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편
“으아아아아악~!”
떠지지 않은 눈을 힘겹게 떴을 때, 바로 내 눈앞에 버티고 서 있는 얼굴.
놀람으로 심장이 발칵함과 동시에 내 입에선 새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나를 놀라게 한 얼굴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바로 침대 모퉁이 말이다. 태미였다..
“야, 놀랬잖아!!”
“오호~ 이화봉..
여태껏 너 간호하느라 고생한 소중한 친구를 괴물 보듯이 본 것도 모자라서 놀라게 했다고 큰 소리까지 치시네~
세상에..그 소중한 태윤 오빠 약속도 취소하고 하루 조일 잠만 자는 지 간호해줬더니, 고작 한다는 말이 뭐? 놀랬잖아?”
태미의 말에 그제서야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내 집이 아니란 걸 알았다.
“어? 내가 왜 니네 집에 와 있지?”
“그 몸에 어떻게 영양실조야? 응? 스트레스성에 영양실조래잖아~
내 참 기가 막혀서.. 너 기절해가지고 내가 얼마나 놀랬는지 알아?
난 너 죽는 줄 알았단 말야~!!!”
이번엔 태미가 바락 소리를 질렀다.
태미 표정 보니 지금 내가 놀란 것만큼 꽤나 놀란 듯 했다.
하긴... 나같아도 내 덩치가 기절하면 놀랐을 것이다.
그것도 굉장히..
“아...그렇구나. 이제 좀 생각난다.”
“이제 좀 생각 난다?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그리고 태윤 오빠가 너 업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태윤 오빠가? 그 오빠가 날 업었다구?”
태윤 오빤 우리보다 두 살 많은 태미네 친척 오빠이다.
계속 해외에 살다가 한국에 온지 한달도 채 안되었다.
비슷한 또래에 젊은 청춘 남녀이다보니 금새 친척이고 뭐고 굉장히 서로를 맘에 들어하고 있었다.
물론 내가 보기에 그다지 오래 갈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럼 어떻게.. 병원 들렸다가 너 링겔 맞히고 우리 집 데려온 거야.. 어떻게 한번도 안 깨?”
“아...진짜 잠이 많이 왔었나봐..”
멋쩍은 내 웃음에 태미의 심기가 상당히 불편했나보다.
“그리고 화봉이 너, 나한테 찔리는 거 없어? 그것도 엄청나게 찔리는 거.”
“찔리는 거? 잘 모르겠는데. 나 너한테 그런 거 없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그래? 그럼 이거는 뭔데?”
태미가 내 앞에 불쑥 내미는 것은 다름아닌 핸드폰이었다.
“이런 거 있음 당연히 나한테 말해줘야 되는 거 아냐? 핸폰 죽어도 안산다며..낭비라며!
이렇게 좋은 거 있으면서 나한테 말도 안하구..정말 널 베스트 프랜드로 생각한 난..”
나는 태미가 내민 핸드폰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나한테 무슨 핸드폰? 난 그런 거 안 키?
...가비!! 가비!!
그제서야 생각 난 가비.
태미의 손에서 잽싸게 핸드폰을 낚아챘다.
“태미야, 오해하지 마. 이거 내 핸드폰 아냐.. 진짜 내가 핸드폰 안산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럼 그건 뭔데?”
“..친구...친구 핸드폰이야.”
“친구? 친구 누구? 내가 모르는 친구도 있어?”
“...그냥.. 태미야, 나중에 다 말해줄 테니까 지금은 묻지 말아줄래?”
얼굴 가득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는 태미였지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태미에게 고마웠다.
정신을 잃기 전 어렴풋이 보았던 두글자가 생각났다.
..미안..
그 다음에 무슨 말이 있을까..
떨리는 손길로 핸드폰 문자를 확인했다.
그런데......정말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정말 미안..이라는 말 뒤에는 어떠한 말도 없었다.
미안이라는 두 글자만이 썰렁하게 핸드폰 액정에 떠 있었던 것이다.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오늘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무슨 생각해?”
“어? 어... 그냥. 태미야, 지금 몇 시야?”
“지금? 11시.”
“그것밖에 안됐어?
“그것밖에라니? 밤 11시면 너 몇시간 잤는지 알아?”
“아침 11시가 아니고 밤 11시란 말이었어?”
“응..”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화봉아, 왜 그래?”
“집에 가야지..”
“너무 늦었잖아.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가.”
“아니야, 그래도 집에 가야지.
태미야, 정말 고마워. 정말 너밖에 없다.”
“그걸 이제 알았어? 알았음 자고 내일 가.”
“태미야..”
“자고 가라고! 그 몸으로 어디 가려고! 집에 가봤자 아무도 없잖아.”
“아니야, 그래도 집에 갈래. 니네 집에 있어도 어차피 잠 밖에 안 잘건데 뭐..”
“그래도 자고 가라구!”
“충분히 많이 잤어. 아무도 없어도 내 집은 내 집이야.
아무도 없는 집 나라도 가야지..”
“야, 화봉이 너 진짜 그럴 거야? 내일 아침에 가도 상관없잖아..”
“그냥 가야 될 것 같아. 아무래도 난 침대 체질이 아닌가봐.”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가는데, 태미가 내 팔을 잡았다.
“그럼 죽이라도 먹고 가, 이 바보야. 하루 종일 밥도 안 먹었으면서.
너 일어나면 주려고 죽 끓여놨단 말야.”
“진짜 괜찮아. 배고프지도 않구..”
“잠을 자고 가던지, 죽 먹고 가던지 둘 중에 결정해! 난 몰라!”
더 이상은 양보안할 것 같은 태미의 표정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와 버렸다.
아무 것도 해 준 게 없는, 해 줄 수도 없는 나에게 태미는 왜 저렇게 잘해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태미가 끓인 죽 먹고 싶어..”
그렇게 넘어가지도 않은 죽을 다 먹고 겨우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물론 태미는 또 태윤 오빨 불러서 날 집 앞까지 태워다줬지만 말이다.
“내일 다시 올 거야. 그렇게 알아..”
“왜 와? 안와도 돼..”
“시끄러워! 내가 온다면 온다는 줄 알아!
내일 아침에 내가 도시락 싸올테니까 밥 먹지 마, 알았어?”
“안 그래도 돼. 나 이제 정말 괜찮다니까.”
“내가 온다면 온다는 줄 알아.”
남은 죽까지 기어코 싸서 내 손에 들려준 채, 태미는 다시 태윤 오빠 차를 타고 갔다.
태미가 탄 차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태미마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방문 키를 찾으며 방문 쪽으로 걸어가는데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길다란 무언가가 보였다.
혹시나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그 검은 물체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희미한 술냄새가 났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베이비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그런데..그런데 베이비의 풍성한 머리가 아니었다!
베이비의 귀여움을 더해주면서 풍성했던 파마 머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차분하게 쭈욱쭈욱 매직한 듯이 펴져 있는 단정한 머리가 베이비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물론 쭈욱 뻗은 머리도 어울렸지만, 그래도 아무래도 파마 머리가 귀여웠었는데..
머리는 왜 폈을까.
아아..이럴 때가 아니구나..
베이비를 흔들어 깨웠다.
“베이비..야, 베이비 일어나. 왜 또 여기서 자고 있어?”
내가 자꾸 흔들어 깨우자 베이비의 감긴 눈이 게슴츠레 열렸다.
몽롱한 눈동자가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뚱때이...뚜땡이..”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베이비는 혀까지 꼬여 있었다.
술 잘 먹는 베이비가 이 정도로 취한 거면..도대체 얼마나 먹었길래..
“그래, 나 뚱땡이 맞아. 술은 도대체 어디서 그렇게 많이 먹고 온 거야?
얼른 일어나.. 일어나서 집에 가라구..”
내 말은 들리지도 않나보다.
몽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베이비, 두 손을 뻗어 갑자기 내 볼딱지를 잡고 쭈욱 늘어뜨렸다.
“뭐하는 거야!”
“나..뚜...나뚜우우우우우웅~!!!!”
베이비가 인상을 파악 찌푸리더니 갑자기 알 수 없는 소리를 꽥 지르더니만 내 앞으로 갑자기 고개를 떨구었다.
나뚜? 그게 뭐야? 나이트 갔다 왔다는 말이야,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