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열하게 사랑하고픈
10월 10일 월요일입니다.
그런데.... 열열한 사랑을 받아줄 상대가 없네요.
굶주린 공돌이 한 마리 구제하실 분....
01X- XXX- XXXX......
쿨럭.
======================== 뼈가 바스러지게 봉사해드립니다 ====================
귓가를 스치는 쌀쌀한 바람이
한곳만 피해가는 것 같은 미미한 촉감이 남아있는 뺨.
얼얼한 느낌에 손으로 만져보려 해도
그 촉감이 지워질까 무서워 선뜻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지금 그녀가 나에게.....
그.... 뭐랄까.... 아빠가 출근할 때 하고 엄마가 안아줄 때 하는
그 행동을 한 건가?
지금 내가 술에 취해서
혼자 중대한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건 아닐까?
그녀가 내 볼에.....
=두근두근두근....=
너무 놀라서 잠시 기절했었는지
이제야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심장.
순식간에 무서운 기세로 치솟은 혈압은
알콜의 잔존세력과 결탁하여
안면적화(顔面赤化)의 대의를 내걸고 봉기하였다.
알콜-혈압 연합전선의 무차별 공격에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달아오른 얼굴은
그 열기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다.
어떻게 수습해야할지 감도 잡을 수 없는
부끄러움과 놀라움.
이대로 있다간 자연발화라도 일어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가슴은 뜨겁게 요동치고 있었다.
기억 - 후우, 후우, 후우.....
난 또다시 호흡곤란으로 기절할 것 같은 압박감에
주부클리닉에서 언뜻 봤던 호흡법으로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기억 - 하아... 좋아, 워어 워어~.
과연 충분한 산소공급이 뇌세포 활성화에 도움이 되었는지
어느 정도 정상화 된 사고 시스템.
난 손바닥으로 뺨을 두어번 두드린 뒤
마지막으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제..... 자리로 돌아가야겠지?
안에 있을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쑥스러운 얼굴로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있을까?
수줍은 표정으로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려 줄까?
아니면..... 아니면....
그렇게 점점 대담한 상황까지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 봤을 땐
허씨가 졸린 듯한 표정으로 계단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씨 - .... 참 오래도 걸리는구나.
기억 - ...뭐가?
허씨
- 일어서면 놀리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무슨 감상이 그렇게 긴 거야?
떨떠름하니 심각한 표정으로
엉덩이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난 허씨는
허리를 좌우로 틀며 굳은 몸을 푼 뒤
호들갑스럽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허씨
- 얼레리 꼴레리~~ 얼레리~꼴레리~
기억이랑~ 공주님이랑~ 뽀뽀했데요~~ 뽀뽀 했데요~
나는 다 봤지~ 나는 다 봤지~
얼레리 꼴레리~ 얼레리 꼴레리~
난 순간 정신이 띵해질 정도로 당황했지만
여기서 동요해버리면 사태가 더욱 커질 수 있었기에
최대한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비웃듯 대꾸했다.
기억 - ....... 애냐? 그런 걸로 놀리게?
내가 태연하게 그를 지나쳐 올라가자
당황한 허씨는 한참을 벙찐 얼굴로 서 있다가
풀이 죽은 모습으로 뒤를 따라왔다.
하아.... 잘했다, 기억아.
가게 안으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 사이에 있는 그녀와 잠깐 눈을 마주쳤다.
나를 보고 싱긋 웃음을 지어보이는 그녀.
난 살짝 고개를 끄덕여 답한 뒤
입구 근처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한편, 시무룩한 얼굴로 김씨 옆자리로 돌아간 허씨.
그런 그를 보며 김씨는 무슨 일이냐며 물었고
둘 사이에 잠시 짧은 대화가 오갔다.
그리고 갑자기 튀어나온 비명 같은 김씨의 목소리.
김씨 - 지인짜아?!
허씨 - ....그렇다니까.
김씨 - 그런 거야? 사실이야?
허씨 - 응. 내가 똑똑히 봤다니까.
.....일 났다.
일순간 두 사람에게 집중되는 시선.
민아의 얼굴에도 당혹한 기색이 역력히 나타났다.
김씨 - 야, 씨. 그런 일이 있으면 빨리 놀려야지!
허씨
- 아니... 기다리고 있다가 놀렸는데....
그냥 시큰둥하니 별 반응이 없어서...
김씨
- 바부팅! 이런 데서 놀려야 효과가 있지!
빨랑 다시 놀려!
얼레리 꼴레리~!! 얼레리 꼴레리~!!
기억이랑~ 민아~랑~ 뽀뽀 했데요~!! 뽀뽀 했데요~!!
얼레리 꼴레리~!! 기억이랑~ 민아랑~ 얼레리 꼴레리~!!
썩을 놈의 자식들....
다음날.
난 연습실에서 조금 떨어진 잔디밭에서
햇빛이 따듯하게 비치는 곳을 찾아
신문지를 몇 장 깔고 앉아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대체 무슨 얼굴로 연습실에 나간단 말인가?
술자리가 마무리 되는 그 순간까지
차마 자리를 떠나지도 못하고
=이미 뽀뽀했는데 한 번 봐주시죠.=
=이미 뽀록났는데 한 번 더 하시죠.=
같은 말을 들으며 버텨야 했던 나와 민아.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같이 웃고 맞장구까지 쳤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그 생각들이 폐에 와서 쌓이는지
한숨만 푹푹 새어나왔다.
기억 - 에휴....
생각한다고 별다른 해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고
연습시각까진 아직 시간이 좀 남아있었기에
난 벌렁 자리에 드러누워 버렸다.
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이로써 나와 그녀는...
주변으로부터 공인받은....
커....커....... 크흠,
아무튼 친밀한 사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모든 게 잘 되어가고 있다.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다.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자니
바람도, 햇살도 그렇게 상쾌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이거.. 까딱하면 잠들겠는데?
........
응? 진짜 잠들었었나?
남 - 저기 가서 앉을까?
여 - 그냥 이리 와. 그쪽에 이상한 사람 있잖아.
남 - 응? 어이구, 깜짝이야. 노숙잔가?
..... 노숙자? 어디? 이 근처 같은데?
어느 커플의 목소리에 잠을 깨어
주변을 좀 살펴보려 고개를 돌렸을 때
내 시선을 가리고 있는 회색 종이쪼가리들이 보였다.
뭐..뭐야 이게?
=버스럭 버스럭...=
그 종이조각들의 정체는
내가 바닥에 깔고 앉았던 신문조각들.
아무리 햇빛이 잘 든다 해도 날이 쌀쌀하다보니
잠결에 끌어다 덮었나보다.
여 - 아이, 깼잖아. 빨랑 이리 와.
남 - 어....? 어.
......노숙자란 날 두고 하는 말이었나.
주섬주섬 내 쓰린 과거의 흔적들을 수습한 뒤
어디로건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에
연극부 연습실로 들어선 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연습시간이 제법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평소보다 눈에 띈 건
간만에 그 모습을 드러낸 안군 정도일까.
연출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그는
문이 닫히는 소리에 내 쪽을 돌아보곤 손을 흔들었다.
안군 - 어, 기억이 왔구나.
회계 - 지각이다~.
연출 - 이미 들어왔는데 한 번 봐주시죠?
....아직도 그 짓이냐.
그 때,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안군이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안군
- 그런데, 아까부터 계속 나오는
그... =뭐 했는데 한 번 봐주시죠?= 그건
무슨 유행어 같은 겁니까?
연출
- 아~ 맞다. 넌 경찰서 안 갔으니까 모르겠구나.
그게 또 설명하자면 좀 긴데....
그것보다 더 엄청난 일도 있었지.
잠시 뜸을 들이듯 느물느물한 웃음을 지으며
날 바라보는 연출.
그는 별 생각 없이 꺼낸 말이겠지만
안군에겐 그리 알리고 싶은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그의 말을 막을까 고심하고 있을 때
때마침 박군일당이 시끌벅적하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박군 - 어? 안군선배 오랜만이네요!
안군
- 아~ 너 경찰서 잡혀갔었다는 소리 듣고
반가워서 한 번 와봤다.
안군은 박군이 대꾸하길 기다렸지만
그는 이내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안군.... 씹혔다.
박군
- 아! 기억아, 나 오늘 너랑 똑같이 생긴 사람 봤다?
어깨, 덩치. 너네도 봤지? 똑같았지?
어깨 - 응, 진짜 똑같더라.
기억 - 음... 신기한 일이네.
아무래도 찔리는 구석이 있었던 난
로프반동으로 튕겨오는 상대를 부드럽게 바디슬램하듯
적당히 말을 넘겨버리려 했지만
이미 흥분상태에 있던 박군 일당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박군
- 그것도 바로 요 앞 잔디밭에서 봤다니까!
지대 불쌍해 보이는 자세로 신문지 덮고 자는데
아무래도 노숙자 아니면 살짝 미친 것 같더라.
기억 - 그....그래?
박군
- 핫핫, 너무 심각하겐 생각하지 말고~.
그냥 닮았다는 것뿐이니까~.
...........그게 나였다 이놈아.
그럭저럭 별 탈 없이
이야기가 마무리 되어 안심하고 있을 때
등 뒤에 서있던 연출이 날 불렀다.
연출 - 응? 기억아 잠깐만 이리 와봐라.
기억 - 예?
연출 - 바지 뒤에 붙은 게 뭐냐?
기억 - ....뭐가요?
연출 - 좀 돌아 봐봐. 이쪽에....
그리고 이내 그의 손에 잡혀 나온 신문지 조각.
=쇼킹! 강남 나이트 천태만상!= 이라는
타이틀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큼직한 종이 쪼가리가 뒷주머니 틈에 끼어있었던 것이다.
연출 - 응? 웬 신문지? 게다가 지푸라기도 몇 가닥.....
박군 - 그럼 설마 아까 본 게....
...... 제대로 걸렸다.
이후.....사람들이 한 명 들어올 때마다
연출과 사람들은 그 때 상황을 떠들기에 바빴고
=노숙자 사건=은 =봐주시죠.= 사건과 더불어
연극부의 1면 뉴스로 떠올랐다.
왜 자꾸 일이 꼬이기만 하는 걸까....
박군
- 진짜, 1%도 뻥 안 치고 딱 이 자세.
신문지 덥고 막 바시락 거리면서 자는데
진짜 기억이가 그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니까요~.
사람들 - 푸핫핫!!
이젠 현장재현까지 해대는 박군 일당의 입담에
증거물 1호인 강남나이트 기사 조각은
경매라도 붙을 기세로 사람들의 손을 오갔다.
아무래도 잠깐 자리를 피해있던가 해야지...
뻘쭘하게 앉아있기 지쳐버린 난
출입문 쪽으로 걸어가 문손잡이를 돌렸다.
평소보다 너무 문이 쉽게 열린다고 생각한 순간
문 사이로 보이는 사람의 모습.
민아 - ......
문 맞은편엔 반대쪽 손잡이를 잡고 있는
그녀가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