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의 주연은 ‘붉음’이다. 단풍에 이미 ‘붉다’는 글자가 포함되어 있으니 빨강이 주연을 차지하는 건 당연지사 아닌가. 그렇다면 노란 빛은 어떤가? 속절없이 붉기만 하다면 얼마나 숨이 막힐까. 타오르듯 붉은 단풍에 간간이 섞여있는 노란 은행잎은 가을산행의 쉼표다. 은행잎의 감초같은 지원이 없다면 흥행은 애초에 접어야 할 판이다.
영주 부석사 일주문 들어가는 은행나무길.
하지만 때로 ‘노랑’도 주연을 넘본다. 은행나무가 끝모르게 이어진 거리에서 사람들은 숨을 죽인다. 연인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원색 하나로만 이뤄진 세상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괴테는 은행잎을 사랑의 상징으로 여겼다. 두갈래로 갈라졌지만 하나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익어가는 가을, 손에 손을 잡고 ‘노란 천국’을 거닐어보면 어떨지. 은행잎이 아름다운 거리를 꼽아봤다.
#고요한 탄식, 부석사 길
부석사 길은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은행나무 길이다. 경북 영주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한 절이다. 오랜 역사만큼 단풍 역시 아름답다. 일주문에서 천왕문 앞 당간지주까지 500m 길을 걷노라면 숨이 턱턱 막힌다. 고려시대 목조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무량수전(국보 제18호)과 소조여래좌상 등 국보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황송할 따름이다. 시간이 허락하면 무량수전에서 노을을 감상하자. 단풍속으로 번지는 석양에 가슴이 벅차다. 인근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은 놓치지 않고 들러야 한다.
#낭만의 노란색, 남이섬
드라마 ‘겨울연가’는 남이섬의 대표선수를 메타세쿼이아 길로 만들었다. 하지만 터주대감은 역시 은행나무. 영화 ‘겨울나그네’에서 강석우와 이미숙이 사랑을 나누던 곳으로 노랗게 펼쳐진 은행나무가 뇌리에 또렷이 남아있다. 사람이 드문 새벽에 은행나무 길을 걸어보자. 안개를 머금은 은행나무 길은 몽환적이다. 바스락거리는 은행잎이 귓가를 간질인다. 자전거를 대여해도 좋고 마냥 걷는 것도 나쁘지 않다. 1년중 남이섬이 가장 아름다운 때가 10월 말이다. 관리사무소 (031)582-5118
#천년동안 노랗게, 용문사 은행나무
남이섬 은행나무길.
경기 양평 하면 생각나는 것이 용문산이다. 용문산 하면 생각나는 것이 용문사의 은행나무다. 그만큼 은행나무는 용문산과 뗄 수 없는 관계다. 331번 지방도로부터 은행나무가 얼핏 보인다. 본격적인 시작은 용문사 일주문. 1㎞ 남짓 되는 은행나무 산책길은 어린이도 쉽게 오를 만큼 평탄해 인기가 높다. 대웅전 앞에는 1,100년이 넘은 거대한 은행나무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다. 높이만 50여m. 인간을 압도하는 크기에 놀라고, 산사를 물들이는 노란 아름다움에 다시 놀란다. 용문산의 계곡은 물 맑고 단풍 예쁘기로 유명하다. 양평군은 16일까지 용문산에서 은행나무 축제를 개최한다. 양평군청 (031)770-2471
#충무공을 닮았다, 현충사 길
현충사로 들어가는 은행나무 길은 최근에 와서야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염치읍 곡교리와 송곡리 일원에 걸쳐 곡교 천변에 위치한 은행나무 거리는 2000년과 2001년에 산림청이 주최한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2년 연속 우수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떨쳤다. 현충사로 들어가는 이 은행나무 길은 늘어선 모양이 다른 곳에 비해 규칙적으로 잘 정렬되어 있다. 현충사에 모셔져 있는 충무공을 닮아서일까. 훈련이 잘된 군사를 보는 것 같다. 인근에 맹사성 고택(古宅)이 있는데 수백년 된 은행나무가 운치를 더한다. 아산시 문화관광과 (041)540-2565
#가까워서 좋다, 서울의 은행나무 길
힘든 등산이 싫거나 멀리 떠나기 귀찮은 서울시민이라면 시내 중심가로 눈을 돌려보자. 정동길은 서울 최고의 은행나무 길. 덕수궁부터 경향신문사까지 1㎞ 정도 거리가 노란 융단을 깔아놓은 듯하다. 10월말까지 정동문화축제가 열려 오감만족이다. 삼청터널에서 동십자각으로 이어지는 삼청동길 2.9㎞도 200여 그루의 은행나무로 눈이 부시다. 도봉산 입구까지 500m가 이어지는 도봉산로도 노란색으로 물든 환상적인 길로 유명해 가족단위 등반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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