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난 길을 가는 것과 심심하지 않은 인생을 사는 것이 같지 않다는 것을 안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기에. 난 바로 얼마전 까지만 해도 소심스러운 범죄를 꿈꾸며 일탈이 마치 영웅적인 면모를 반영하는 양 악한 동화를 상상해가며 인생을 가공할 실험대에 올려놓고픈 한심한 계획을 도모했던 것이다.
누군가의 적어도 사람들의 눈치에서 만큼은 벗어나고 싶었다. 뭐라하든 어떤 시선으로 쳐다보든 상관하지 않고 즐기고 싶었다. 마치 한번도 그렇게 살아보지 못해 한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오른 사람처럼 50년동안 눈을 뜨지 못했던 사람이 붕대를 푸는 순간 생전 처음의 빛과 마주쳐 어찌할 줄을 모르는 것처럼 그렇게 환희를 만끽하고 싶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사춘기만으로 한정짓는 것은 부적절하다. 어린날은 그 시작일뿐 질풍노도는 죽을때까지 따라다니는 살아있음을 증거하는 그림자인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말이다. 삐뚤어짐을 바라는 일은 사실 그 된소리로 짝을 맺은 단어만큼이나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세상엔 모두가 할 수 없는 일이 있고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는 일이 있으며 꼭 모든 사람이 겪어내고 감당할 필요가 없는 일이 있다. 탈선과 방황의 자격은 사실 사법고시 2차합격만큼이나 주어지기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crazy beautiful
이유를 굳이 설명하자면 말이다. 난 사실 12살때 어머니가 자살하는 일은 겪지 않았다. 나의 아버지가 세계평화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미상원의원도 아닐뿐더러 아버지가 돈이 많은 계모와 결혼하는 일도 겪지 않았다. 술, 담배 마약을 즐길 기회도 없었고 그런 친구들이 가까이에 있지도 않았다. 낯선 번호판이 붙어있는 차를 운전할 일도 없었으며 비행청소년 개선프로그램이 되어있는 학교로 전학 갈 필요도 없었다. 피부색이나 언어가 다른 인종과 섞여 살지도 않아으니 거기서 비롯되는 분쟁도 당연히 본 적이 있을리가 없었다. 속옷만 입고 밤거리릴 쏘다니며 낯선 사람들과 춤을 출일도 없었고 미식축구장에서 소리지를 일도 없었다. 학교가 멀긴 했다만 두시간씩이나 버스를 타고 다닐 정도는 아니었고 백인 여자친구나 멕시코계 남자친구를 사귄다고 학교에서 괜한 시비를 부를 일도 없었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선생님에게 수업시간에 난데없는 질문을 받아서 영어로 대답할 일도 거의 없었고 시험시간 중간에 뛰쳐나와 백인여자친구와 야반도주를 할 일도 없었다. 경찰에게 걸려 심문당하거나 몸을 수색 당할 일도 없었고 술에 취해 울고 소리지를 겨를도 없었다.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이런 점들은 앨범을 아무리 뒤져도 찾아보기 힘든 까닭이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저 주입당한 한글과 한국어만을 써가며 무사태평하고 커다란 굴곡 없이 살아온 셈이 되는 것이다. 크게 삐뚤어지지 않았음은 아마 처음부터 내정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일인 것이다. 여기는 다수의 인종이 섞여사는 미국이 아니고 고등학생들이 차를 몰고 한반의 고속도로를 멋들어지게 가로지를 만큼 만만한 곳도 아니며 특히나 미식축구 대항전을 보려고 속옷에 코트만 걸친 채 소리를 쉽게 지를 수 있는 곳은 아니었기에 나는 조금 심심하긴 했지만 술과 약에 절어 울음소리를 낼 문제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을 보는 것은 상처의 생성과 더불어 보는 이에게 따뜻하고 유쾌한 감동을 선사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멕시코 소년과 미국 소녀의 러브 스토리는 흔치 않은 설정이면서도 전달하는 바가 크다. 꼭 교훈적이라고 들먹거리지 않아도 개개인들간의 우연을 벗삼은 끌림이 결국엔 가족애의 회복과 상처의 치유로까지 이어진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미 내뱉은 말보다 다하지 못한 위로의 말이 많았고 앞으로 만나야할 사람보다 지금껏 나를 있게해준 과거의 은인들을 상기시키는 일이 더 값진 일일테니.
사랑하는 사람의 역활은 당사자들에게나 그것을 지켜보는 이에게나 그 존재만으로 전달해주는 바가 큰 것이다. 고난 뒤의 행복의 더 큰 것이겠지만 비교급을 대입해 더 큰 행복을 맛보기위해 더 잔인한 시련을 겪을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알지 못하고 발견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을뿐이지 누구에게나 삶은 순탄치 않고 거기에서 발생되는 행복의 농도조차 천차만별이다. 가끔씩 버릇없는 충동이 가슴팍을 벗어나 피부로 내질러 나가려 하지만 아무래도 자제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할 듯 하다
느껴지는 것은 아직 내가 겪은 시련이 이들보다 작아서도 그러겠지만 꼭 같은 경우를 겪는 다고 해서 같은 반비례의 행복으로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고 돌아온다고 해서 그 행복이 주인공들과 같은 성격의 것은 아닐테니 말이다. 꼭 따지지 않아도 알 수 있었겠지만 행복해야만 하는 타당성을 찾기위해 이렇게 오랫동안 긁적이게 한 걸 보면 가끔 현실을 대리해주는 영상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게 해준다. 흔하고 뻔하게 느껴질 법한 스토리와 캐릭터를 경쾌하고 맛깔나게 담아준 감독과 배우들에 진정한 고마움을 전해본다.