큼 이
들이 가난한 대학생은 아니었다.
술은 위스키 위주로 시켰다. 독한 술을 좋아한 추림은 보드카를 마셔보기로 했고 나머지는
포도주와 샴페인 그리고 JNB를 주문했다.
홀 안에 낮게 섹스폰 연주가 흘렀다. 연주자는 요즘 한창 인기있는 케니지였다.
술과 안주로 저녁을 때운 일행들이 왁자하게 떠들때 옆자리에 찰싹 달라붙은 선주가 추림
의 가슴으로 기대왔다.
"너 자꾸 이러면 혼난다? 나 지금 시험 하는거지?"
"나 오늘 자고 갈꺼야. 허락도 받았어. 괜찮지?"
촉촉하게 젖은 선주의 눈빛이 부담스러워진 추림은 길게 숨을 들이켰다.
"언제 니가 허락을 받았니?"
"아니? 그건 아니지... 난 사실 오늘 너랑 둘이 있고 싶었는데... 핑계대느냐고 친구들을 부
를 수밖에 없었어. 추림아 나 오늘 너안테 하고 싶은 이야기 있는데... 들어 줄거지?"
추림은 선주의 말에 평소와는 다른 무언가를 예감하고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쓴 웃음을 지
었다.
자신이 비록 선주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어도 선주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막거나 거부 할
권리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지켜볼 작정이었다.
"그렇게 말하니까 겁나잖아."
추림에거 거의 안기다 시피한 자세로 선주가 가슴팍에 얼굴을 대고 추림을 올려다 보았다.
추림은 묘한 기분이 되자 선주의 이마를 주먹으로 콕하고 내리쳤다.
"요 녀석이! 자꾸 이러면 볼기작 때려준다? 똑바로 앉아."
"싫어. 그냥 이대로 있어주면 안돼? 생일 선물이라고 해줘 응?"
선주의 그런 모습을 보고 추림은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 보다가 유미를 떠올렸다.
만약 선주가 유미라면... 자신은 아마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어 있을것이라는 생
각을 했다. 역시 전화번호라도 알아둘것을 잘못했다. 지난주에 그렇게 아프고 이틀만에 출
근하고 일주일 내내 그녀가 떠올랐다.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정말 힘든 시간이었다.
'뭘 하고 있을까! 잘 지내고 있을까? 보고싶은데.....'
속으로 유미를 그린 추림은 선주의 움직임에 생각에서 벗어났다.
자신을 뻔히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를 보자 미안해진 추림이 선주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
어 주며 말했다.
"넌 그냥 내 동생 아니면 친구해라. 그러면 안돼니?"
그러자 추림의 품에서 벗어난 선주가 샐죽한 표정을 지었다.
"절대 싫거든! 차라리 안본다고 해! 아직 명확한 결정은 아니잖아 너는."
"선주야 그런뜻이 아니잖아? 난 널 친구로 넌 날 다르게 생각하면 힘들어져."
"그럼 그러든가! 나혼자 좋아하고 까불께. 됐지?"
이 놈은 너무 낙천적이다. 매사를 힘들거나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않아서 자신을 혼자 좋아
하며 수십년쯤을 보낼수도 있을 여자였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께."
선주가 추림과 친구들을 번갈아 보며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저만치 걸어갔다.
한숨을 내 쉰 추림이 생소한 맛이 나는 보드카 앱솔루트를 입안에 털어넣었다.
"저기요? 잠깐 이야기 할 수 있어요?"
미지근한 술이어서 더 쓰게 느껴진 술맛에 콜라를 홀작일 때 선주의 친구 중 한명이 말을
건네 왔는데 소개할 때 오지선이라고 밝힌 친구였다.
선주와 가장 먼저 친해졌고 오래된 친구 관계인 그녀는 눈이 유난히도 크고 코가 무척 오똑
해서 서구형 여성의 이미지를 지닌 여자였다.
'또 뭐야? 피곤해 죽겠는데.'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추림은 오지선에게 시선을 주며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11장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