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이거 소설아니니 읽어보세요~

ㅜ.ㅜ |2005.11.09 13:16
조회 587 |추천 0

현재 좀 산다고 거만한 20대들은 이글에서 큰 교훈을 얻기바래여~^^

 

--------------------------- 타 싸잍서 펀 글인데,원저자님은 양해바래요 ---

 

정말 한 순간에 가정이 몰락 할 수 있다는 걸 아시는지요

항상 절망과 방황의 시간에서 보낸 나날이 아직도 기억에 새록새록 남아 있어요.
이제부터 저와 저희 집 얘기를 시작 해보려 합니다.

사실 저희 집은 원래 그렇게 못사는 편이 아니었어요. 남들 사는 만큼 살고 남들 먹는 만큼 먹으며 남들 입을 만큼 입는 아주 지극히 평범한 집안 이였죠.
제가 중학교 들어 갈 때쯤 그러니까 1998년쯤 이었죠,. 저희는 32평짜리 아파트에서 정말 나름대로 행복하게 잘 지냈습니다.
그때 생각해보면 얼마나 꿈같고 그리운지 몰라요. 나름대로 20년 동안 일궈온 피혁 염색 업체를 하시는 아버지와, 다른 어머니들과 다를 바없이 언제나 아주머니들과 전화로 통화하길 좋아하는 어머니, 한창 사춘기로 예민한 누나와 나. 이렇게 오손 도손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우리 집에서 돈이란 건 더 이상 필요 하지도 않았죠. 사실 더 있으면 좋겠지만 뭐 교육비도 넉넉한 편 이었고 매일 주말마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을 대리고 갈비 집과 맛집을 돌며 외식을 시켜주고 엄마 결혼기념일에는 장미꽃을 안겨주던……. 그랬어요. 정말 행복했죠.
저는 외식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아버지가 하던 말을 잊지 못해요.
"내가 더 대학 갈 때쯤에는 빌딩 하나 사서 너 대학 보내고 너희 누나 유학도 보내 줄께. 그리고 우리 마누라 여행도 시켜줘야지."
그게……. 그게. 영원히 이뤄질 수 없는 소망인줄 그 나이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제가 중2 때 저희 아버지 공장에 불이 났습니다. 공장 전체가 전부 다 타버렸죠.
직원의 용접 실수로. 아버지의 모든 것이 다 타버렸습니다.
더욱이 당시는 불경기 인 겨울철. 그나마 잇던 오더도 전부 펑크 내 버리고 아버지는 부도 직전의 회사를 겨우 겨우 지탱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어지는 불경기와 경제 침체로 수출을 주로 하시던 아버지의 공장은 점점 쇠락 해 졌고 200명 가까이 되던 직원들이 하나 둘 떠나 20명도 채 안남게 줄어 버렸습니다.

저희집에는 빨간 딱지가 붙여졌고 결국 집 팔고 이사를 가기로 한 거죠.

그리고 저희는 이사를 갈 수 밖에 없었죠. 학교에서 차타고 30분은 가야할 곳으로 간 우리 남매는 그 때부터 방황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누나요. 사실 공부 잘했어요. 저보다 머리도 좋고 수재죠. 그런데 그놈의 사춘기가 뭔지 속칭 노는 분들과 어울리며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뭐 잠깐이지만.)
저는 어땠을 까요. 누나처럼 애들과 어울려 다닌 건 아니지만 학교나 학원 땡땡이치며 놀기 바빴고 독서실보단 피 씨 방과 편의점을 돌며 지냈습니다. 마침 우울증으로 심해져 있던 어머니. 생활비가 원 500에서 200으로 줄고 다시 200에서 100도 간간히 벌어오다가 어느 날부턴 생활비를 못 주시더군요…….남들보다 뒤떨어진다는 자괴감인지 어머니도 나약하게 무너져 갔습니다.

게다가 중3에 들어 저 또한 심한 우울증을 앓았기 때문에 더욱 힘들었죠.(자살 시도도 한두 번 한 게 아닙니다. 한번은 약먹고 방에 문 잠긴걸. 누나가 보고 말렸었죠. 다행히 제가 착각해서 수면제인줄 알고 먹은 약이 감기약인걸 알았을 때 어이없어 엄청 웃었습니다. ㅡㅡ;)

우리 집의 사정은 점점 악화 되었습니다. 잇따르는 반품과 바이어들의 계약 취소 등으로 아버지의 공장은 점점 무너져 갔습니다. 점점 생활비를 못 가져다주는 날이 많아 졌고 고등학교 입학 할 때쯤 많은 생활비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주위 분들에게 빌려서 쓴 것이었죠. 더 이상 나아질 것이 없던 불경기에 정말 절망! 밖에 없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지 고등학교를 당시 꼴통으로 불리던 학교로 가게 되었고. 저희 누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전학 가게 되었습니다.(통학하며 지내죠.) 거기서 마침 그 학교 특활 산업 이였던 미술을 할 수 있었던 저는 여러 고마운 선배들과 친구들, 선생님들을 만나 정신을 차리고 " 나라도 대학 가야지" 라고 생각 하게 되었죠. 당시 미술이라는 것에 대해 관심도 적었던 저는 사실 대학이라는 목표가 더 컸던 게 사실이죠. 뭐 지금은 제 전부지만.

하지만 저희 집에는 두 사람 다 공부 시킬만한 여력이 어려웠습니다. 아무리 특화 화된 미술부라도 그 재료비건 회비건 단돈 몇 십만 원도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2~3달씩 밀려서 내곤 했습니다. 뭐 내게 돈 내라고 하는 선생님에게는 (선생님의 입장에서도 그런 말하기 쉽진 안았을 테죠 .) 제가 매일 깜박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깜빡하겠습니까. 뭐 그래도 그때 까지만 해도 그렇게 문제 될 건 없었어요.
그나마 희망이 있다고 믿었죠. 더구나 아버지 회사가 부도가 난건 아니고 앞으로 여러 오더들도 있다니까…….그거 믿고 공부도 진짜 열심히 했습니다.
선생님께 얻어서 본 해설 문제집 여분들과 얻어 쓴 문제집, 그리고 딸랑 단과 하나 끊어 놓고 빈 강의실에서 자습을 해야 했습니다. 주위 학원 선생의 눈치와 모멸감을 뒤로 한 채 , 꿋꿋하게 혼자서 오직 공부 만 할 뿐이었죠. 그것도 여의치 않을 때는 학교에서 밤늦게 까지 자습하면서……. 고1부터 그렇게 공부 해온 전 덕분에 내신은 전교에서 밑바닥을 돌다가 점점 상위권을 유지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에 고1때 치룬 중간고사떄 등수가 전교생 284명중 280등이었죠. 그러다 고2말쯤엔 전교에서 5등 안에 들 정도로 올려놨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머리가 좋냐. 절대 아닙니다. 저 사실 머리 나빠요. 사실 저희 학교 애들이 공부 안한 것도 있고, 문제가 비교적 다른 학교들 보다 쉬운 것도 있죠. 그래도 죽어라 교과서만 외우면서 공부했습니다. 누구라도 중간고사를 한 달~ 한 달 반 동안 준비하면서 교과서만 달달 외우면 적어도 내신은 좋게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 희망은 고2 말쯤 무너졌습니다. 아버지의 회사는 더욱더 어려워 졌습니다. 직원도 채 10명도 안남게 되었고 이제 오더가 와도 하지 못하는 수준까지 이르렀습니다. 당시 고3이었던 저와 재수생이었던 저희 누나. 문제집 값과 학원비 도 벅찼습니다. 그나마 머리가 있던 저희 누나는 공부라도 열심히 했지만 문제집이 없어 매일 친구 선배에게 빌리거나 엄마에게 잔소리 하며 떼쓰기 바빴고,
애초에 대학에 목숨 건 저도 문제집 살 돈이 없어 선생님께 해설 문제집을 얻어 쓰며 공부 했습니다.
특히 당시 수험생이던 전 그 1년이 지옥 보다 더 괴로왔 습니다.
문제집 살돈도 없고 종합반 끊을 돈도 없던 저는 그렇다고 독서실 간 돈?  당연히 없죠. 집에 전화건 인터넷이건 신문이건 끊긴 건 오래고. 난방도 끊겼죠. 일시적이지만 전기랑 가스 까지 끊겼던 적도 있었습니다. 난방도 안 되는 아파트에서 추운 겨울을 찬물로 씻으면서 수험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군대 가신 분들 초겨울에 군대서 그렇게 씻어 보셨으니 얼마나 곤욕인줄은 아실 겁니다.

전 아파트 관리비가 그렇게 무서운 건지 몰랐습니다. 하기야 관리비만 반년정도 밀렸으니…….


하지만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건 아버지였죠. 무너지는 공장과 위축되는 열등감땜에 아버지의 의처증은 날로 심해져 갔습니다.

더욱이 어머니 또한 우울증이 정말 심하셨기 때문에 매일 인터넷에 빠져 채팅과 고스톱에 빠져 살고 실제로 번개 까지 하려고 했습니다( 도중에 아버지께 걸려 둘이 싸우셨죠.).매일 아주머니들과 어울려 술 마셔 취해 오는 날이 많았고 그 것 때문에 아버지는 번개서부터 시작된 불신이 이어져, 어머니를 계속 의심하며 싸우고 때리고 화해하기를 반복했습니다. 일주일에서 월요일 에는 엄마가 늦게 들어오면 화요일 날 밤에 싸우고 일요일 날 가까스로 싸우고 월요일 에는 다시 술에 젖은 엄마 그리고 반복.


그리고 점점 다가오는 수험생의 압박과 스트레스. 아까도 썻아시다 시피 저희 학교는 당시 비평중화 되어 선발했던 학교기 때문에 당시 꼴통이라거나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이 많이 온 학교 이었습니다. 당연히 맘 잡고 공부만 하는 나를,다른 애들이 좋아 할리 없죠. 주위의 시기심과 질투로 가득한 학교... 늘지 않고 제자리를 머무는 그림. 늘어가는 선생님의 핀잔과 집안의 불화. 불확실한 미래. 점점 멀어지는 친구들. 저는 학교에 있으나 집에 있으나 제게 쉴 곳이란 없었습니다.


한번은 제가 수능보기 약 한달 반 전, 사건이 터지고 맙니다. 그 날도 어김없이 아버지가 집에 먼저 오시고 엄마는 또 술에 절어 늦게 오십니다. 저는 내일 시험을 대비해 일직 자는 중이었죠.
자다가…….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문을 박차고 나가보니. 아버지는 가위로 엄마를 치르려고 하더군요. 또 그놈의 의처증입니다. 저는 몸으로 막아섰죠.

결국 이내 두 사람의 힘을 못이긴 아버지는 혼자 벽을 가위로 뜯으며 자해하기 시작합니다. 경찰이 오고, 난리가 났죠.
이렇게 매일 저희 남매는 아버지 때문에 공포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누나는 당시 그 스트레스 때문에 관절이 틀어지기도 했고, 저 또한 그때 부터 지금까지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땐 집 현관문에 인기척만 들려도 심장이 멎을 것 같았습니다.


이혼 하려고 엄마랑 아버지는 법원에 수십 번도 더 가셨습니다. 그 때마다 할머니 주위 친척들이 설득해보고 당시 제가 이혼만은 안 된다며 눈물로 말렸었죠.
우리 중학교 때 그대로 돌아 갈 수는 없냐고. 제발 그때로 돌아가면 안 되냐고.
이게 먹혔는지 아닌지. 가까스로 이혼만을 막은 채 결국 어머니와 아버지는 각방을 쓰시거나 결벌하시기도 했습니다.

이런 집에서 공부가 되겠습니까. 안되죠. 그래서 아까 쓴 것처럼 집이 아닌 학교에서, 학원에서 눈치 보며 공부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도중 저는 대학 수시 2학기에 붙게 되었습니다. 그땐 정말 기뻤죠. 

온 가족이 껴안고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이제 너 고생 끝이다. 미안하다. 우리 땜에 맘고생 많았지. 그때만은 우리 집이 중학교 때로 돌아 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근본이 달라질 것은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회사는 결국 부도가 났습니다. 음행 대출 납부 기일을 지키지 못했고.
결국 아버지는 그렇게 무너지셨습니다.
제 등록금. 저희 아버지가 내주신거 아닙니다. 사실 저희 어머님 친구가 저희 집 사정을 아셔서 대신

내주신 겁니다.
그것도 등록금 내는 바로 마지막 날 마감 1시간 전에 낸 것입니다.

전 마감 날 만해도 돈 없어서 대학 못가는 줄 알았습니다.
전 입학 때 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좀 모았습니다. 버스비가 없어서 자전거로 30분 걸어서 1시간 걸리던 길을 매일 걸어가며 주말이고 공휴일이고 알바로 조금이라도 더 벌려고 일했습니다.

그 돈, 중 제가 쓴 건 제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MP3하나가 전부입니다.

나머지요? 당연히 식비,

가스비,전기료 니 뭐니 이런데 썼죠.

대학 가서 새로운 친구들과의 만남, 좋은 선배들 때문에 저 또한 많이 변했습니다.

하지만 집안 사정은 .. 더 나빠졌죠.
전 기숙사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반년동안 집안 사정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단지 몇주만에 갈 때 마다 생긴 부셔진 문짝과 가구들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고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집에 가려고 하는데 집에서 오지 말랍니다.
집이 경매에 넘어 갔습니다. 빨간 딱지가 2번째로 붙여진 셈이죠. 이번엔 완전 틀린 것 같습니다.

강제 추방. 그거 아실 겁니다. 집이 넘어가게 되면 아저씨들이 강제로 내쫓습니다.

가구나 이런 거 대충 싸가지고 용역업체분들이 실어서 밖에다 내버린다고 하더군요.

그가 싸가지고 제가 기숙사에 잇는 동안 어머니와 아버지는 여관방을 전전하시고 누나는 친구네 집에 얹혀살았다고 합니다.
그때 누나한테 예기 처음 얘기 들었을 때. 화장실에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정말 미안하고 죄스럽고 해서..

그러다 어머님 친구께서 급하게 구해주신 10평짜리 사글세로 겨우 들어가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사글세에 와서 아버지의 의처증은 나아 질 줄 몰랐습니다. 전 그래도 그 고생을 했는데 둘이 가까워졌겠지'..했는데.. 아니더군요.
어느 날 집에서 전화가 한번오더니 뚝 끊깁디다. 그래서 누나에게 전화하니까 "야. 난 이제 엄마건 아빠건 없다. 그냥 우리 둘만 있는 거야. 알았지" 하며 끊는 겁니다. 그리고 통화 두절. 새벽2시에 택시 타고 가보니 엄마는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외가로 피신 해있고 아버지는 집에서 담배만 뻐끔 뻐금 피며 오히려 자기가 잘했다는 듯 저에게 설교 하더군요……. 그때의 아버지를 저는 지금까지도 납득하기 힘듭니다. 그렇게 까지……아버지가 미웠던 적은 없습니다.
어떻게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까지 하더군요.

뭐 그레도 겨우겨우 화해시킨다고 했지만 엄마는 아버지랑 이혼하기도 굳히고 계셨습니다. 그때 까지만 해도. 더 이상 살 생각 없다며. 저도 더 이상 막지 못했죠. 그렇게 하시라고.

그리고 엄마는 본격적으로 일을 하시기 시작하셨죠.(그전부터 준비 하던 것이지만.)
그리고 1년이 지났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지금 중국에 엔지니어로 가계십니다. 가서 돈은 사실 못 벌어 옵니다. 오히려 엄마에게 손 벌린 돈이 더 많죠. 엄마는 지금 고춧가루 판매업 하십니다.(아직 직원이시라 한 달에 100만원도 채 못 버십니다. 오해 하지 마세요.)(안심하세요. 중국산 불량 고추 가루는 절대 판매 하지 않는 식약청 허가 받고 정식으로 영업하는 업체입니다. 중소업체지만….저희 집 김치도 저희 고춧가루로 담가 먹습니다. ㅡㅡ;)
그 곱던 손이 지금은 고추가루때문에 트고 달아서 갈라지고 상처투성이 몸을 보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저희 누나요? 지금 다시 공부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나빠질래 나빠질 경제 상황도 아니니 어디 한번 해보겠다고 하더군요. 저도 응원을 아끼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사실 관계가 완전히 회복 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전보단 많이 좋아졌습니다.

자랑도 마찬가지고요. 사실 지금 전 아버지를 용서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끔 들여오는 안부 전화가 전부긴 하지만……. 그래도 엄마는 가끔 아버지 얘기 하시면서 그리워하시는 것 같아요. 뭐 자주 한국에 오시긴 해도……. 없으면 허접해 하시는 거 보면.
다행이라는 생각은 듭니다.

그런 전…….

어떻게 보면 저도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외형도 외형이지만 생각이…….
이 지경까지 됬는데 더 잃을 게 뭐냐 생각도 들고...

하지만 사실 확실하진 않아요. 앞으로 더욱 고난은 올 수 있고, 더 힘든 시련도 얼마든지 마련 돼 있으니까. 그래도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꿋꿋이 버텨 가겠죠.
그래도 지금은 얼마다 좋은데요. 적어도 난방도 되고 따뜻한 물도 나오니까요.

이젠 저는 절대 저 혼자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제주위에 많은 분들이 ㅁ낳을 얘기들과 격려. 충고들로 말이죠. 세상에는 만 가지 사람이 있으면 만 가지 이야기가 있고 만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중 한가지 유형일 뿐이죠.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