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살 더 먹으면, 두 살 더 내려가는 마음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쓱 거울에 스친 내 얼굴모습에 깜작 놀랐다. 어? 이상한데...... 별안간 눈과, 코, 입이 아래로 밀려 내려간 것 같다. 자세히 거울에 비쳐보자 정말 눈썹부터 시작하여 그 아래의 모양새가 턱 쪽으로 조금 몰려간 것이다. 참 황당하다. 얼굴도 이동하나? 코를 찡긋하며 입술을 삐죽 내미니 조금만 더 아래로 밀려 내려가면 눈, 코, 입이 한꺼번에 턱에 매달릴 판이다. 그런 상태로 양치질하면 칫솔이 턱에 꽂혀서 치카치카 하겠는데, 하얀 세면대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대머리의 징조일까, 이마가 넓어졌다. 염색한지도 오래 되어서 앞머리도 희끗희끗하다.
경제학자이며 부총리까지 지낸 조순박사가 이십여 년 전에 가끔 매스컴을 탄 때가 있었다. 젊었을 때에 그분의 명저인 경제학원론을 공부했고, 가끔 신문에 싣는 논설에 드러난 해박한 동양철학지식에 감탄한지라, 잘 생긴 그 분의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곤 했었다. 나이에 걸맞아 떨어지는 하얀 눈썹과 흰머리는 일품이었기에 주변에서는 산신령부총리로 통했던 분이다. 얼굴은 심상을 드러낸다. 일생이 그려진 환갑을 지난 얼굴은 더욱 그렇다.
조순박사가 부총리시절에 경제사절단을 끌고 중국에 간 적이 있었다. 만찬회장에서 잘 생긴 그 분의 얼굴에 반하여 중국 측 대표단에 끼어있던 삼십대의 젊은 여자가 춤을 같이 추자고 청했었다. 조순박사는 정중히 거절하며 대신에 한국 측 대표단에 끼어있던 젊은 직원을 추천하였다. 그 일을 나중에 이렇게 술회했다. “젊고 예쁜 여자의 애틋한 순정을 거절하여 그 미안함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노년이 젊음을 희롱하면 결례가 되겠기에 그 나이에 맞는 사람을 추천했으니, 나 역시도 섭섭하기 그지없었다.” 조순박사는 자기 얼굴모습 그대로를 말한 것이었다.
나이는 지키기가 힘들다. 어쩌다가 누구에게 나이값이나 하라는 핀잔을 들으면 죽을 맛이다. 늙은이답게 행동하라는 말인데, 이상하게 갈수록 마음이 어려져가기 때문이다. 한 살을 더 먹으면 마음은 두 살이 더 어려지는 느낌이다. 만약 내가 조순박사의 입장이었다면 젊은 여자의 제의를 거절하기는커녕, 침을 질질 흘리며 좋아했을 것이 아닌가, 눈코입이 턱에 달랑달랑 매달린 채 그저 반짝대는 이마만 훤히 드러난 몰골로 검은 머리카락 날리는 젊은 여자와 붙어 돌아갈 것이니, 내가 외계인인가? 그 상상 자체 하나만으로도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이나마 남의 면전에 얼굴을 안 드러내고 사니 다행이다.
올해부터 할배라는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삼십 대 여자들과 인터넷을 통하여 친해졌기 때문이다. 거의 이십년 가까이 나이차이가 나는 여자와 사귄다는 일은 무척 자연스런 관계를 가져온다. 한 지붕 아래서 젊은이는 늙은이 흉보는 재미에 살고, 늙은이는 젊은 사람들 흉보는 재미에 산다는 맛을 알게 한다. 그 흉이란 것이 별것인가, 젊은 탓에 앞뒤 안 가리는 일이고, 늙은 탓에 더듬더듬 대는 일이니, 나이가 가져다주는 평범한 일이다. 노래로 치면 나는 뽕짝취향이고 젊은 사람들은 발라드취향이니, 늙어서도 뽕짝을 안 듣겠다는 그들의 말이고, 너도 늙어봐라 나도 젊었을 때에 너희들처럼 생각했었다는 내 말이다. 이렇게 사소한 흉허물이 나이차이로 용해되어 서로 친근감을 더 가져다주니 그것도 삶의 즐거움이다.
다섯 살 된 아이와 칠순의 노인과는 친구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 세상이 신기하여서 호기심에 움직이는 심리와 세상에 달관한 느긋한 심리가 통하며, 피어나는 힘과 꺾어지는 힘이 낮은 접점에서 서로 만나기 때문이다. 그런 논리로 본다면 내 마음의 나이는 이미 삼십대로 내려갔다는 말인데, 어떻게 나이값을 할지 모르겠다. 날이 갈수록 눈치만 슬슬 늘어가고 요리조리 빠져나가게 되니, 입빠른 젊은 사람들 말마따나 능구렁이가 다 되었다. 그러고 보니 조순박사처럼 대단한 능구렁이도 없다. 젊은 여자가 춤추자고 손을 내밀 때에, 마음을 비우면서 슬쩍 옆으로 빠져서 자기 체통을 지켜가면서 거절하고, 나중에 신문에 기고하여 “젊고 예쁜 여자의 애틋한 순정을 거절하여 그 미안함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하고 운을 뗀 뒤에 “노년이 젊음을 희롱하면 결례가 되겠기에...... 나도 역시 섭섭하기 그지없었다.”라고 했으니, 그 여자가 조순박사의 이 글을 봤더라면 더욱 애타는 마음이 지극했을 것이다.
얼래? 이렇게 쓰고 보니 완전히 능구렁이 바람둥이 같네. 흐흐,
글 / 은하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